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단발머리의 쿠차-호인용(胡人俑):오세은

이 단발머리의 삼채(三彩) 도용(陶俑)은 머리를 어깨 위로 자르고 천으로 머리를 묶은 서역 사람, 즉 호인(胡人)의 모습입니다. 도용이란 흙으로 만든 사람 또는 동물의 형상을 말합니다. 이 호인 도용은 어깨가 봉긋한 소매에 넓은 깃과 무릎까지 오는 번령포(飜領袍)를 입었습니다. 여기에 통이 좁은 바지를 입고, 앞이 뾰족한 장화를 신었습니다. 이렇게 호복(胡服)을 입고 머리를 짧게 한 것은 중국 당대(唐代, 618~907) 서역국가 또는 북방 지역에서 유행하던 양식으로 쿠차[龜玆]인의 모습입니다. 중국 양(梁)나라(502~557) 때 그려진 <양직공도(梁職貢圖>에서도 쿠차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삼채 호인용, 중국 당, 높이 60.0cm, 세로 11.0cm, 가로 14.0cm, 구3346삼채 호인용, 당, 높이 60.0cm, 세로 11.0cm, 가로 14.0cm, 구3346

〈양직공도(梁職貢圖)〉, 모사본, 중국 국가박물관 소장〈양직공도(梁職貢圖)〉, 모사본, 중국 국가박물관 소장

당나라 호인(胡人)의 왕래

당나라 때 서아시아 각국과 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생활 속에 이국 문화의 흔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런 사회 현상이 반영된 도용을 무덤에 함께 묻었는데 호인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당대 호인의 개념은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가 있습니다. 좁은 의미의 호인은 서역 즉 지금의 서아시아 지역 사람을 말하고 넓은 의미의 호인은 동으로는 일본, 남으로는 페르시아 터키, 북으로는 돌궐까지 포함하는 지역의 사람을 말합니다. 당대 서역의 문화가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 본토에 본격적으로 들어오면서 가늘고 긴 다리가 특징인 아라비아 계통의 말과 낙타 등이 수입되었고, 이와 함께 호인들이 빈번하게 중국을 왕래했습니다. 그 뒤 당나라 고조(高祖, 재위 618~626)가 위계와 복장을 다룬 무덕령(武德令, 621년)을, 태종(太宗)이 의복령(衣服令, 630년)을 내리면서 호복을 받아들입니다. 이에 따라 황제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고습(袴褶: 짧은 윗옷과 바지) 착용이 널리 퍼졌고, 유목 민족이 입던 번령포와 바지를 즐겨 입었습니다. 또한 당나라 조정은 적극적인 개방 정책으로 중국 내에서 이민족이 고유문화를 유지하면서도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당대에는 마부나 하인을 호인으로 표현했는데 주로 삼채 도용으로 제작하여 무덤에 함께 묻었습니다. 특히 진묘수(鎭墓獸) 등 다른 도용처럼 과장되게 표현하지 않고 매우 사실적이고 세밀하게 호인용을 표현했습니다. 이러한 호인용은 이국 문화가 당대에 녹아드는 과정과 당시 도용의 제작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삼채 말, 중국 당, 높이 74.8cm, 너비 27.1cm, 길이 87.0cm, 구3349 삼채 말, 중국 당, 높이 74.8cm, 너비 27.1cm, 길이 87.0cm, 구3349

고깔모자를 쓴 소그드인, 중국 당, 높이 66.0cm, 바닥지름 12.9cm, 구3347  고깔모자를 쓴 소그드인, 중국 당, 높이 66.0cm, 바닥지름 12.9cm, 구3347

서역과 교역 시작

중국이 서역과 교역을 처음 시작한 때는 당나라 때가 아닌 한나라 때였습니다. 서한(西漢) 초기 한무제(漢武帝)는 흉노를 쫒아내려고 흉노에 최대적인 대월지[大月氏]로 신하 장건(張騫)을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대월지의 위치조차 몰랐던 장건은 흉노에게 붙잡혀 10여 년 동안 억류 생활을 합니다. 이후 흉노를 탈출해 서쪽으로 이동한 장건은 마침내 중앙아시아 지역의 대월지에 도착하여 대월지 왕에게 한과 연합해 흉노를 공격하자고 간청합니다. 이미 풍요로운 삶을 누리던 대월지는 굳이 흉노를 공격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1년 남짓 허송세월하던 장건은 결국 귀국길에 오르고 13년 만에 본국으로 돌아옵니다. 비록 임무는 완수하지 못했지만 장건은 서쪽 지역에 관한 많은 정보를 한무제에게 보고했고 이는 한나라가 대외 정책을 세우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습니다. 『한서(漢書)』에 나오는 서역에 관한 기록의 대부분은 장건의 정보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흉노를 피해 서역의 여러 나라와 교통할 수 있는 길을 찾은 장건은 다시 서역을 방문합니다. 이를 계기로 서역의 나라들은 한나라가 막강한 대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훗날 ‘실크로드’라고 일컬어지는 동서 교통로를 통한 중국과 서역의 상업적·문화적 교류를 가능하게 하는 시작이었고, 당대에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과 본격적인 교역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장건이 서역으로 떠나는 장면[張騫出使西域圖], 둔황[燉煌] 막고굴(莫高窟 제323굴 벽화), 당 초기

장건이 서역으로 떠나는 장면[張騫出使西域圖], 둔황[燉煌] 막고굴(莫高窟 제323굴 벽화), 당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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