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의 <명경지수(明鏡止水)>:류승진

일본 근대 남화(南畫)의 거장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 1874~1945]이 1939년 가을, 제3회 신문부성미술전람회(新文部省美術展覧會, 이하 신문전)에 출품했던 작품입니다. 빼곡한 나무와 바위 사이로, 달이 비치는 맑은 연못을 그린 수묵화입니다. 제목인 ‘명경지수(明鏡止水)’는 고요하고 무구한 마음 상태를 맑은 거울과 잔잔한 수면에 비유한 『장자(莊子)』의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제목 그대로 맑고 잔잔한 그림입니다.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 <명경지수(明鏡止水)>, 일본 1939년, 종이에 먹, 119×136cm, 근대108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 <명경지수(明鏡止水)>, 일본 1939년, 종이에 먹, 119×136cm, 근대108

露滿幽叢秋已深 一池月影夜沉沉 흠뻑 젖은 이슬에 가을은 이미 깊었고, 연못 위 달빛 아래 밤도 깊어간다.
何人領畧箇中趣 水上鏡明天地心 누가 그 안의 뜻을 알아차릴까, 거울 같은 물 위에 하늘땅의 마음이 담겼다.
長興山人幷題 고무로 스이운이 그리고 쓰다.

이왕가미술관 소장 일본근대미술 컬렉션

이 작품은 1939년 신문전에 출품된 이듬해 1월, 서울의 이왕가미술관(李王家美術館)에서도 전시되었습니다. 고무로 스이운은 1933년 덕수궁 석조전(石造殿)에서 일본미술 전시가 시작된 이래 총 6번 출품하였고, 이왕가가 구입한 것은 이 작품이 유일합니다.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에 20세기 전반 이왕가가 수집한 일본 근대미술품이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문화통치를 표방하던 시기인 1933년부터 덕수궁 석조전에서는 일본 현대미술품이 전시되었고, 이왕가는 매년 이 가운데 몇 점씩을 구입하여 해방 직전까지 약 200여 점의 컬렉션을 이루었습니다. 이후 해방과 전쟁을 거치면서 이 컬렉션은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품이 되었지만, 줄곧 비공개인 채로 반세기가 흘렀습니다. 그러다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를 계기로 양국 간 문화 교류가 활발해진 덕분에 컬렉션 공개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먼저 컬렉션의 절반을 차지하는 일본화(日本畫)의 전모를 수록한 보고서를 출판(2001)하였고, 곧이어 일본화, 서양화, 조각, 공예 등 전 분야의 대표작을 엄선하여 특별전을 개최(2002)하였습니다. 이 전시는 이후 일본 도쿄[東京]와 교토[京都]에 순회하여 ‘잊혔던 컬렉션의 귀국전’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물론 고무로 스이운의 <명경지수>도 선정되어 양국 전시에 모두 출품되었습니다.

고무로 스이운 <명경지수>에 대한 상반된 평가

당시 주최 기관이었던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과 일본 도쿄예술대학 대학미술관[東京芸術大学大学美術館]은 각자 도록을 제작하였는데, 여기에서 고무로 스이운의 <명경지수>에 대한 양국의 상반된 평가를 볼 수 있어 흥미롭습니다.
일본 측 도록에서 ‘주제나 구도에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여 남화의 혁신을 노렸던 작가다운 작품으로, 이처럼 화면 전체에서 느껴지는 맑고 몽환적인 분위기는 사의(寫意)를 중요하게 여기는 남화의 기본을 제대로 지켜 제작하였을 때 비로소 볼 수 있는 것이다.’라고 높이 평가한 것에 비하여, 한국 측 도록에서는 ‘전통 재료인 먹과 서양화적 기법을 절충하여 나뭇가지와 바위의 질감 등을 묘사함으로써 오히려 수묵의 효과를 억제시켜 어둡고 탁한 느낌이 난다.’고 낮게 평가하였습니다.
남화는 중국의 남종화(南宗畫)에서 유래하였지만 일본인들의 재해석이 가미되어, 같은 연원의 조선 남종화와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고무로 스이운의 <명경지수>에 대한 상반된 평가도 양국의 남화, 혹은 남종화에 대한 서로 다른 인식과 선호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의 남화 선호와 의재 허백련

사실 일본 남화의 거장 고무로 스이운의 이름은 한국에 의외로 많이 알려진 편입니다. 그가 1923년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부터 심사위원으로 조선을 드나들었던 이유도 있지만, 조선 남종화의 마지막 거장으로 알려진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1892~1977)이 일본에서 사사(師事)한 작가로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의재 허백련은 전남 진도 출신으로 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 1858~1936)에게 한학(漢學)을 배웠고, 소치(小癡) 허련(許鍊, 1807~1893)의 운림산방(雲林山房)을 드나들며 그의 아들 미산(米山) 허형(許瀅, 1862~1938)에게 그림을 배웠습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법학을 공부하려 하였으나 결국은 그림으로 전향하여 도쿄의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에 소장된 중국의 남종화를 모사하며 독학하거나, 고무로 스이운의 화실을 찾아 가르침을 얻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평탄치 않은 유학 생활이었기에 도중에 거처를 니가타[新潟], 야마나시[山梨] 등의 지방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곳에서 허백련은 뜻밖에 화가로서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훗날 한국일보에 연재한 회고록에 ‘지금 생각해도 즐거운 것은 일본인들이 그림을 애호하는 마음이었다.’라고 할 정도로, 당시 일본의 지방에는 그림 애호가가 많았습니다. 허백련은 그들에게 그림을 그려 준 대가로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지역 유지들의 주선으로 개인전까지 개최할 수 있었습니다.
본래 일본인들의 주거 공간에는 ‘도코노마[床の間]’라 불리는 그림이나 꽃 등을 장식하여 감상하는 곳이 따로 있었습니다. 여기에 장식하기 적당한 형태가 바로 세로로 긴 족자의 남화였습니다. 남화는 메이지[明治, 1868~1912] 초반 한때 일본미술에서 배척된 적도 있었지만, 1910~20년대 일본의 동양주의와 제국주의가 심화될 무렵 ‘남화신론(南畫新論)’이 주창되면서 과거의 영광을 되찾았고, 고무로 스이운이 주도한 남화 혁신 운동도 많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허백련과 같은 외국의 무명화가가 그림을 팔아 생계를 잇고 전시회를 개최하여 이름을 알릴 수 있을 정도로 일본의 남화 선호는 전국 곳곳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온 조선 땅에서의 상황은 사뭇 달랐습니다. 1918년 귀국한 허백련은 조선에서 처음 열리는 공모전인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1922)에 전형적인 남종화를 출품하여 입선하였습니다. 이후 매년 출품을 이어갔지만 “진보는 고사하고 만장의 금수 같은 색채를 잃어버린” 혹은 “현대인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봉건적인 것”이라는 비평만 받을 뿐이었습니다. 이후 허백련은 경성에서의 활동을 접고 광주로 이주하여 연진회(鍊眞會)를 결성하고, 호남에 남아 있는 전통 남종화의 흐름을 이어가는 데 주력하였습니다.
이처럼 20세기 전반 일본의 남화와 조선 남종화에 대한 양국의 선호도는 매우 달랐고, 이러한 현상은 해방 후에도 이어졌습니다. 21세기 초입, 고무로 스이운의 <명경지수>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상이한 평가를 보면, 이러한 인식의 차이는 현대의 미술 감상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 듯합니다.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하경산수(夏景山水)·추경산수(秋景山水)>,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도록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하경산수(夏景山水)·추경산수(秋景山水)>,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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