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부처의 생애를 새긴 비상 – 조각과 함께 떠나는 성지순례 : 노남희

여기 이국적인 불비상(佛碑像)이 한 점 있습니다. 위가 둥근 자그마한 평면 한가운데 가부좌를 튼 불상이 편안하게 앉았고, 그 밑의 여러 개 화면에는 조그만 인물들이 오밀조밀 들어차 있습니다. 화면 가장 꼭대기에서 팔로 머리를 받치고 누워 있는 와불(臥佛)과 가운데 불상을 중심축으로 양쪽에도 다양한 자세의 작은 불상들이 정연하게 배치되었습니다. 공간을 한 치도 허투루 쓰지 않겠다는 듯, 빈틈없이 체계적으로 채운 이 조각은 과연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있을까요?

 부처의 생애를 새긴 비상, 인도 팔라시대 10세기, 석조, 높이 40.6cm, 구3269 <br/>  석가모니 부처의 깨달음을 상징하는 촉지인 불상을 중심에 두고, 부처의 삶에서 중요한 나머지 일곱 가지 사건을 주변에 배치한 조각입니다.

부처의 생애를 새긴 비상, 인도 팔라시대 10세기, 석조, 높이 40.6cm, 구3269
석가모니 부처의 깨달음을 상징하는 촉지인 불상을 중심에 두고, 부처의 삶에서 중요한 나머지 일곱 가지 사건을 주변에 배치한 조각입니다.

부처의 삶을 여덟 장면으로 담아내다

이 불비상은 인도 동부의 벵갈(Bengal)과 비하르(Bihar) 주를 중심으로 약 8-12세기에 걸쳐 번성하였던 팔라(Pāla) 왕조 때의 작품입니다. 팔라 왕조가 불교의 큰 후원자였던 덕분에 팔라 왕조 치하 동인도 지방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불교조각이 만들어졌습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독특한 조각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의 생애를 여덟 장면으로 표현한 ‘팔상(八相)’ 조각입니다. 부처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인 ‘불전(佛傳)’을 소재로 만든 조각은 이미 일찍부터 등장했지만, 이것을 여덟 개의 사건으로 정리하여 한 화면에 표현한 ‘불전팔상(佛傳八相)’ 조각이 크게 유행한 것은 팔라시대였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작품이 그 대표적인 예 가운데 하나인 것이지요.

 비상의 두광부분. 두광에는 불교 가르침의 요체를 나타낸 연기법송이 산스크리트어로 새겨져 있습니다. 팔라시대 불상에는 이처럼 연기법송이 새겨진 예가 많습니다.

비상의 두광부분.
두광에는 불교 가르침의 요체를 나타낸 연기법송이
산스크리트어로 새겨져 있습니다. 팔라시대 불상에는 이처럼
연기법송이 새겨진 예가 많습니다.

각 장면을 하나씩 살펴볼까요? 우선 가장 먼저 시선이 가는 것은 가운데에 자리한 큰 불좌상입니다. 불상은 오른손을 아래로 내리고 손가락 끝으로 땅을 짚는 ‘촉지인(觸地印)’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바로 부처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일화, 보드가야(Bodhgaya)에서의 ‘성도(成道)’ 장면을 표현한 것입니다. 부처의 머리 뒤에는 두광(頭光)이 표현되었고, 그 둘레에 연기법송이 새겨져 있습니다. 두광 위에 표현된 나뭇잎은 이곳이 보리수 아래임을 알려줍니다. 보리수 윗부분에 놓인 침상에서 오른쪽 팔로 머리를 받치고 누워 있는 와불은 쿠쉬나가라(Kuśinagara)의 사라쌍수 아래서 부처가 열반(涅槃)에 든 사건을 나타냅니다. 누워 있는 부처의 머리와 발밑에 앉은 두 인물은 아마도 스승의 죽음을 슬퍼하는 제자들일 것입니다.

열반 장면의 바로 아랫단에는 거의 똑같은 모습의 두 불입상이 보입니다. 그중 관람자를 기준으로 오른쪽에 있는 상은 라자그리하(Rājagṛha)에서 부처가 술 취한 코끼리를 얌전하게 만든 사건, 일명 ‘취상조복(醉象調伏)’을 나타냅니다. 불상의 오른쪽 발아래 조그맣게 웅크리고 있는 귀여운 코끼리가 이것을 알려줍니다. 똑같이 생긴 반대쪽 불상은 상카시야(Sāṅkāsya)에서 일어난 ‘도리천강하(忉利天降下)’를 표현한 것입니다. 부처는 도리천에 있는 자신의 어머니 마야부인에게 설법을 한 브라흐마와 인드라의 호위를 받으며 보배로 이루어진 계단을 통해 지상으로 내려왔다고 합니다. 부처 왼쪽에 선 인드라가 받쳐 든 긴 일산(日傘)의 가리개가 부처의 머리 위로 조그맣게 보입니다.

‘취상조복’과 ‘도리천강하’ 장면 아랫단에는 똑같이 ‘전법륜인(轉法輪印)’의 손갖춤[手印]을 취한 두 구의 불좌상이 있습니다. 둘 중 ‘도리천강하’ 장면 아래에 있는 불좌상은 사르나트(Sārnāth)의 사슴동산[鹿野苑]에서 부처가 처음으로 설법한 일화인 ‘초전법륜(初轉法輪)’을 나타냅니다. 설법을 하는 것은 진리의 수레바퀴[法輪]를 굴리는 것에 비유되므로, 이 장면에도 대좌에 조그맣게 사슴동산을 상징하는 사슴 두 마리와 법륜을 표현하였습니다. 한편, 쌍둥이처럼 닮은 반대쪽 불상의 대좌에는 사슴과 수레바퀴 대신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상은 쉬라바스티(Śrāvastī)에서 부처가 외도(外道, 불교 외의 다른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 앞에서 신통력을 발휘한 사건인 ‘대신변(大神變)’을 나타낸 것으로, 대좌에는 부처가 보인 기적에 놀라 손을 모으거나 엉덩방아를 찧는 외도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1. 비상의 세부 모습  <br/>  2. 비상의 세부 모습

1. 비상의 세부 모습
술을 먹고 난폭하게 날뛰며 부처를 해치려 한 코끼리 날라기리(Nālāgiri)는 부처의 신통력에 감화되어 그의 발밑에 얌전히 엎드렸다고 합니다.
2. 비상의 세부 모습
부처에게 꿀을 가득 담은 발우를 바치고 기쁨에 겨워 날뛰던 원숭이는 그만 우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아랫단에 있는 나머지 두 사건을 살펴볼까요? 관람자를 기준으로 왼쪽, 즉 초전법륜 장면 아래 여성이 서 있는 부분은 룸비니(Lumbinī)에서 일어난 부처의 탄생 장면입니다. 오른팔을 들어 나뭇가지를 잡고 있는 여성은 부처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이고, 그녀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이제 막 아기 부처가 태어나고 있습니다. 끝으로 오른쪽 맨 아래 장면은 바이샬리(Vaiśālī)에서 원숭이가 부처의 발우에 꿀을 가득 담아 바친 이야기인 ‘원후봉밀(猿猴奉蜜)’입니다. 대좌 아래에는 꿀이 담긴 발우를 바치는 원숭이와, 뱀의 똬리처럼 표현된 우물 위로 삐죽 솟은 원숭이의 다리가 보입니다. 일부 불전에는 부처에게 꿀을 바친 원숭이가 기쁨에 겨운 나머지 춤을 추다 우물(혹은 구덩이)에 빠져 죽었고, 이후 꿀을 바친 과보로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간결하고 대칭적인 표현이 빚어낸 아름다움

각 장면은 최소한의 장치만으로 알아볼 수 있도록 매우 간결하게 표현했습니다. 가령 전법륜인을 취한 불상 밑에 사슴과 수레바퀴를 작게 표시하여 ‘초전법륜’이라는 사건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식이지요. 흥미로운 것은 가운데의 성도 장면입니다. 촉지인 불상의 대좌 바로 아래 작은 화면에는 왼손에 물병을 받쳐 든 여인과 오른손으로 머리를 짚고 있는 여인이 있습니다. 이들은 각각 성도 당시 부처가 깨달음을 얻을 자격이 있음을 몸소 증명한 대지의 여신과 부처를 유혹하는 데 실패하고 실의에 빠진 마왕의 딸로, 이 두 인물은 팔라시대 촉지인 불상의 대좌에 자주 등장하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이 조각에서 또 하나 돋보이는 점은 대칭성입니다. 가장 아랫단을 제외하면 같은 위치에 있는 두 불상은 모두 쌍둥이처럼 닮은 모습입니다. 뿐만 아니라 촉지인 불상의 대좌에 보이는 사자와, 두 손을 모은 봉헌자의 모습까지 정확히 대칭을 이루고 있지요. 이러한 대칭적 구성은 조각을 질서정연하고 안정적으로 보이게끔 합니다. 그러면서도 중앙의 불좌상과 대좌는 거의 환조에 가깝게 입체적으로 만들어져, 평면적인 느낌을 최대한 줄이고 조각에 리듬감을 부여합니다. 또한 여덟 가지 사건이 시간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지 않다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아마 팔라시대 조각가들은 시간적·교리적 측면만큼이나 조각을 아름답고 안정적으로 만드는 구성을 궁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각을 보며 떠나는 성지순례

불비상에 묘사된 여덟 개의 사건 가운데 탄생, 성도, 초전법륜, 열반 네 가지 사건은 부처의 생애에서 뼈대가 되는 중요한 사건들입니다. 일찍이 초기 경전, 특히 열반경(涅槃經) 계통의 경전들에서도 부처를 예경(禮敬)하려는 자는 이 네 사건이 일어난 곳을 생각하고 순례할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각각의 사건이 일어난 장소인 룸비니, 보드가야, 사르나트, 쿠쉬나가라에는 일찍이 스투파(탑), 석주(石柱), 불당 등이 세워져 불교도들이 찾는 성지가 되었습니다. 네 곳의 성지는 이후 8, 16, 32, 80 등 8의 배수를 중요시하는 불교 전통에 따라 여덟 곳으로 확대되었고, 각 장소를 대표하는 이야기가 추가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라자그리하(취상조복), 바이샬리(원후봉밀), 쉬라바스티(사위성신변), 상카시야(도리천강하) 네 장소와 사건은 어떤 이유로 선택된 것일까요? 이에 대해 정확히 밝혀진 바는 아직 없습니다. 다만 이 장소들은 부처가 활동하던 당시부터 중요한 곳이었거나 부처와 인연이 깊은 곳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사위성신변이 일어난 쉬라바스티의 경우 부처가 활동하던 당시 인도를 통치하던 16대국 가운데 코살라(Kosala)국의 수도가 있던 곳이자, 부처가 성도 후 가장 긴 시간을 보낸 곳이었습니다.

 촉지인불좌상, 인도 보드가야 마하보디(Mahabodhi) 대불당 주존

촉지인불좌상, 인도 보드가야 마하보디(Mahabodhi) 대불당 주존
팔라시대에는 부처의 성도와 성도지인 보드가야를 상징하는 촉지인 불좌상이 크게 유행하였습니다.

한편, 다른 장면보다 성도 장면이 유독 가장 크고 비중이 높게 묘사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팔라시대에 보드가야가 성지로서 누린 인기와 연관이 있습니다. 성도는 부처의 생애는 물론 불교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갖는 사건입니다. 성도를 기점으로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사람이 비로소 ‘부처(붓다Buddha, 깨달은 자)’라는 선각자가 되었기 때문이지요. 바로 그 성도가 일어난 장소인 보드가야는 7세기 이후 최고의 불교 성지로 떠올랐고, 보드가야와 성도를 상징하는 촉지인 불상 역시 가장 중요하고도 보편적인 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아울러 이러한 촉지인 불상은 삼장법사 현장 등의 구법승들에 의해 동아시아로도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사실 교통과 통신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에도 머나먼 성지순례의 길을 떠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이 조각이 만들어진 천 년쯤 전에는 더욱 녹록치 않은 험난한 여정이었겠지요. 아마도 당시의 불교도들은 이 불비상을 보며 여덟 곳의 성지와 각 장소에서 일어난 사건을 떠올리고, 위대한 선각자를 생각하며 믿음을 다지지 않았을까요. 말하자면 이 팔상조각을 보면서 부처의 발자취를 좇는 ‘간접 성지순례’를 떠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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