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활빈당 발령 - 낡은 종이에 남은 민초(民草)의 목소리 :강민경

1903년 겨울, 해가 어느덧 산 너머로 넘어가는 밤 충청북도 회인(懷仁, 지금의 보은 일대)에 살던 부자(富者) 정인원은 자기 집 사랑채 안에 앉아 있었습니다. 멀리서 보기엔 그저 평안히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니 종잇장 하나를 들고 벌벌 떨고 있군요. 무엇이 그를 이렇게 떨게 했을까요. 일렁이는 호롱불 아래, 종잇장에 적힌 한글이 언뜻언뜻 드러납니다. 이를 읽어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정인원의 어깨너머로 그 글을 읽어봅시다.

 <활빈당 발령>(1·2면), 대한제국 1903년, 종이에 먹, 30.4×256.0cm, 구6936

<활빈당 발령>(1·2면), 대한제국 1903년, 종이에 먹, 30.4×256.0cm, 구6936

지금은 읽기도 힘든 고(古) 한글입니다. 번역을 해보면, “활빈당(活貧黨) 발령(發令). 이상 발령하는 일은 전일에 전(錢) 5천 냥을 보내라 하였더니, 3백 냥만 보내니 괘씸한 마음을 어디에 다 말하랴 … 명령을 내니 이번에도 따르지 않으면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을 것이로다.” 라는 내용이네요. 허! 그냥 글이 아니었습니다. 홍길동(洪吉童)이 만들었던 도적 집단, 활빈당의 협박장입니다. 그러니 정인원이 이렇게 떨 수밖에요. 종이 위에 크게 박힌 화살 모양 수결(手決)이 그에겐 퍽 섬뜩했을 겁니다. 아니 그런데 잠깐, 활빈당은 고소설 『홍길동전』에 나오는 가상의 존재 아니었던가요? 한데 20세기로 접어든 시점에 활빈당이라니? 과연 이 시절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우리는 왜 도적이 되어야 했는가

어느 시대건 농민들은 고달팠습니다. 특히 조선 후기의 농민들은 더 힘든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미 18세기 말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나 19세기 초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경고했듯 조선 중앙과 지방의 재정은 대다수 농민을 수탈하는 방식으로 조달되고 있었고, 농민과 직접 대면하는 지방관 자리는 어마어마한 금액에 팔리고 있었습니다. 돈을 주고 지방관 자리를 산 이들은 본전을 뽑으려 하는 게 당연했지요. 게다가 1876년 개항(開港) 이후 밀려들어 오던 서양과 청(淸), 일본 세력은 조선의 경제를 잠식해 들어갑니다. 그러한 상황이 겹치다 보니 위로는 왕실, 조정의 고관과 부자부터 아래로는 아전에 이르기까지, 더욱더 농민을 수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조선의 농민들은 견디다 못해 항쟁을 일으키거나, 동학(東學) 같은 신앙에 의탁하거나, 정든 터전을 버리고 도망가는 것으로 대응하게 됩니다. 고향을 등진 이들이 찾아 든 곳은 대개 산이었습니다. 산에 모인 이들은 자연스럽게 뭉치게 되었고, 이윽고 무장을 갖춘 도적이 됩니다. 이들 중에는 행인들을 터는 단순한 좀도둑이나 화적(火賊)들도 있었지만, 횃불을 들고 탐관오리나 부잣집을 터는 명화적(明火賊)처럼 나름 사회 변혁을 지향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 도적 무리 중에는 지역을 장악하고 체계를 갖추었으며,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진 이들이 있었지요. 기록에 그들은 불한당(不汗黨) 또는 활빈당으로 적혀 있습니다. 이는 분명 『홍길동전』에서 따온 이름이지만, 소설 속 활빈당 못지않게 당시 백성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활빈(活貧), 기존의 질서를 깨면서

활빈당이라는 명칭은 『고종실록(高宗實錄)』에 딱 한 번 등장합니다. 1885년에 부호군 김교환(金敎煥)이 올린 상소 속에서 활빈당은 “거리와 저자에 함부로 방(榜)을 내걸고는 민가를 파괴하고, 사람을 살해하며 불을 지르고 재물을 빼앗으며, 남의 무덤을 파헤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존재입니다. 흥미롭게도, <활빈당 발령>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네 집을 샅샅이 다 아니, 네가 너를 생각하여라. 우리를 해한 자는 멸문지환(滅門之患)이 있을 것이요 일족을 멸할 것이니 깊이 생각하라. … 우리는 세 가지를 잘하는데, 돈 안 주면 집에 불 지르기와 유부녀 겁탈하기와 파묘(破墓)하기를 잘한다.

- <활빈당 발령> 중에서(현대어 번역)

활빈당은 정인원에게 이런 글을 보내며 돈 5천 냥을 요구합니다. 이것만 보면 ‘불한당’이 따로 없습니다. 하지만 활빈당이 왜 정인원에게 이렇게 했을까를 생각해봅시다. 1890년 무렵부터 1905년까지 <황성신문(皇城新聞)>이나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뎨국신문>을 보면 활빈당 관련 기사가 실리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 기사들을 보면 활빈당의 활동 범위는 전국에 걸쳐 있습니다. 그들은 악덕 부자와 관청, 사찰을 주로 공격했고, 농민이나 빈민을 공격했다는 기사는 한 번도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활빈’이라는 이름답게 빼앗은 재물을 반드시 빈민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남도(南道) 활빈당] 홍주(洪州), 연산(連山) 등지에서 온 소식을 접하니, 요즈음 이른바 활빈당(活貧黨)이라 하는 사람들이 말 타고 총을 차고서 부민가(富民家)에 난입(亂入)해 돈이나 곡식을 마음대로 빼앗아 빈민에게 나눠주는데 그 무리가 수천 명이라더라.

- <황성신문> 1900년 3월 20일자(현대어 번역)

김구(金九, 1876-1949)의 『백범일지』를 보면 그가 1911년 105인 사건으로 감옥에 갇혔을 때 “삼남(三南) 불한당의 괴수” 김진사란 이를 만난 대목이 나옵니다. 김구가 기억하는 김진사의 이야기에 따르면, 조선의 도적은 크게 강원도에 거점을 둔 ‘목단설’, 삼남 지역에 거점을 둔 ‘추설’, 떠돌아다니며 도둑질을 하는 ‘북대’ 이 세 부류로 구분됩니다. 목단설과 추설은 꼭 필요한 때에 탐관오리나 부자를 터는 반면, 북대를 미워하여 보기만 하면 죽였습니다. 그런 “계통 있는” 도적은 이신벌군(以臣伐君)한 조선에 항거했던 고려의 유민을 기원으로 두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재미있게도 『홍길동전』 속 활빈당이나 고려의 유민 모두 당시의 질서를 인정하지 않았던 존재들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활빈당 또한 기존 질서를 부정하고, 억울한 사람들을 구제하고자 했던 데서 공통점이 엿보입니다. 이들은 관헌과 대치하는 일을 피하지 않았고, 외국 상인이나 관청과 결탁해 재산을 늘리던 부자들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활빈당이 보기에 정인원도 아마 그런 자가 아니었을까요?

시대에 녹아든 그들의 유일한 친필(親筆)

활빈당은 그냥 떼도둑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비밀스럽게 활동하였고, 입당할 때에는 엄격한 의식을 거쳐야만 했으며, 엄정한 기율(紀律)을 갖추었다고 하지요. 뿐만 아니라 그들은 기울어가던 대한제국의 실상을 꿰뚫어보고 있었습니다. 방곡(防穀) 실시와 구민법(救民法) 시행, 외국 상인 엄금, 행상(行商)에 대한 세금 징수 반대 등의 내용을 담은 활빈당의 「대한사민논설(大韓士民論說)」을 보면 활빈당이 대한제국의 사회문제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개선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도둑질은 그 방편이었습니다.

하지만 활빈당의 활약은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1905년을 기점으로 수그러듭니다. 통감부에서 대한제국의 치안을 장악해가면서 활빈당의 입지가 좁아진 데다, 구국(救國)이라는 새로운 목표 아래 의병(義兵)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1908년부터 1910년 사이에 봉기한 의병장 중 30여 명이 출신 성분을 확실히 알 수 없거나 화적 출신으로 기록되었는데, 이들이 대부분 활빈당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결국 이들은 율도국이라는 유토피아로 떠난 소설 속 활빈당과 달리, 시대 변화에 따라 그들의 역할을 다하고 사라졌습니다.

이들을 다룬 기록은 대개 그들을 탄압했던 관(官) 또는 제3자가 남긴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 장의 <활빈당 발령>은 활빈당이 직접 남긴 유일한 문서이자 육성입니다. 국문학자 김일근(金一根, 1925-2009)이 고서점에 쌓인 헌책 속에서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영원히 묻혔을지도 모를 이 문서에는, 썩은 세상을 저주하며 가난한 이웃을 구하고자 했던 120여 년 전 민초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그 목소리의 울림은 오늘날에도 여전합니다.

우리는 경기 감악산(紺岳山) 이하 5,772명 활빈류(活貧類)라. 옛날 고래지풍(古來之風)으로 길동(吉童) 선생, 이후로 이칠성(李七星), 그 후로는 맹감역(孟監役)이니, (그는) 팔도를 돌아다닐 뿐 아니라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고, 이재궁궁(利在弓弓)에 거하노라. 우리도 국운(國運)이 아님이 없고, 천하를 얻은 후에는 이 허물을 면할지니 …

- <활빈당 발령> 중에서(현대어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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