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옥벽 - 죽은 자를 지켜 주는 상징물:오세은

옥벽은 중심부에 구멍이 있는 원판형의 중국 옥기입니다. 중국 문헌 『이아·석기(爾雅·释器)』에서 옥벽의 형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육(肉)이 호(好)의 두 배인 것을 벽이라 부른다. 육은 옥 부분이고, 호는 가운데 구멍을 가리킨다[肉倍好謂之璧 肉是玉的部分好是孔的部分].’ 중국 신석기시대부터 청대(靑代)까지 꾸준히 사용되어 온 옥벽은 중국에서 가장 오랜 기간 사용된 옥기(玉器)입니다.

낙랑군 무덤에서 출토된 옥벽

 옥벽, 평안남도 석암리 9호 무덤 출토, 중국 서한 후기, 직경21.5㎝·두께0.6㎝, 본관4785

옥벽, 평안남도 석암리 9호 무덤 출토, 중국 서한 후기, 직경21.5㎝·두께0.6㎝, 본관4785

이 옥벽은 1916년 중국 한나라 낙랑군 주둔지였던 평안남도 대동군 대동강면 석암리 9호 무덤 안 피장자의 가슴 위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직경 21.2cm이고 반점이 약간 있는 담갈색의 반투명 옥기로 앞·뒷면에 문양이 동일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원판에 동심원을 그려 두 구역으로 나누고 안쪽에는 여러 개의 작은 돌기 위에 각각 소용돌이무늬를 음각으로 새기고, 바깥쪽에는 네 쌍의 용무늬를 둘러놓았습니다. 용의 뿔은 원을 그리며 말려 있고 몸체 안쪽에 가는 선을 새겨 넣었습니다. 이렇게 용무늬가 그려진 직경 20cm 정도 크기의 옥벽은 중국 서한(西漢) 후기에 주로 유행하였습니다.

신령한 존재 – 장옥

1. 함옥, 평안남도 석암리 9호 무덤 출토, 중국 서한 후기, 길이6.2㎝·너비3.4㎝·두께0.7㎝, 본관4787 , 2. 옥돈, 평안남도 석암리 9호 무덤 출토, 중국 서한 후기, 본관4791 1. 함옥, 평안남도 석암리 9호 무덤 출토, 중국 서한 후기, 길이6.2㎝·너비3.4㎝·두께0.7㎝, 본관4787
2. 옥돈, 평안남도 석암리 9호 무덤 출토, 중국 서한 후기, 본관4791


고대 중국에서는 옥에 신령스러운 힘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장례 때 죽은 이의 몸에 옥기를 올려놓는 풍습이 있었고 이때 사용한 옥기를 장옥(葬玉)이라고 합니다. 장옥은 입을 막는 함옥(含玉), 입과 함께 신체 9개의 구멍을 막는 쇄옥(鎖玉), 손에 쥐는 옥돈(玉豚), 가슴에 놓아두는 옥벽 등이 있습니다. 매미모양의 함옥은 지하에서 나와 세상으로 비상하며 우는 매미가 지닌 상징성, 곧 부활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쇄옥은 육체에서 생명의 근원인 정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항문, 코, 귀는 옥을 부드러운 천으로 싸서 직접 막았고, 눈에는 나뭇잎 모양의 옥을 연결하여 안경처럼 매어 놓았습니다. 손에 쥔 돼지모양의 옥돈은 내세에 먹을 양식을 상징하고 옥벽은 죽은 이를 지켜 주는 상징물 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장옥, 평안남도 석암리 9호 무덤 출토, 중국 서한 후기, 본관4787~본관4789 여러 가지 장옥, 평안남도 석암리 9호 무덤 출토,
중국 서한 후기, 본관4787~본관4789

 장옥 배치도(석암리 9호 무덤)  장옥 배치도(석암리 9호 무덤)


옥벽의 제작과 발전

옥벽은 일찍이 신석기시대부터 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가공 기술의 한계로 원형보다는 네모꼴에 가깝고 두께도 일정하지 않습니다. 또 가운데 구멍도 양쪽에서 뚫어야 했기 때문에 단면이 경사져 있습니다. 옥벽은 상주(商周) 시기 귀족의 예기(禮器)로 사용되면서 발전하게 됩니다. 신석기시대와 비교하여 크기는 작아졌지만 훨씬 정교하게 제작되었습니다. 원형이 갖추어졌고 표면은 고르게 다듬었으며 가운데 구멍도 일정한 크기로 뚫었습니다. 문양은 대부분 민무늬이고, 서주시대(西周時代) 소형 옥벽에서 음각으로 새긴 용·봉·새 무늬가 발견되는 정도입니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부터 옥벽은 드리개나 부장품 등으로 사용되면서 대량 제작되었습니다. 직접 착용한 드리개는 직경 10cm 내외의 소형이고, 부장품이나 예기로 사용된 것은 직경 15~25cm 전후로 비교적 큰 편입니다. 전국시대 옥벽은 양면 전체에 곡립와문(穀粒渦文)이 새겨진 것이 특징입니다. 한대(漢代)는 전국시대 양식을 기본으로 약간의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입니다. 먼저 동심원으로 구역을 나누어 안쪽은 곡립와문을 새기고 그 바깥으로 용문을 새겨 넣었습니다. 그리고 서한 중기부터 옥벽 가장자리에 용, 봉황 장식이 새롭게 추가되기 시작하여 화려함을 극대화시키지만, 제작 수량은 점차 감소합니다.

예기 옥벽

벽은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예기(禮器) 중 하나로 품덕(品德)과 예(禮)를 대표하고 천자·제후 등 귀족의 권력 상징물이었습니다. 또한 전국시대 말기 『주례(周礼)』에 벽(壁), 종(琮), 규(圭), 장(璋), 호(琥), 황(璜)을 ‘육서(六瑞: 천자와 제후를 상징하는 여섯 가지 상서로운 것)’라 기록하였습니다. 이렇듯 옥벽은 중국 선사시대부터 한대까지 하늘, 산, 바다 등에 제사를 지내는 예기로 사용되었고 동시에 귀한 신분을 나타내는 증표였습니다. 때로는 귀신을 물리치는 벽사(辟邪)의 의미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이후 청대까지는 패옥으로 제작되어 신분을 나타내거나 장신구 역할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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