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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기록으로 본 조선시대 사회문화' 특별전 개최
  • 작성일 2008-05-23
  • 조회수 3030
  • 담당자 학예연구실 은화수 (s8r+14+Js8r56bg=)


석탄石灘 이신의李愼儀 종가 기증유물전

국립광주박물관 [기록으로 본 조선시대 사회문화] 특별전 개최
-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


국립광주박물관(이하 光博, 관장 조현종)은 2008년 네번째 특별전시로 석탄 이신의 종가 기증유물전 “기록으로 본 조선시대 사회문화”를 오는 5월 23일부터 6월 22일까지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光博이 2003년과 2004년 2차례에 걸쳐 석탄 이신의 종가로부터 기증받은 148점의 유물을 중심으로 기획되었으며, 이외에도 『석탄집石灘集』목판 등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유물도 함께 선보인다.

석탄石灘 이신의李愼儀(1551~1627)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82년 선조 때 학행으로 천거되어 예빈시봉사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 300여명을 이끌고 왜적에 맞서 싸웠으며, 그 공로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이 되었다. 이외에도 사옹원 직장과 이후 공조좌랑, 남원부사, 고부군수, 해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 때에는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 유폐에 대하여 목숨을 걸고 항소하여 변방인 회령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형조참의· 형조참판 등을 제수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왕을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을 가다 수원에서 병사하였다. 이에 ‘문정文貞’의 시호를 하사받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문봉서원文峰書院과 화암서원花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이처럼 석탄은 당대에는 충의와 절의의 선비로 이름이 높았으며, 해주목사를 마치고 돌아갈 때에는 온 고을 백성이 그의 길을 막아서는 모습에서 보이듯 백성을 사랑하고 어진 정치를 폈던 관리였다. 또한 딸의 죽음 앞에 제문을 짓고 유배기간에도 편지로 자식과 손자들에게 학업을 독려한 자상하고 어진 어버이였다. 뿐만 아니라 회령에서 유배 시 구한 400년이 넘는 거문고와 그가 남긴 「사우가四友歌」에서 보이듯 빼어난 예술가였다.   

전시유물로는 선무원종공신녹권과 400년 전의 거문고를 비롯하여 각종 교지, 준호구, 호구단자, 토지매매문서, 양자입안 등 조선시대 양반들의 삶을 매우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옛 기록들이 선보인다. 남녀가 평등하게 재산을 나누었던 조선사회의 모습과, 노비로 하여금 토지매매를 하던 조선 양반가의 모습 등은 오늘날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당시의 풍경이다.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양자를 들이고 이를 예조에 알려 승인을 받고, 오늘날 호적등본과 같은 호구단자 등을 작성하던 모습은 지금 우리의 모습과 다름이 없어 눈길이 간다. 100여명이 넘는 노비가 있었던 당시 양반가의 모습에서는 신분제 사회의 또 다른 일면을 살필 수 있다. 몰래 후손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명당에 자리잡은 남의 조상 묘소에 암장을 하고, 또한 이러한 묘를 옮기게 하기 위해 험상궂게 생긴 관원을 파견해 주길 요청하고, 이도 부족해 흥선대원군 등 당시 최고 권력자에게 상소를 올리며 수년을 싸우던 풍경을 통해 조선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이번 전시회를 통해 잘 알려지지 않은 조선의 선비 이신의를 만나보고 아울러 그의 후손들이 남긴 옛 기록들을 통해 조선시대 사람들의 생생한 모습과 지혜를 살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또한 조상의 얼과 정신을 지키고자 했던 기증자의 애착과 열의를 생각해 보는 뜻 깊은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

 


의병과 나라를 지키다 -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호적자료戶籍資料]

 


[거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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