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겸가당아집도(蒹葭堂雅集圖)>, 한일 문인 교류의 표본 :권혜은

일본에서 건너온 두루마리 한 점

조선시대 외교사절인 사행(使行)에 참여하는 것은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는 외국 문물을 접할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였습니다. 짧게는 4개월, 길게는 6개월에 걸쳐 중국과 일본으로 세상 밖 도시를 여행한 사람들의 기록에는 기나긴 여정 중 겪은 다양한 일화와 현지인들과의 교류, 그리고 이국에서 접한 새로운 문물에 대한 경험담이 생생히 담겨 있습니다. 특히 사행단과 현지 지식인들이 붓으로 맺은 인연들은 조선과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1764년(영조 40), 조선의 11번째 일본 통신사행(通信使行)에 참여한 성대중(成大中, 1732-1809)이 가져온 서화 한 점은 18세기 후반 조선 지식인들에게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킵니다. 전체 길이가 무려 4미터가 넘는 이 두루마리 횡권은 자그마한 그림 한 점과 8편의 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이 완성되기까지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당시 양국 여러 문사들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조선과 일본, 젊은 두 지식인의 만남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젊은 문인이었던 성대중은 일본으로 향하는 통신사행에 ‘서기(書記)’ 자격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조선통신사 일행은 일본 현지에 도착하여 방문하는 지역마다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새로운 문물을 고대하는 많은 일본 문인들과의 만남이 줄을 이었습니다. 성대중이 참여한 통신사 일행은 부산을 출발하여 4월 5일 오사카[大阪]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날 성대중이 머물던 객관(客館)으로 오사카의 대표 상인이자 문인화가, 그리고 서화 수장가였던 기 히로야스[木弘恭], 즉 기무라 겐카도[木村蒹葭堂, 1736-1802]가 찾아와 만나게 됩니다. 그들의 나이 각각 32세, 28세 때의 일입니다.

성대중은 오사카에 머무는 동안 기무라 겐카도를 비롯한 오카사의 문인들과 두 차례 만나 서로의 글을 주고받으며 일본 지식인들에 대한 깊은 인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기무라 겐카도의 빼어난 기량을 알아본 성대중은 그에게 이 뜻깊은 만남을 기념하는 서화를 요청하였고, 이에 기무라 겐카도가 직접 그림을 그리고 그와 오사카의 문인들이 서문(序文)을 적어 축으로 꾸며 선물하였는데, 그 작품이 바로 <겸가당아집도>입니다.

이러한 <겸가당아집도>의 제작 과정의 전모는 당시 통신사 일행을 수행했던 교토의 승려 다이텐 겐조[大典顯常, 1719-1801]가 남긴 통신사 체류기록인 『평우록(萍遇錄)』에 상세히 남아 있습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만남 이후 오사카에서 한 달간 머무는 동안 성대중은 수시로 <겸가당아집도>가 완성되는 과정을 확인하는가 하면 서문 내용을 검토하기도 하였습니다. 오사카를 떠날 날을 사흘 앞두고도 작품을 받지 못한 성대중은 다이텐 겐조를 통해 작품의 진행 상황을 재차 확인하였고, 떠나기 하루 전인 5월 5일에 이르러서야 완성된 작품을 받아볼 수 있었습니다. 기무라 겐카도는 작품을 전달하면서도 그림을 완성하고 급히 배접하느라 장황 상태가 썩 좋지 않은 점이 성대중의 마음에 걸릴까 걱정하였습니다. 성대중은 오래도록 기다린 이 작품을 소중히 간직하여 조선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겸가당아집도(蒹葭堂雅集圖)

 기무라 겐카도 외, 일본 에도[江戶]시대 1764년, 비단에 엷은 색, 종이에 묵서, 그림 44.5×32.5cm, 전체 44.5×411.5cm, 본관1994

기무라 겐카도 외, 일본 에도[江戶]시대 1764년, 비단에 엷은 색, 종이에 묵서, 그림 44.5×32.5cm,
전체 44.5×411.5cm, 본관1994

<겸가당아집도>는 전체 길이가 411cm에 달하는 긴 두루마리 그림입니다. 장황의 상태로 보아 기무라 겐카도의 말대로 급히 제작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당시 만남을 가졌던 양국 문인들의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먼저 횡권 맨 오른쪽 인수(引首) 부분에는 그림 제목에 앞서 금박을 입힌 장황 면에는 성대중이 지은 7언절구의 제시(題詩)가 적혀있습니다. 여기에는 성대중이 통신사행을 다녀온 지 2년이 지나, 아집도 속 한 인물이 편지로 안부를 전하여 그림을 감상하고 당시의 만남을 추억한다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오사카 문인으로부터 편지가 온 것은 일본에 다녀온 지 2년 후인데, 이 제시를 적은 것은 4년 후인 무자년(1968)이라는 점이 이채롭습니다.

藤箋倒射白毫光 등나무 종이에 부처님 백호 빛이 거꾸로 비치니,
萬里携歸別有香 만 리 길을 가져와 향기도 별나구나.
淸月秋懸藏畫舫 맑은 가을 달이 그림을 간직한 배에 걸리고
暖花春滿蓄書房 따뜻한 봄꽃이 책방에 가득 찼네.
鴻魚信息經三歲 3년이 지나 소식이 왔으나
霜露江湖渺一方 서리와 이슬 내린 강호의 땅은 저 멀리 있네.
半幅縹緗隨處在 반 폭의 그림을 어디서나 지니고 다녔으니
海山今擬製琴囊 지금 거문고 넣는 주머니를 만들어 산과 바다 넘어 훌쩍 떠나려 한다네.

槎海之二年 雅集中人致書相問
戊子中秋靑城山人書于東湖官居
일본에 사행을 다녀온 지 2년이 지나 ‘아집도’ 속의 한 사람이 편지로 안부를 물어왔다.
무자년(1768) 음력 8월 청성산인(성대중)이 동호의 관사에서 쓰다.

이어서 이 만남을 상세히 기록한 교토의 승려 다이텐이 전서(篆書)로 쓴 “겸가아집지도(蒹葭雅集之圖)”라는 제목이 있고, 그 뒤로 기무라 겐카도가 직접 그린 <아집도>가 이어집니다. 화면 오른편 상단에는 “갑신년(1764) 성용연 선생[성대중]의 청에 응하여 겸가당 주인 목홍공(木弘恭, 기무라 겐카도)이 그린다[甲申○應需龍淵成先生 蒹葭堂主人木弘恭寫]”라는 반듯하게 쓴 기무라 겐카도의 묵서가 남아 있습니다.

그림 속에 비친 겸가당(蒹葭堂)

화면에는 굵은 소나무 아래 꽃이 만발한 정원 속 건물에 모인 인물들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화면 가운데 건물이 바로 기무라 겐카도의 당호(堂號)이기도 한 ‘겸가당(蒹葭堂)’이며, 성대중에게 선물할 글을 짓기 위해 모인 9명의 오사카 문인과 어린 시종 1명이 등장합니다. 화면 상단에는 ‘갈대’를 뜻하는 ‘겸가(蒹葭)’란 이름에 걸맞게 길게 이어진 갈대밭이 나니와 강[浪華江]과 인물들의 공간을 구분해줍니다.

일본의 대표적 문인화가이자 유명한 서화 수장가였던 기무라 겐카도는 일찍이 중국의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畫)를 수용하였고, 이케노 다이가[池大雅, 1723-1776]와 함께 일본 문인화단을 이끌었던 인물입니다. 푸른 선염으로 원산(遠山)을 처리하고 커다란 수목 사이에 건물들을 자연스럽게 배치한 데서 청년 시절 기무라 겐카도의 전형적인 화풍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한 차(茶)를 애호하여 차를 끓이는 모습을 그린 전다도(煎茶圖)로 유명했던 만큼, 이 그림에서도 차를 달이는 동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특히 화면 가운데 문인들이 아회(雅會)를 펼치고 있는 겸가당 안쪽과 나무 사이로 보이는 책이 가득 쌓인 서실(書室)에서, 3만 권이 넘는 책을 보유했었다는 장서가(藏書家)로서 겐카도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겸가당아집도(蒹葭堂雅集圖)> 그림 부분 기무라 겐카도[木村蒹葭堂, 1736-1802], 일본 에도[江戶]시대 1764년, 비단에 엷은 색, 44.5×32.5cm

<겸가당아집도(蒹葭堂雅集圖)> 그림 부분
기무라 겐카도[木村蒹葭堂, 1736-1802], 일본 에도[江戶]시대 1764년, 비단에 엷은 색, 44.5×32.5cm

조선 문인들이 돌려 본 일본 문인들의 서화

통신사행을 마치고 돌아온 성대중은 주변 지인들에게 겐카도를 비롯한 일본 문인들과의 인상적인 만남을 전했고, 그가 가져온 <겸가당아집도>는 조선 실학자들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당시 대표적 북학파 실학자이자 문장가로 이름 높았던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역시 소문을 듣고 성대중에게 이 작품을 빌려 가까운 벗이었던 박지원(朴趾源, 1737-1805)과 함께 감상하였습니다. 이후 그들은 자신들의 문집에 이 작품과 기무라 겐카도에 관한 평을 남겼습니다. 이덕무의 문집인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는 그림 뒤로 이어진 제시(題詩) 여덟 편이 모두 수록되었습니다. 이를 포함하여 문집에는 ‘겸가당’이라는 이름이 총 4차례에 걸쳐 등장할 만큼, 기무라 겐카도의 시문은 조선의 실학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음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이덕무를 비롯한 북학파 지식인들은 <겸가당아집도>의 제시 중 중 몇 수를 뽑아 자신의 문집에 수록하는가 하면, 심지어 중국에 이들의 존재를 알리려 했을 정도로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처럼 이 작품은 18세기 후반 일본에 대한 조선의 지식인들의 인식이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라 하겠습니다. 실제로 18세기, 일본은 개항 이후 중국과 서구와의 교역을 통해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었습니다. 수도 에도[江戶, 지금의 도쿄]를 비롯하여 교토[京都], 오사카[大阪]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경제 발전과 함께 학술과 사상, 문화도 함께 깨어가는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일본 문화의 성장은 조선 통신사행에 대한 의식의 변화에서도 나타납니다. 18세기 초까지만 해도 조선은 일본에 선진 문화를 전달하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오직 조선을 통해서만 유입되었던 문물들이 개항 이후 중국과 서구를 통해 직접 일본 내에 빠르게 전달되기 시작합니다. 성대중이 상인인 기무라 겐카도가 3만 권에 달하는 장서를 보유한 것에 크게 놀랐다는 일화에서 나타나듯, 조선의 지식인들은 19세기를 앞두고 일본의 급격한 변화를 체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18세기 일본 도시인들은 왕성하고 활발한 지적욕구와 예술에 대한 품격을 갖추어 갔고, 이 자그마한 두루마리 서화 한 점을 통해 조선의 지식인들은 일본 문인들에게 큰 자극을 받게 되었습니다. 박지원이 『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 “우리는 뱃길로 중국의 남방지역과 교역을 못하는데, 일본은 강남과 교역을 한 후 중국의 문물들이 다수 유입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기무라 겐카도를 예로 든 것은 일본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잘 보여줍니다. 이러한 변화의 기폭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겸가당아집도>였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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