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한(漢)대 무씨묘지 화상석 탁본:박성혜

산둥(山東)성 자샹(嘉祥)현 무씨사당(武氏祠堂) 화상석 탁본

한(漢)대에는 장례를 후하게 지내는 관습에 따라 상장예술(喪葬藝術)이 발달했습니다. 우리는 묘실벽화, 사원벽화, 분묘에서 출토된 백화(帛畫)와 화상석(畫像石) 등에서 한대의 회화예술을 만날 수 있습니다.
화상석은 묘실, 사당 등과 같은 건축물에 사용된 석재의 표면을 선이나 면으로 깎아내어 그림을 새긴 것을 말합니다. 조각과 회화의 특징을 겸비하고 있으며, 예술적으로도 뛰어나 중국회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산둥성 자샹현 남쪽 무씨묘지에서 발견된 사당인 무씨사당 화상석 탁본에는 당시 생활 모습뿐만 아니라 사상·신앙 같은 종교의식까지 풍부하게 담겨 있어 중국 한 대 화상석 가운데 가장 유명합니다.

서벽 111×131cm 무량사 화상석 탁본,
서벽 111×131cm, 신수644

 후벽 109.3×204.8cm 무량사 화상석 탁본,
후벽 109.3×204.8cm, 신수644

 동벽 111.4×135.5cm 무량사 화상석 탁본,
동벽 111.4×135.5cm, 신수644

무씨묘지 화상석에 표현된 내용

국립중앙박물관은 무량사(武梁祠), 무영사(武榮祠), 무개명사(武開明祠) 등 무씨묘지 사당의 화상석 탁본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이 화상석에는 신화·전설, 귀신신앙, 선인세계와 인간 현실세계 등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가운데 인간의 현실세계를 표현한 부분을 보면 유교의 충, 효, 절, 의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역사 고사화가 가장 많이 등장합니다. 특히 유교에서 으뜸이 되는 덕목인 효에 관한 내용이 무씨사당에 가장 많이 새겨졌습니다.
무씨묘지의 석각(石刻)은 일찍이 북송 말 금석학자 조명성(趙明誠, 1081~1129)이 저술한 『금석록(金石錄)』에 소개되었습니다. 이후 청나라 건륭(乾隆) 때 석각이 발견된 뒤로 탁본이 유포되면서 세간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무씨묘지의 주인을 살펴보면, 무량(武梁)은 한나라 장제(章帝)때인 78년에 태어나 151년에 죽은 인물로 예주종사(豫州從事)라는 관직을 지냈습니다. 무개명(武開明)은 무량의 동생이며, 무영(武榮)은 무개명의 아들입니다. 지방귀족이었던 무씨 집안은 대부분 중하급 관리로 진출하면서 이곳에 터를 잡아 무씨 가족의 묘지와 사당을 건립했습니다.

무씨사당에 표현된 효자 고사도

무량사, 무영사, 무개명사에는 효자정란각목(孝子丁蘭刻木) 고사, 민자건후모(閔子騫後母) 고사, 노래자반의오친(老萊子斑衣娛親) 고사, 삼주효인(三州孝人) 고사, 형거포부(邢渠哺父) 고사, 효손원곡(孝孫原谷) 고사 등 10여 종이 넘는 효자 고사도가 새겨져 있습니다. 교훈이 될 만한 본보기를 통해 후손에게 가르침을 주고자 이렇게 많은 효자 고사를 사당에 표현한 것입니다. 이 중에서 무량사, 무영사, 무개명사에는 효자정란각목 고사가 모두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선 무량사에 표현된 효자정란각목 고사를 살펴보면, 왼쪽 윗부분에 ‘丁蘭二親終歿(정란이친종몰) 立木爲父(입목위부) 隣人假物(린인가물) 報乃借與(보내차여)’라는 제기(題記)가 있고, 그 아래에 정란의 아버지를 표현한 목상이 있습니다. 목상 옆에는 정란과 정란의 처가 무릎을 꿇고 공양하고 있습니다.
무영사와 무개명사에도 효자정란각목 고사를 새겼는데, 정란의 아버지를 표현한 목상의 몸 부분을 모두 구름 모양인 권운문(圈雲紋)으로 표현하고 있어서 효자정란각목 고사의 도상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무량사 서벽 효자정란도 무량사 서벽 효자정란도

 무개명사 감실 서벽 효자정란도 무개명사 감실 서벽 효자정란도

 무영사 감실 동벽 효자정란도 무영사 감실 동벽 효자정란도

효행으로 용서받은 살인죄-효자정란각목(孝子丁蘭刻木) 고사도

효자정란각목 고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정란은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함을 아쉬워하여 나무로 부모의 형상을 깎아서 집에 모시고 공양했습니다. 부모가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리고, 외출할 때에는 반드시 부모의 상에 알렸습니다. 한번은 이웃이 이 목상을 빌리고자 하였으나 정란이 거절했습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이웃이 몽둥이로 목상을 치며 머리를 때렸다고 합니다. 부친의 목상에서 분노와 불만이 가득한 기색을 본 정란은 화를 참지 못하고 칼로 이웃을 찌르고 맙니다. 결국 관리에게 체포된 정란이 붙잡혀 가면서 부모의 목상을 향해 이별을 고했는데, 이때 부친의 목상 얼굴에서 눈물이 흘렀다고 합니다. 이를 본 군현의 관리가 그의 효행에 감동하여 정란을 석방하고 포상을 내렸다는 이야기입니다. 흉악한 살인죄조차 효행으로 여긴 이 이야기는 당시 유교사회에서 효행사상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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