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당나라 문서가 붙은 시신깔개―한·중·일로 흩어진 ‘679년도 국가재정 운용지침 문서’의 복원:권영우

시신깔개에 붙어 있던 이 문서는 국내에 유일한 당나라 관문서로, 현재 중국과 일본에 소장된 문서 조각과 함께 하나의 두루마리 문서를 구성했던 것입니다. 이번 조사에서 새롭게 이어 붙여 복원한 문서 내용은 당나라 전성기인 679년 국가재정의 운용 실태를 생생히 보여줍니다. 또한 문서가 붙은 시신깔개는 당시 투루판[吐魯番] 지역에서 재활용 문서를 이용한 장례용품의 제작 관습을 들여다볼 수 있는 귀중한 실물자료입니다.

〈시신깔개〉(문서 분리 전), 투루판 아스타나 230호 무덤, 당 703년 매장, 16.0×78.0cm(복원 추정치), 본관3978

〈시신깔개〉(문서 분리 전), 투루판 아스타나 230호 무덤, 당 703년 매장, 16.0×78.0cm(복원 추정치), 본관3978

한·중·일로 흩어진 시신깔개 문서 조각들

국립중앙박물관의 중앙아시아 컬렉션 중에는 문서가 붙은 두 조각의 삿자리가 있습니다. 1912년 일본 오타니[大谷] 탐험대가 지금의 중국 신장웨이우얼자치구 투루판 지역의 아스타나[阿斯塔那] 230호 무덤에서 수습한 이 삿자리는 시신을 눕히기 위한 시신깔개로 추정됩니다. 6~8세기 투루판 지역에서는 갈대 줄기를 엮어 짠 시신깔개를 관과 함께 보편적인 장례용품으로 사용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시신깔개에 붙은 문서 조각과 같은 문서 가운데 일부가 현재 일본 류코쿠대학[龍谷大學]과 중국 신장박물관[新疆博物館]에도 소장되어 있습니다. 한·중·일로 흩어진 문서 조각은 원래 하나의 두루마리에서 재단되어 시신깔개로 제작되었고, 703년경 같은 무덤에 넣어졌던 것입니다. 시신깔개와 문서 조각은 20세기 초에 오타니 탐험대가 일본으로 가져간 뒤 머지않아 다시 우리나라와 일본으로 흩어졌고, 수습되지 못했던 문서 조각이 1972년에 무덤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문서 조각의 정체

중국과 일본 측 문서 조각은 발견 직후부터 연구자들에게 중요한 문서로 주목받았습니다. 이 문서는 바로 「당 상서성(尙書省)이 내린 의봉(儀鳳) 4년(679)도 국가재정 운용지침을 당이 이 지역을 점령하고 설치한 서주도독부(西州都督府)에서 접수하여 처리한 문서[唐儀鳳三年度支奏抄·四年金部旨符](이하 탁지주초)」의 일부였습니다. 문서에는 당 전역을 대상으로 용(庸)·조(調)라고 하는 국가의 세수(稅收)를 실제로 어떻게 운용해야 하는지 상세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대다수 지침이 그때까지의 다른 사료에서는 볼 수 없던 내용이기에 학자들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들 문서 조각은 투루판 출토 문서가 변방사의 일면을 보여주는 문자자료라는 그간의 인식을 씻어냈고, 당 전반기 국가재정사의 사료 부족을 메울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출토 문서로 자리매김했습니다.
한편 1995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시신깔개에 붙은 문서도 중·일 측 문서 조각과 같은 문서라는 것이 발표되었고 일부 내용도 소개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서의 글씨 면이 안쪽을 향해 붙거나 접혀 있었기 때문에 전체 내용을 파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2020년 국립중앙박물관은 시신깔개에 배접된 문서가 흩어진 문서의 관계를 해명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안고 문서의 분리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679년도 국가재정 운용지침 문서(탁지주초)」, 당 679년, 종이에 먹, 좌: 28.5×53.0cm, 우: 28.5×52.4cm, 본관3978 「679년도 국가재정 운용지침 문서(탁지주초)」, 당 679년, 종이에 먹, 좌: 28.5×53.0cm, 우: 28.5×52.4cm, 본관3978

「고창현 소속 도주한 병사의 처분에 관한 문서(도주위사 처리문서)」, 당 674~676년, 종이에 먹, 좌: 17.9×8.2cm, 우: 29.0×16.0cm, 본관3978 「고창현 소속 도주한 병사의 처분에 관한 문서(도주위사 처리문서)」, 당 674~676년, 종이에 먹,
좌: 17.9×8.2cm, 우: 29.0×16.0cm, 본관3978

문서 조각의 접합과 내용 복원

시신깔개를 덮고 있던 문서 조각을 벗겨내자 1,300년 전에 쓴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짙고 선명한 글씨가 드러났습니다. 「탁지주초」 두 장 외에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고창현 소속 도주한 병사의 처분에 관한 문서[唐上元年間西州倉曹司案卷爲高昌縣申送逃走衛士庸緤價錢事](이하 도주위사 처리문서)」 두 장도 새롭게 드러났습니다. 무엇보다 이들 조각은 무덤에서 뒤늦게 수습된 중국 측 문서 조각들과 완벽히 접합되었습니다. 본래 중국 측 문서는 현재 두 조각으로 나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시신깔개에 붙어 있던 것이고, 일본 측 문서 조각은 현존하지 않는 또 다른 시신깔개에 붙어 있던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문서 크기와 형태, 부착된 구조를 이해하여 시신깔개 원형의 제작 과정을 유추할 수 있었습니다. 먼저 두루마리 문서에서 삿자리보다 약간 크게 재단한 종이를 두 장씩 포갠 다음 그 위에 삿자리를 놓고 바깥으로 나온 종이 부분을 사방에서 접어 올린 뒤, 삿자리가 노출된 부분을 자리 폭에 맞춰 다른 종이로 덮고 양면 테두리를 따라 자색 비단을 표구하여 마감했던 것입니다.

한·중 소장 「679년도 국가재정 운용지침 문서(탁지주초)」 조각의 접합

한·중 소장 「679년도 국가재정 운용지침 문서(탁지주초)」 조각의 접합

한·중 소장 「도주위사 처리문서」</br> 조각의 접합한·중 소장 「도주위사 처리문서」 조각의 접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시신깔개〉의 제작 과정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시신깔개〉의 제작 과정
 

당나라의 재정 집행 문서 조각을 접합한 결과, 이제까지 39개로 알려진 조목 중 10개 조목을 새롭게 복원하거나 보완할 수 있었습니다. 드러난 문서에는 당 전국 각지에서 거둔 조세의 배분·보관 및 운송, 호랑이 등 맹수를 죽인 자에 대한 포상 재원, 외국 사신의 접대 비용 등에 관한 흥미로운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영남도(嶺南道: 지금의 광둥성을 중심으로 푸젠성, 광시성, 윈난성 남부 등) 소속 주에서 거둔 곡물을 보관할 때는 오랫동안 보존할 수 없는 낮고 축축한 곳에 많이 저장했다가 손상되는 일이 없도록 한다.” - 당 전국 각지에서 거둔 조세의 배분·보관 및 운송

“모든 주는 호랑이나 이리를 죽였을 때의 포상으로 1년 치 소요액만큼을 거둬들인 용[庸: 매년 20일 노역 대신 납부하는 비단]·조[調: 성인 남성 1인당 비단 2장(丈)과 솜 3량]와 절조물[折租物: 조(租)로서 곡식 대신 납부하거나 제작한 다른 물품]에서 덜어내 주에 남겨두도록 한다. 성과를 헤아려 그만큼을 주되 50단을 넘을 수 없으며 그때그때 지급한다.” - 맹수를 죽인 자에 대한 포상 재원

“외국 사신에게 지급하는 비용은 여정에 있는 주가 필요한 양만큼 정창[正倉: 조(租)를 보관하는 창고]과 의창[義倉: 토지세를 보관하는 창고]에서 내어 사용한다. 만일 부족하면 절조물로 충당하되 용이나 조에서 함부로 덜어내 쓸 수는 없다.” - 외국 사신의 접대 비용

이 문서는 순전히 장례용품을 만들려는 목적으로 관청으로부터 일괄 사들인 것이어서 무덤 주인과는 별다른 관련이 없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일찍이 문서의 효력을 잃고 삿자리의 배접 재료로 쓰인 이 문서가 머나먼 후세에 크게 조명받게 될 줄 상상이나 했을까요? 이 문서가 연 강수량이 15mm에 불과할 정도로 매우 건조한 투루판 지역의 타임캡슐 속에서 온전히 보존되었다가 기적처럼 발견된 덕분에, 우리는 이 글씨의 퍼즐을 맞춰 편집되지 않은 1,300여 년 전의 생생한 과거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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