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송시열 초상>과 초상화 제작의 유행 : 권혁산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본관이 충남 논산 은진(恩津)이고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 우재(禺齋), 화양동주(華陽洞主)이며 시호(諡號)는 문정(文正)으로, 조선시대 유학자이자 노론(老論)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이 초상화는 우암 송시열이 심의(深衣)를 입고, 복건(幅巾)을 쓴 모습을 반신상으로 그렸습니다. 초상화를 그린 화가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송시열의 다른 초상화에 비해 과장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얼굴과 수염은 최대한 자세하게 그리되 몸체는 간결하고 담백하게 그렸습니다. 그럼으로써 초상화의 주인공을 더욱 부각시켰으며, 대유학자인 송시열을 생생하게 재현해 낼 수 있었습니다.

 작가미상, <송시열 초상>, 조선 17~18세기, 비단에 채색, 89.7×67.6cm, 국보, 덕수2828

작가미상, <송시열 초상>, 조선 18~19세기, 비단에 채색, 89.7×67.6cm, 국보,
덕수2828

유학자의 상징, 심의와 복건

조선 초·중기 초상화 양식을 대표하는 공신초상화는 짙은 색 단령에 화려한 흉배(胸褙)와 카펫[彩氈]이 대조를 이루는 표현으로 주인공의 지위와 명예를 드러냈습니다. 반면,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유학자들의 초상화는 간결한 구성과 채색이 거의 배제된 흑백(黑白)으로 그려졌습니다. 이는 벼슬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학문을 숭상했던 유학자의 모습을 그들이 평상복으로 입었던 심의와 복건 차림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같은 양식의 초상화 중에서 송시열의 초상화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제작되었는데 송시열을 숭모(崇慕)하고 계승하려 했던 후손과 후학에 의해 많은 수량이 그려졌고, 유사한 양식의 유학자 초상화가 널리 유행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보입니다.

송시열이 스스로 경계하는 글과 왕의 글

이 초상화에는 송시열이 스스로를 경계하는 자찬(自讚)과 왕의 글[御製]이 적혀 있어 더욱 흥미롭습니다. 화면 오른쪽에 쓰인 자찬은 1651년 송시열이 45세 때 지은 것으로 이때를 초상화가 제작된 시기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림에 표현된 모습이 연로해 보여 초상화가 그려졌을 당시에 쓴 것은 아니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왕의 글은 1718년에 숙종이 포은영당에 봉안된 정몽주 초상화를 보고 지은 글을 이 초상화에 옮겨 적은 것으로 보입니다.(기존에는 崇禎紀元後再戊戌을 正廟朝라는 표현이 있어 1778년으로 해석해 왔습니다.) 최근에는 이 초상화를 19세기에 이모하면서 이전에 쓰였던 자찬과 어제를 옮겨 적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상단의 표제만으로 초상화가 그려진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이 글들이 초상화의 품격을 더욱더 높여 주고 있습니다.

麋鹿之群 자연 속에서 사슴들과 함께 지내며
蓬蓽之廬 초가집에서 사는구나.
窓明人靜 창문은 환히 밝고 주위가 고요할 때
忍飢看書 주린 배 참으면서 책을 보았다네.
爾形枯臞 네 모습 볼품없고
爾學空疎 네 학문 텅 비었구나.
帝衷爾負 천제(天帝)의 진실한 마음을 어기고
聖言爾侮 성인(聖人)의 말씀 업신여겼으니.
宜爾置之 너는 단언하건대
蠶魚之伍 책벌레구나.

崇禎紀元後辛卯 1651년(효종 2) 우옹(尤翁)이 화양서옥에서 직접 글을
尤翁自警于華陽書屋 짓고 조심하는 마음을 가지다.

節義千秋高 절개와 의리는 천년 세월이 흘러도 고상하여
平生我敬重 평생 동안 나는 존경하였다.
烈祖屢褒崇 역대 임금들도 누차 칭찬하고 높이 평가하였으니
士林孰不聳 사림(士林)들인들 어느 누가 공경하지 않겠는가?
橫竪皆當理 종횡무진으로 내뱉는 말씀은 모두 이치에 합당하여
蔚然理學宗 아름답게도 학문의 우두머리가 되었지만
不盡經淪業 천하를 다스릴 원대한 계획을 펼치지 못하고
吁嗟叔季逢 아! 어지러운 세상을 만났다네.
洛中祠屋在 한양의 사당(祠堂)에
遺像肅淸高 엄숙하고 고고한 선생의 초상화가 있어
衿佩盈庭會 온 유생들이 모두 모일 때에
承宣奠一醪 승지(承旨)가 한 잔 술을 올린다.

崇禎紀元後再戊戌三月, 1718년 바쁜 국정(國政)에 틈을 내어 글을 짓다.
追製於萬機之暇

조선시대 초상화 제작의 유행

 1. 작가미상, <송시열 초상>, 조선 19세기, 비단에 채색, 124.2×52.1cm, 덕수2793 2. 작가미상, <송시열 초상>, 조선 19세기, 비단에 채색,55.8×33.2cm, 동원2531

1. 작가미상, <송시열 초상>, 조선 19세기, 비단에 채색, 124.2×52.1cm, 덕수2793
2. 작가미상, <송시열 초상>, 조선 19세기, 비단에 채색, 55.8×33.2cm, 동원2531

앞서 이야기한 대로 이런 양식의 송시열 초상화는 그의 생전뿐만 아니라 후세(後世)에도 적극적으로 이모·모사되기도 하고 새로운 그림으로 재구성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송시열의 초상화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만 4점(화첩본 포함), 국립청주박물관 기탁품인 8점(초본 3점, 정본 5점)을 비롯해 충북 제천의 황강영당(黃江影堂) 소장본, 삼성미술관 Leeum 소장본 등 많은 수량이 전합니다. 이처럼 한 인물의 초상화가 다양한 모습과 형태로 많은 수량 그려진 예는 조선시대에 거의 찾아보기 힘듭니다.

1. 김창업, <송시열 초상 초본>, 조선 17~18세기, 종이에 먹, 37×50.5cm, 국립청주박물관 기탁
2. 김진규, <송시열 초상 초본>, 조선 17~18세기, 종이에 먹, 36.5×56.5cm, 국립청주박물관 기탁
3. 작가미상, <송시열 초상>, 조선 후기, 종이에 먹, 42.7×56.3cm, 국립청주박물관 기탁

1. 작가미상, <송시열 초상>, 조선 후기, 비단에 채색, 90.5×145cm, 국립청주박물관 기탁
2. 작가미상, <송시열 초상>, 조선 후기, 비단에 채색, 60×97cm, 국립청주박물관 기탁
3. 한시각, <송시열 초상>, 조선 후기, 비단에 채색, 79×174cm, 국립청주박물관 기탁

사실 초상화를 제작하여 영당(影堂)을 건립해 봉하고 제사(祭祀) 드리는 것은 성리학의 이념으로 본다면 바람직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에 초상화를 이용했던 불교와는 달리 성리학에서는 사람의 모습을 조각이나 그림으로 형상화하는 것을 금지하고, 신주(神主), 신위(神位)를 제의(祭儀)의 중심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리학자들이 조상 숭배를 위해 초상화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관습으로 정착되었고, 초상화를 또 다른 신주로 간주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허목(許穆, 1595~1682), 박세당(朴世堂, 1629~1703), 윤증(尹拯, 1629~1714), 남구만 (南九萬, 1629~1711) 등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초상화를 남겼고, 후손이나 후학들은 이모본을 여러 벌 제작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결과 조선 후기에는 별다른 거부감 없이 영당을 세우고 제례에 초상화를 많이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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