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백자 청화 영지 풀꽃무늬 접시 – 18~20세기 초 도자 교류의 산물  : 장효진

백자 청화 영지 풀꽃무늬 접시, 경기도 포천시 출토, 중국 청 19세기, 높이3.5cm·구경18.5cm·저경11.5cm, 신수1163

백자 청화 영지 풀꽃무늬 접시, 경기도 포천시 출토, 중국 청 19세기, 높이3.5cm·구경18.5cm·저경11.5cm, 신수1163


십장생의 하나로 불로장생을 의미하는 영지(靈芝)무늬와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풀꽃무늬를 번갈아 그린 영지 풀꽃무늬 청화백자입니다. 이 접시는 중국 청나라(1616~1912) 때 강서성(江西省) 경덕진요(景德鎭窯)에서 만든 민간용 백자입니다. 주로 중국 내수용으로 제작되었지만 해외 유적에서도 적지 않게 발견됩니다. 한국에서 출토된 청나라 도자기 중에서 가장 많은 수량을 차지합니다. 이 <백자 청화 영지 풀꽃무늬 접시>는 경기도 포천시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합니다. 영지 풀꽃무늬 청화백자를 따라 18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도자기 교류사의 일면을 살펴보겠습니다.

장수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은 영지무늬

영지 풀꽃무늬 청화백자는 그릇 안팎에 청화 안료로 공간을 일정하게 나누고, 그 안에 영지와 풀꽃무늬를 번갈아 장식하였습니다. 영지는 고대부터 불로장생, 기사회생의 묘약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희귀할 뿐만 아니라 채집 후에도 쉽게 변하지 않는 특성 때문에 길상물로 인식되어 각종 공예품의 문양 장식으로 활용되었습니다. <백자 청화 영지 풀꽃무늬 접시>는 무늬가 반복적이고 그리기 어렵지 않아, 대량 생산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이 도자기에는 인간의 보편적 염원인 장수를 의미하는 영지무늬가 장식되어 있어 민간용 백자의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영지 풀꽃무늬 청화백자의 연원

백자 청화 영지 풀꽃무늬 접시

백자 청화 풀꽃무늬 쌍이배, 경덕진 주산 어기창 유적 출토, 중국 명 15세기, 높이4.9cm·구경8.5cm·저경4.0cm, 경덕진시도자고고연구소(景德鎭市陶瓷考古硏究所)


영지 풀꽃무늬 청화백자는 청나라 때 민간에서 크게 유행했습니다. 그런데 이 문양의 기원은 명나라(1368~1644) 때 황제를 위한 도자기를 만들었던 어기창(御器廠) 유적 출토품 중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기창 유적의 선덕(宣德, 1425~1435) 시기 층위에서 출토된 <청화 절지초화무늬 접이배>의 문양이 그 기원으로 여겨집니다. 율동감 있게 공간을 구획하고 그 안에 도안화된 풀꽃무늬를 그려 넣은 것이 유사합니다.
명나라 초기에는 궁중에서 사용하는 그릇과 관청이나 민간에서 사용하는 그릇을 명확히 구분했습니다. 질서와 위계를 위해 궁중에서 사용하는 그릇이 민간에 유출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였지요. 따라서 어기창에서 만든 그릇 가운데 실패작인 낙선품을 비롯해 필요 이상으로 제작된 완성품도 파기해 묻어 버렸습니다. 또 어기창에서 만든 백자를 판매하거나 관리 저택에 보내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습니다. 황제의 그릇이 민간에 유출되는 것을 매우 엄하게 관리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기창에서 만든 그릇의 문양을 이후에 민간에서 어떻게 모방한 것일까요?
16세기 중후반에 이르면 궁중용 도자기 생산 방식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생산 공정을 관(官)과 민간이 분담하였고, 낙선품을 관리에게 상으로 하사하거나 민간에 판매하는 파격적인 처리 방법이 거론되었습니다. 이는 많은 수량의 낙선품을 모두 폐기하는 데 따르는 재정적인 부담 때문에 일어난 변화로 여겨집니다. 이렇게 유출된 궁중용 도자기는 민간 가마에서 도자기 문양 장식을 디자인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중국 전역에 유통된 경덕진 청화백자

영지 풀꽃무늬 청화백자는 청나라 때 먼저 경덕진 민간 가마에서 크게 유행했습니다. 이후 복건(福建), 광동(廣東)을 비롯한 중국의 남방 가마와 자주요(磁州窯) 등 북방 가마에서도 활발히 모방되었습니다. 경덕진 스타일의 청화백자가 어떻게 다른 지방 가마에서도 모방되었을까요? 명나라 때의 소설 풍몽룡(馮夢龍)의 『성세항언(醒世恒言)』 중에서 그 상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鎭上百姓, 都以燒造瓷器爲業. 四方商賈, 都來載往蘇杭各處販賣, 盡有利息”
“경덕진 백성들은 모두 요업에 종사한다. 사방에서 상인들이 몰려와 소주, 항주 각 지역으로 싣고 가 판매하고 이득을 본다.”

경덕진에 몰린 전국 상인들은 각 지역으로 경덕진 도자기를 유통시켰습니다. 그리고 전국의 여러 가마에서 경덕진 스타일의 청화백자를 모방, 생산한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과 일본, 유럽에서 모방된 경덕진 청화백자

영지 풀꽃무늬 청화백자는 중국 민요에서만 유행한 것이 아닙니다. 조선과 일본, 그리고 유럽까지 경덕진 생산품이 전해졌고 각 지역에서 모방, 생산하였습니다. 중국과 국경이 맞닿아 있던 조선에는 주로 육로를 통해 경덕진 도자기가 전래되었습니다. 특히 사행단의 사행 여정 중 공적·사적으로 이루어진 크고 작은 무역을 통해 전해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오늘날 특히 서울 사대문 안에서 적지 않게 출토되는 경덕진산 영지 풀꽃무늬 청화백자가 당시 상황을 증명합니다.
일본의 경우 지리적 여건상 해상로를 통해 청나라 도자기가 전래되었습니다. 특히 나가사키[長崎]와 같이 외국 국적 선박의 진입이 허용된 항구를 통해 유입되었을 것입니다. 일본 지방 유력자 등 고위층의 생활공간을 비롯해 하급 무사의 주거지 유적에서도 경덕진 민요산 청화백자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백자 청화 영지 풀꽃무늬 접시, 조선 19세기, 높이 3.1cm·구경 14.8cm·저경 8.0cm, 본관10685

백자 청화 영지 풀꽃무늬 접시, 조선 19세기, 높이 3.1cm·구경 14.8cm·저경 8.0cm, 본관10685

백자 청화 영지 풀꽃무늬 접시, 일본 19세기, 높이 3.0cm·구경 17.3cm·저경 10.1cm, 사가현립규슈도자문화관[佐賀県立九州陶磁文化館]

백자 청화 영지 풀꽃무늬 접시, 일본 19세기, 높이 3.0cm·구경 17.3cm·저경 10.1cm, 사가현립규슈도자문화관[佐賀県立九州陶磁文化館]


한편 조선과 일본, 심지어 유럽에서도 영지 풀꽃무늬 청화백자를 모방, 생산하였습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조선 분원 관요에서 모방 생산되었고, 일본에서는 18세기 중반 이후 규슈[九州] 지방을 중심으로 아리타[有田], 세토[瀨戶], 미노[美濃] 일대 가마에서 제작되었습니다. 영지무늬가 갖고 있는 길상의 상징성은 동아시아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조선과 일본에서도 애호됐을 것입니다. 한편, 그 영향력은 유럽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같은 시기 영국 민턴(Minton)사 등 유럽의 근대식 도자기 회사에서 대량생산된 서양 식기의 문양 장식에도 나타납니다.
청나라 경덕진산 영지 풀꽃무늬 청화백자는 동아시아를 비롯해 유럽까지 광범위하게 유통되며 모방, 생산되었습니다. 이 유형의 자기는 18~20세기 초 도자 교류사의 일면을 추적할 수 있는 중요한 매개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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