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금동찰주본기-경주 황룡사 구층목탑의 명운을 압축한 연대기  : 옥재원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금동찰주본기, 신라 872년, 높이 22.5cm, 전체 너비 94.0cm, 보물, 신수2323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금동찰주본기, 신라 872년, 높이 22.5cm, 전체 너비 94.0cm, 보물, 신수2323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금동찰주본기는 신라 최대의 사찰 황룡사(皇龍寺)의 목탑 창건과 중수 내역을 수록한 주요 기록물입니다. 명문은 황룡사 구층목탑의 사리기 내함(內函)에 새겨져 있습니다. 내함은 탑의 중심 기둥을 받치는 심초석의 가운데 설치된 사리공 안에서 나왔습니다. 내함의 형태는 육면체입니다. 뚜껑이 따로 있으며, 사방을 두른 판들이 경첩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닥 판은 소실된 것으로 보이며, 둘레 판 대부분 부식으로 손상을 입었습니다. 손상이 주로 아랫단에 집중된 상태는 바닥 판의 소실과 관계 깊은 듯합니다.

 1. 황룡사 구층목탑 사리기 내함의 기본 형태와 구분 2. 앞면 오른쪽 판의 금강역사

1. 황룡사 구층목탑 사리기 내함의 기본 형태와 구분
2. 앞면 오른쪽 판의 금강역사


금동찰주본기 1면 명문

금동찰주본기 1면 명문

그중 좌우로 열리게끔 만들어진 판을 앞면이라고 하면, 이를 중심으로 오른면과 왼면, 그리고 뒷면 각 판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앞면 좌우에는 금강역사(밖)와 호법신(안)이 선 자세로, 작은 불법 세계인 내함 입구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 면을 제외한 오른면·왼면·뒷면의 안팎에 음각으로 명문이 새겨졌습니다. 명문은 안에서 시작하여 바깥으로 이어집니다. 보다 자세히는, 오른면 판 안쪽 → 뒷면 판 안쪽 → 왼면 판 안쪽 → 왼면 판 바깥쪽 → 뒷면 판 바깥쪽 → 오른면 판 바깥쪽 순서로 기재되어 있습니다. 이 가운데 오늘날 판독이 가능하여 해석된 글자는 900여 자에 이릅니다. 명문 내용은 대략 645년(선덕왕 14)에 황룡사 목탑을 건립하게 된 유래와 건립 후의 내력, 871년(경문왕 11)에서 873년(경문왕 13)까지 이를 새로 고쳐 세운 경위를 중심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지금껏 남아 있는 고대의 문헌사료 가운데 당대에 작성되어 사회상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자료는 매우 드뭅니다. 따라서 금동찰주본기의 명문은 후대에 수찬(修撰)된 『삼국사기(三國史記)』 와 『삼국유사(三國遺事)』 속 연관 기록들을 뒷받침하며 신라 역사의 특정한 사실과 상황을 전해주어 사료적 가치가 높습니다.

금동찰주본기에 담긴 황룡사 구층목탑 상량문

금동찰주본기는 국왕의 명을 받들어, 시독우군대감겸성공신(侍讀右軍大監兼省公臣) 박거물(朴居勿, ?~?)이 짓고, 숭문대랑겸춘궁중사성신(崇文臺郞兼春宮中事省臣) 요극일(姚克一, ?~?)이 썼습니다.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제6 백제 의자왕(義慈王) 기사의 한 구절에, 두 사람이 597년(진평왕 19)에 세워진 경주 삼랑사(三郞寺)의 비문도 함께 짓고 썼다는 기록이 있어, 이들이 당시 여러 건의 찬문‧입비 작업에 함께 참여한 정황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요극일은 「곡성대안사적인선사탑비(谷城大安寺寂忍禪師塔碑)」(872)의 비문을 썼고 「흥덕왕릉(興德王陵)」의 비문도 썼을 것으로 추정될 만큼 당대 이름난 서예가입니다. 조선시대에 들어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필원잡기(筆苑雜記)』에서 그를 필법으로는 통일신라의 김생 다음가는 인물로 극찬하였고,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은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동방서가(東方書家)의 한 명으로 꼽기도 했습니다. 금동찰주본기의 구체적인 내용은 앞서 압축한 것처럼 크게 황룡사 구층목탑의 창건과 중수 두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앞부분은 자장법사(慈藏法師, 590~ 658)의 건의로 비롯된 목탑 건립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자장은 638년(선덕왕 7)에 중국 당(唐)으로 들어가 643년(선덕왕 12)까지 구법하였습니다. 귀국 직전 원향선사(圓香禪師)에게 사직 의사를 전할 때, 원향은 신라의 국력 신장을 위해 자장에게 황룡사 구층목탑의 건립을 제안하였습니다. 자장이 신라로 돌아와 이 제안을 국왕에게 아뢰자, 선덕왕은 감군(監君) 이간(伊干) 용수(龍樹)에게 명하고, 백제 출신의 대장(大匠) 비(非) 등에게 소장(小匠) 2백 인을 통솔하도록 하여 탑의 건립이 시작되었습니다. 645년(선덕왕 14)에 시작된 목탑 공사는 4월 8일 찰주 수립을 거쳐 이듬해 완료되었는데, 철반 위의 높이가 7보, 그 아래의 높이가 30보 3척에 달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상세한 내용은 “3월에 황룡사탑을 창건하였는데, 자장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라는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제5 선덕왕 14년조의 간결한 구절과 『삼국유사』 권3, 탑상(塔像) 제4 황룡사구층탑조의 건립 배경에 관한 기사를 보완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금동찰주본기는 두 역사서의 기록이 636년으로 전하는 자장법사의 입당 시점을 638년으로 쓰는 등, 기록 간의 대조를 통해 황룡사와 구층목탑 창건에 관한 사실들을 보정하여 달리 해석해볼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생소하나 생생하게 만나는 신라 사람들

중수 관계자들이 기록된 왼쪽 면 판 밖의 명문

중수 관계자들이 기록된 왼쪽 면 판 밖의 명문

선덕왕대(재위 632~647)의 정치적 염원을 담아 세운 구층목탑은 자연재해로 여러 번 피해를 입었습니다. 여기에 건축물 자체도 노후화가 꽤 진행되었던 것 같습니다. 문성왕(文聖王) 재위 기간(839∼857) 중에 탑이 동북쪽으로 두드러지게 기울어져서 수리할 재목을 모으긴 했으나, 공사가 개시되지 못하고 삼십여 년을 넘기다가 871년(경문왕 11)에서야 중수했다고 전합니다. 금동찰주본기의 뒷부분은 이때의 사실을 상세히 담았습니다. 이해 8월 12일, 국왕의 명에 따라 아우 상재상(上宰相) 이간 위홍(魏弘)이 공사의 총책을 맡고, 주지[寺主] 혜흥(惠興) 이하 대통(大統) 정법(政法), 대덕(大德) 현량(賢亮) 등 여러 명망 있는 승려들이 모인 가운데 옛것을 허물어 신축했다고 하니, 중수의 위상과 규모가 상당했던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어 목탑 내에 무구정경(無垢淨經)에 의거하여, 탑마다 사리 1매와 다라니(陀羅尼) 4종의 경전을 말아 올린 소석탑 99구를, 철반 위에 사리 1구를 안치하였습니다. 공사는 다음 해(872년) 7월 마쳤다고 하는데, 이는 탑의 개조가 완료된 해를 873년이라 전하는 『삼국사기』기록과 차이가 있습니다. 불사(佛事)를 담당하는 몇 개의 감독 기관에 소속되어 공사에 참여한 여러 인물들도 눈에 띕니다. 비록 열심히 땀 흘리며 몸으로 탑을 일으킨 이들의 이름은 빠졌으나, 성전(盛典)을 구성한 김위홍 등 12명, 도감전(道監典)을 구성한 혜흥 등 16명, 속감전(俗監典)을 구성한 김견기(金堅其) 등 5명, 황룡사의 대유나(大維那) 향□(香□) 및 감은사(感恩寺) 도유나(都維那) 방령(芳另) 등 승려 21명, 명문을 새긴 총혜(總惠) 외 2명 등, 그 이름과 지위로나마 다수의 신라 사람을 직접 만날 수 있습니다.
공사 직후 찰주가 움직이지 않아서 걱정하던 국왕은 11월 6일 신료들을 거느리고 현장을 방문해 찰주를 들어 확인합니다. 이때 심초 내 사리공에서 창건 납입품으로 추정되는 금은고좌(金銀高座)와 사리유리병 등을 발견하여 꺼냈다가 같은 달 25일 다시 집어넣었고, 추가로 사리 1백 매와 법사리 2종을 안치하도록 했습니다. 끝으로 중수 계기와 일련의 과정 및 경과를 전승하도록 기록을 명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금동찰주본기를 제작한 배경과 탑 안에 모시게 된 내역입니다.

다시 찾은 금동찰주본기

이렇게 중건된 구층목탑인지라 그 건실함이 오래갈 듯하였으나, 927년(경애왕 4)에 요동하여 북쪽으로 크게 기울고 953년(광종 5)에 세 번째 벼락을 맞는 등 연이은 구조적‧자연적‧사회적 재난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1238년(고종 16) 고려를 침입한 몽골군의 병화(兵火)에 완전히 산화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약 800여 년 동안 적막한 황룡사 터에서 심초석 하나로 명맥을 지키던 구층목탑은 또 한 번의 인재(人災)를 겪게 됩니다. 1966년 불국사(佛國寺) 삼층석탑 봉안물을 훔치려던 도굴범들이 검거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4명에게는 1964년 12월 민가 철거 후 노출된 황룡사의 심초석 내부를 도굴한 전적이 있었습니다. 이 사실이 밝혀지면서 도굴된 금동찰주본기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이들이 잡히지 않았다면, 금동찰주본기는 어느 은밀한 소장처의 비좁은 틈에 감춰진 채로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신라의 특정한 시공간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과 이를 이룬 사람들의 정직한 노고가 담긴 금동찰주본기, 이제는 제대로 지켜 오래 잘 전해지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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