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고기 삶는 세발솥-정[鼎, Ding]:오세은

정(鼎)은 중국 상(商)나라에서 제사를 지낼 때 고기를 익히거나 담는데 사용한 제기[祭器, 중국에서는 ‘예기(禮器)’라 함]입니다. 형태는 아가리 양쪽에 두 개의 손잡이 즉 귀가 세로로 달려 있고, 원통형 다리 세 개가 삼각으로 안정감 있게 몸통을 받치고 있습니다. 세 개의 다리로 열을 가하여 효율적으로 음식을 조리했습니다. 몸통에 동물얼굴무늬(獸面文)를 새기고 소용돌이무늬로 주변을 가득 채웠는데 이는 상나라 후기(기원전 12세기~기원전 11세기)의 특징입니다. 몸통 안쪽 면에는 그릇 주인의 성씨인 ‘자(子)’자를 새겼습니다.

고기 삶는 세발솥[鼎], 중국 상대 후기, 기원전 12세기~기원전 11세기, 높이 20.0cm, 전체 너비 15.6cm, 구8553 고기 삶는 세발솥[鼎], 상 후기, 기원전 12세기~기원전 11세기, 높이 20.0cm, 전체 너비 15.6cm, 구8553

고기 삶는 세발솥 내부의 금문(金文) ‘자(子)’, 구8533 고기 삶는 세발솥 내부의 금문(金文) ‘자(子)’, 구8533

정의 제작과 발전

『설문해자(說文解字)⦁정부(鼎部)』에 “鼎, 三足兩耳, 和五味之寶器也”(정은 세 개의 다리와 두 귀가 있고, 여러 가지 맛을 담는 보배로운 그릇이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유교 경전의 하나인『주례(周禮)』에는 ‘정은 세 개의 다리가 있고, 두 개의 귀가 있으며, 연회 때 고기 또는 어류를 끓이는 그릇’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은 이렇듯 오랜 시간 중국 사람들과 함께한 그릇입니다. 처음에는 신석기시대 토기로 제작되어 취사 용기로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황허[黃河] 유역의 양사오문화[仰韶文化] 유적과 창장강(長江) 유역의 양주문화[良渚文化] 유적에서 많이 출토되었습니다. 기원전 21세기 이후 청동기로 제작되었고, 상주시대(商周時代, 기원전 16세기~기원전 771년)에 매우 유행했습니다.
정의 형태는 대부분 원형이지만, 간혹 네모난 방형로도 제작되었습니다. 상대 전기(기원전 16세기~기원전 15세기)에는 몸통의 깊이가 깊은 편이고, 손잡이인 두 귀는 작았습니다. 아직 청동기 주조 기술이 완전하지 않아 기벽이 얇고 기형도 대부분 작은 편입니다. 다리는 송곳 모양[空錐形足] 또는 납작한 모양[扁足]이고, 전체 비율은 몸통보다 다리 길이가 짧은 편입니다. 상대 후기 몸통이 여전히 깊은 편이지만, 손잡이인 귀가 점점 커지고 원통형 다리로 바뀝니다. 서주 전기(기원전 11세기~기원전 10세기)에 이르러 정의 몸통은 아직 상대 후기와 비슷하지만, 중심 부분이 점차 아래쪽으로 내려오고 귀가 밖으로 조금 벌어진 형태로 변하여 매우 안정적인 모습입니다. 서주 후기부터 춘추시대 초기에는 얕은 몸통에 동물 발굽 모양의 다리가 달린 형태로 변화합니다.
춘추시대 후기 각 지역 제후들의 세력이 날이 갈수록 강력해지면서 청동기에도 지방색이 짙어집니다. 따라서 정의 형태에도 지방마다 고유한 특징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남방에서 제작된 정은 다리가 길고, 북방 삼진(三晋) 지역의 정은 다리 길이가 비교적 짧고 몸체도 반원형입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제작된 정에는 모두 뚜껑이 있고, 귀를 옆에 붙였으며, 세 개의 고리 모양 손잡이가 달린 것이 특징입니다.

고기 삶는 네발솥[方鼎], 상 후기, 높이 17.1cm, 너비 13cm, 옆 너비 10.5cm, 구3336

고기 삶는 네발솥[方鼎], 상 후기, 높이 17.1cm, 너비 13cm, 옆 너비 10.5cm, 구3336

신분에 맞는 정의 사용―용정제도(用鼎制度)

정은 중국 고대사회에서 오랜 기간 지속해서 사용되었고 국가적으로도 신분을 나타내는 중요한 그릇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옛 문헌에도 관련 내용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주례』에는 주천자(周天子)는 9개의 정(鼎)과 8개의 궤(簋)를, 제후(諸侯)는 7개의 정과 6개의 궤를, 경대부(卿大夫)는 5개의 정과 4개의 궤를, 사(士)는 3개의 정과 2개의 궤를 사용하도록 규정했습니다. 상대 후기에 시작되어 서주 전기에 성립된 이러한 제도를 용정제도(用鼎制度) 또는 열정제도(列鼎制度)라고 합니다. 아직 용정제도에 맞는 서주시대 천자의 무덤이 발견되지 않아서 9정 8궤가 확인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춘추시대 동주(東周)의 제후 무덤에서 9정 8궤가 출토되어 앞으로 서주시대의 것도 발견될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춘추시대 주나라의 분봉제도(分封制度)가 무너지고 사회 변혁이 급격히 일어나면서 춘추시대 제후 무덤에서 종종 신분을 뛰어넘는 수량의 부장품이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동물얼굴무늬의 발전과 변화

정의 몸통에 새겨진 동물얼굴무늬는 상나라 때부터 서주 전기까지 유행한 중국 고대 청동기를 대표하는 무늬입니다. 과거에는 이 무늬를 ‘도철(饕餮)무늬’라고 불렀습니다. ‘도철’은 전국시대의 『좌전(左傳)』, 『여씨춘추(呂氏春秋)』, 『신이경(神異經)』, 『산해경(山海經)』 등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도철은 얼굴, 몸통, 꼬리가 있지만 무엇이든 잡아먹는 탐욕스런 괴물이어서 인간을 잡아먹다가 그만 자신의 몸까지 집어삼켜버린 상상 속의 동물입니다. 처음에는 지나친 탐욕을 경계하기 위해 도철을 청동기에 장식했으나, 점차 신을 숭배하고 최고 권력자를 대표하는 무늬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청동기에 새겨진 도철무늬 중 상당수가 몸통 없이 정면을 바라보는 동물 얼굴이거나 소와 양 등 실제 동물을 모티브로 하여 표현한 것이 많아 동물얼굴무늬로 통일하여 부르고 있습니다.
동물얼굴무늬는 주로 상대 청동기를 대표하는 무늬로 장식되었습니다. 전기에는 거의 두 눈만 표현했는데 중기부터 두 눈이 돌출되고 소용돌이무늬 등으로 나머지 공간을 메우는 형식으로 발전합니다. 청동기 제작 기술이 발전하면서 무늬를 좀 더 세밀하게 새겨 넣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후기에는 동물얼굴무늬가 점차 추상적으로 변화합니다. 주조 기술이 발달하면서 돌출된 눈을 조금 축소하고 눈에 띄지 않던 뿔을 크게 만들어 강조했습니다. 양각(陽刻)으로 높이의 차이를 두어 볼, 이마, 다리, 발톱 등을 더욱 입체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서주 전기에는 부조의 높낮이가 더욱 확실해지면서 뿔과 눈이 강조되어 소 같기도 하고 양 같기도 한 사실적인 묘사가 주요한 특징으로 자리매김합니다. 서주 중기 이후 변형된 용무늬와 봉황무늬 등이 대표 무늬로 등장하면서 동물얼굴무늬는 청동기 장식에서 점차 사라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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