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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국립중앙박물관, 기획특별전 “다시 보는 역사 편지, 고려 묘지명” 개최
  • 작성일 2006-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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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당자 전시과 서성호 (s8r+)


국립중앙박물관, 기획특별전 “다시 보는 역사 편지, 고려 묘지명” 개최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이건무)은 오는 7월 11일(화)부터 8월 27일(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역사관에서 2006년 다섯 번째 기획특별전 “다시 보는 역사 편지, 고려 묘지명”을 개최한다. 그 동안 단편적으로만 공개되던 고려 묘지명의 실물들을 한데 모아 고려 사회의 다양한 문화와 질서, 그리고 그 삶의 모습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마련되었다.

묘지명(墓誌銘)은 무덤의 주인이 누구이고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 무덤 안에 넣은 기록물을 말한다. 비록 각각의 묘지명은 개인적인 동기로 만들어졌지만,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당시의 문화와 역사, 삶과 생각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소중한 역사 편지이기도 하다.

고려(高麗)는 우리 역사상 가장 자주적이면서도 우수한 문화저력을 갖춘 왕조의 하나이다. 거란 침략군을 물리친 강감찬의 귀주 대첩, 삼별초의 대몽항쟁 등 외세에 대한 저항의 역사와 더불어 고려청자와 팔만대장경, 금속활자 같은 탁월한 문화유산을 창조해 낸 것은 고려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증거들이다.

이처럼 우수한 저력을 지닌 고려 왕조가 5백여 년이나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냉엄한 국제 정세 속에서 일관되게 자국의 이익을 실현해 간 진취적인 대외 정책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개방적인 문화 풍토, 보다 열려 있는 가족 구성원 간의 소통과 유대 등이 그 바탕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화와 지방 자치, 양성 평등과 문화의 다양성이 화두가 되고 있는 오늘날 고려를 다시 돌아보아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묘지명 70 여 점과 관련 유물이 함께 출품되는 이번 전시의 내용은 크게 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 <해동천자의 나라>는 독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황제국(皇帝國)을 자처한 고려 왕조의 정치적 특성을 알 수 있게 하였다. 2부 <가족과 여성>에서는 혼인과 거주의 실상, 재혼과 상속을 통해 본 여성, 부부간의 사랑 등 가족생활과 여성의 삶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3부 <정신세계>에서는 불교와 유교, 도교, 풍수지리, 민간 신앙 등 다양한 사상과 신앙이 공존하며 서로 열려 있던 문화의 풍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에는 이 밖에도 단아하고 아름다운 묘지명, 받침대가 있는 특이한 묘지명, 새로 발굴한 정언심 묘지명 등이 소개되며, 특히 이들 묘지명의 내용과 관련된 도자기나 공예품, 회화류, 문서 등도 함께 전시된다. 그 중에는 고려의 여성과 지방 사회, 민간신앙, 대외항쟁 등과 관련하여, 신씨자매노비분집문기(보물 제1005호. 장덕필), 청자‘신축’명 벼루(보물 제1382호. 삼성미술관 Leeum), 정지장군환삼(보물 제336호. 광주광역시립민속박물관), 강민첨 초상화(보물 제588호. 국립중앙박물관) 등 4점의 지정문화재도 흔치 않은 관람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소중한 역사자료인 고려 묘지명을 가장 방대하게 소장하고 있는 국립박물관이 이처럼 실물들을 처음으로 한데 모아 공개함으로써 관련 학계에 이바지하는 바가 작지 않으리라 기대된다. 나아가 일반인 누구나 실물 묘지명을 통해 또 하나의 전통인 고려의 역사와 문화, 사람들의 삶과 꿈을 이해하고, 개인의 생애와 기록에 대한 문제도 함께 생각해보는 귀한 기회가 될 것이다.

 

■ 대표작품

남편이 쓴 그리운 아내의 묘지명
염경애 묘지명
고려(高麗) 의종 2년(1148)
70.3×33×3cm  16.2kg

고려 중기의 문신이자 효자로 이름난 최누백(崔婁伯 : ?~1205)이 죽은 첫 부인 염경애(廉瓊愛 : 1100~1146)를 위해 직접 지은 묘지명이다. 수원 향리의 아들로서 과거를 통해 벼슬에 오른 최누백은 이 묘지명에서, 가난한 하급 관료 시절 가계를 위해 동분서주하던 아내와의 대화를 추억하고, 그녀를 결코 잊을 수 없다며 애통해한다. 아내를 잃은 아픔과 외로움이 너무 컸던지 얼마 후 그는 재혼하여 새로 3남 2녀를 둔다.

▶ 조강지처의 추억
아내의 이름은 경애라…평소에 일찍이 내게 말하기를,
“…뒷날 불행히도 내가 천한 목숨을 거두고, 당신은 많은 녹을 받아 모든 일이 잘 되더라도 저를 살림하는 재주가 없었다 하지 마시고 가난을 이겨내던 일은 잊지 말아주세요”라고 하였는데, 말을 마치고는 크게 탄식을 했다.
내가 좋은 벼슬로 자리를 옮기니, 아내가 기뻐하며 말하였다. “우리의 가난도 이제 가시려나 봐요”
내가 (무정하게) 대답했다. “간관은 녹봉이나 받는 자리가 아니요”
(그러자) 아내가 말했다.
 “어느 날 당신이 궁궐에서 천자(天子 : 임금)와 옳고 그른 것을 따지게 된다면, 비록 가시나무 비녀를 꽂고 무명치마를 입고 삼태기를 이고 살게 되더라도 달게 여길 거예요” 평범한 부녀자의 말 같지가 않았다.
그 해 9월에 아내는 병이 들었는데 이듬해 정월에 위독해져 세상을 떠나니, 한(恨)이 어떠하였겠는가 …
믿음으로 맹세컨대 당신을 감히 잊지 못하리라.
함께 묻히지 못하여 심히 애통하도다.

 

황제 따님의 묘지명
복녕궁주왕씨 묘지명 
고려(高麗) 인종 11년(1133)
44×77.5×3cm  26.7kg

고려 숙종(肅宗, 재위 1095~1105)의 넷째 딸이자 예종(睿宗)의 친동생인 복녕궁주 왕씨(福寧宮主 王氏 : 1096 ~1133)의 묘지명이다. 이 묘지명은 중국 송나라의 연호를 쓰면서도 복녕궁주를 “천자의 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사대(事大) 외교의 형식 속에서도 스스로를 천자의 나라로 자부하였음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 천자의 따님, 복녕궁주

 천자(天子)의 따님이여, 보름달 같으셨네.
 저 흰 구름 타고 하늘 위에 오르셨는가.
 쫓아가려 해도 따를 수 없으니, 바람은 쓸쓸하고 하늘만 푸르고 푸르네.
 한 마디 말로써 묘지를 지으니, 천년만년 잊히지 않으리라.


의붓아버지가 공부시킨 자의 묘지명
이승장 묘지명 
고려(高麗) 명종 23년(1193)
83.8×39.9×4.2cm  18.7kg

고려 중기의 문신 이승장(李勝章 : 1137~1191)의 묘지명이다. 이 묘지명은 『고려사』에 보이지 않는 이승장의 거의 유일한 자료이다. 이 묘지명에서는 특히, 가난을 이유로 전 남편 소생의 사교육에 부정적인 새 남편을, 전 남편에 대한 의리까지 들먹이며 설득하여 뜻을 관철시키는 고려 여인의 모습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재혼에 대한 당시의 관념과 재혼 가정의 일면, 그리고 재혼 여성의 발언권 등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 내 자식의 교육을 위해서라면

의붓아버지가 가난을 이유로 공부시키지 않고 자기 친아들과 같을 일을 하게 하자, (이승장의) 어머니는 그럴 수 없다며 고집하기를,
“먹고 살기 위해 부끄럽게도 전 남편과의 의리를 저버렸지만, (전 남편의) 유복자[이승장]가 다행히 잘 자라 학문에 뜻을 둘 나이[15세]가 되었으니, 그 친아버지가 (생전에) 다니던 사립학교에 입학시켜 뒤를 잇게 해야 해요. 안 그러면 죽은 뒤에 내가 무슨 낯으로 전 남편을 보겠어요?”라 하였다.
마침내 (새 남편이) 결단하여 (이승장을) 솔성재(率性齋)에서 공부하게 하니, 전 남편의 옛 학업을 뒤따르게 한 것이다.
* 솔성재(率性齋) : ‘해동공자’로 불린 11세기의 유학자 최충(崔冲)이 세운 사립학교 문헌공도(文憲公徒)의 아홉 공부방 가운데 하나.


노자(老子)를 흠모한 불교도 관리의 묘지명
윤언민 묘지명 
고려(高麗) 의종 8년(1154)
61.3×26.6×1.8cm  7.6kg

여진 정벌로 유명한 윤관(尹瓘)의 아들 윤언민(尹彦旼 : 1095~1154)의 묘지명이다. 형 윤언이와 함께 김부식을 보좌하며 묘청 난을 진압하였으나, 이 묘지명에는 정치적 행적 같은 것은 기록하지 않았다. 그 대신 『고려사』에서 전혀 언급하지 않은 가족 사항과 의학 지식, 그리고 도가(道家), 불가(佛家)에까지 두루 심취한 정신세계 등을 전해주고 있다.

▶ 소를 타고 출근하다.

날마다 푸른 소를 타고 출근하여 낮에는 일을 보고 밤에는 불경을 외었다. 인종 임금이 그 얘길 듣고 탄복해 마지않다가, 직접 그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고 그림 위에 자신의 □(으)로 ‘일장선생이 푸른 소를 타고 불경을 외우는 그림[日章先生騎靑牛念經之圖]’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
<뒷면>
가부좌를 틀고 향을 사르고 손을 거두었는데, 죽는 것을 집에 돌아가듯이 평안하게 여기며 돌아가셨다. 향년 60세로 그 용모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그 뒤 □ 평생 더불어 지낸 도교와 불교의 지도자들이 모두 앞에 나와 분향하고 존경을 표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신선의 세계에서 노닐며 구속을 받지 않고, 더욱이 불교에 뛰어나서 깨달음을 위해 수행하시었네.

* 일장(日章) : 윤언민의 자(字).
* 노자와 푸른 소
고대 중국의 사상가 노자(老子)는 자신의 뜻이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자 푸른 소를 타고 속세를 떠났다고 한다. 이 때  함곡관(函谷關)을 지키던 관리가 노자에게 가르침을 청하자 노자는 5천여 마디의 말을 남겼는데 이것이 훗날의 도가 경전 『도덕경』이라는 것이며, 푸른 소를 타고 떠난 노자의 행적은 속세를 벗어난 삶을 상징하게 되었다.

숙모님의 묘지명
황보양 처 김씨 묘지명 
고려(高麗) 의종 3년(1149)
47×27.3×2cm  6.4kg

고려 중기의 문신 황보양(皇甫讓 : ?~1134)의 부인 경주 김씨의 묘지명이다. 남편의 관품이 높지 않았고, 김씨부인의 두 아들 모두 현직에 있지 못해서인지, 묘지명의 모양이나 글씨, 내용 등이 소박하다. 집안 조카가 지은 묘지명 말미에는 김씨 부인을 떠나보내는 슬픔이 허허롭게 잘 표현되어 있다.

▶ 티끌 같은 세상 벗어나 어디로 갔나요?

 아, 조물주시여, 부인은 어디로 갔나요?
 무덤의 숲 무성한데, 흰 구름 그 위를 나네.
 허공에 기대어 기운을 타고 티끌 같은 세상 허물 벗듯 벗어나,
 소리 나는 듯 들리지 않고 보이는 듯 잡히지 않는 아득한 곳으로 가실 줄 어찌 알았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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