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현종실록자(顯宗實錄字)와 낙동계자(洛東契字) - 실록을 찍은 활자

현종실록자는 1677년 『현종실록(顯宗實錄)』 간행에 처음 사용한 활자를 말합니다. 조선시대 금속활자 중 실록 간행을 목적으로 만든 활자로는 유일하며, 『현종실록』 이후 실록 간행에 줄곧 사용되었습니다. 글자체는 단정한 해서체(楷書體)이며, 누가 썼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새로운 책을 간행할 때 필요한 활자를 추가로 만들었기 때문에 책마다 글자체가 조금씩 다릅니다. 그런데 『현종실록』 간행에는 낙동계(洛東契)에서 만든 활자인 낙동계자(洛東契字)가 함께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낙동계자란 무엇이며 현종실록자와는 어떻게 구분될까요?

현종실록자, 조선 17~19세기, 큰자, 1.2×1.25×0.6cm, 본3361, 본3362

현종실록자, 조선 17~19세기, 큰자, 1.2×1.25×0.6cm, 본3361, 본3362

조선, 활자로 실록을 간행하다

‘기록의 나라’ 조선이 남긴 기록 가운데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역사적 교훈을 주는 것이 『조선왕조실록』입니다. 유교 통치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역사를 ‘현재를 비추는 거울’로 여기고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다는 생각이기에, 조선의 통치자들은 역사를 중시했을 뿐 아니라 당대의 사실을 낱낱이 기록하여 후손들에게 교훈을 주고자 했습니다.
초기 실록인 태조, 정종, 태종 3대 실록은 인쇄를 하지 않고 직접 손으로 썼으며, 이후에는 활자로 간행했습니다. 임진왜란 이전의 실록 가운데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의 실록은 1455년에 만든 금속활자인 을해자(乙亥字)로 간행했고, 성종, 연산군, 중종, 인조, 명종의 실록은 1434년에 세종이 만든 갑인자(甲寅字)로 간행했습니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이 활자들이 모두 사라져 버리고 당장 금속활자를 만들 형편이 되지 않았으므로, 선조실록~효종실록은 목활자로 간행했습니다. 『현종실록』을 간행하면서 실록 간행을 위해 처음으로 금속활자를 만든 것입니다.

현종실록자, 조선 17~19세기, 큰자 1.2×1.25×0.6cm, 본3361, 본3362

현종실록자, 조선 17~19세기, 큰자 1.2×1.25×0.6cm, 본3361, 본3362

낙동계는 어떤 모임일까?

『현종실록』 간행 경위를 기록한 『현종실록찬수청의궤(顯宗實錄纂修廳儀軌)』에 따르면 낙동계에서 3만여 자를 들여오고 모자라는 글자 4만여 자를 새로 주조해서 실록을 간행했다고 합니다.
‘낙동洛東’은 얼핏 낙동강을 연상시키지만, 원래 ‘낙’은 중국 후한(後漢)의 수도 뤄양[낙양洛陽]을 가리키는 말로, 수도라는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그러니까 낙동은 조선의 수도 한양의 동부, 오늘날의 종로구, 동대문구 등에 걸쳐 있는 낙산(駱山) 일대를 포함한 지역입니다. ‘洛東’은 ‘駱東’으로 쓰기도 했는데, 조선시대에 고관(高官)과 유명 문인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인 이명한(李明漢, 1595~1645)의 문집에 낙동계를 연상시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낙산(駱山) 아래에 3개의 방(坊)이 있고 각 방마다 계(禊)가 하나씩 있는데 이는 예부터 있었던 일이 아니다. 옛날에는 하나로 합쳐져 있었다. 합했다가 분리하고 분리했다가 합하기를 여러 차례 하였다. 난(亂) 이후 일이 많아서 옛것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계미년(癸未年, 1643) 가을에 3개의 계에 속하는 사람들이 일제히 말하였다. “우리는 모두 같은 동네에 거주한다. 거주지가 같은데 계가 다르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예전에 합해지지 않았던 것도 오히려 새로이 합할 만한데 하물며 예전에 합해져 있었던 것에 있어서랴?” 이리하여 마침내 문서를 갖추어 관에 아뢰고 3방을 합하여 하나의 계로 하였다. 계원이 모두 50여 명이니 성대하도다.

이 지역에 살았던 허목(許穆, 1595~1682)도 자신의 문집에서 “한양의 동리(東里)는 예로부터 이름난 사람이 많이 살기로 유명한 곳이다. (중략) 인조‧효종‧현종 뒤에는 오윤겸(吳允謙)‧홍서봉(洪端鳳)‧이정귀(李廷龜)‧강석기(姜碩期)‧최명길(崔鳴吉)‧이홍주(李弘胄)‧조익(趙翼)‧홍중보(洪重普)가 있었다.”라고 했습니다.
허목이 열거한 동리 즉 낙동 지역 유명인 가운데 이정귀는 바로 이명한의 아버지입니다. 낙동 지역 3개의 방 가운데 건덕방(建德坊)에는 효종의 동생인 인평대군(麟坪大君, 1622~1658)이 살았고 그 아들 복창군(福昌君, 1641~1680)은 “낙동공자(洛東公子)”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명한의 문집에는 낙동계(駱東禊)가 결성되고 2년 뒤인 1645년에 인평대군이 중국으로 사행(使行)을 떠나기 이틀 전, 같은 동 사람들이 모여 이별주를 올리고 시를 주고받으며 환송회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런 사실들로 미루어 낙동계자가 한양 동부 지역에 모여 살던 유력 가문 사람들의 모임인 낙동계에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낙동계에서는 왜 활자를 만들었을까?

낙동계자는 『현종실록』 간행 전에 2종의 『사마방목(司馬榜目)』(과거 시험 소과 합격자 명단)과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鈔)』(중국 당송시대 8대 문장가의 글 모음)를 간행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당송팔대가문초』 중에 허목의 문집에서 동리의 유명인으로 언급한 홍중보의 아들 홍득우(洪得禹)의 소장인(所藏印)이 찍힌 것도 남아 있습니다. 이는 이 집안이 낙동계의 구성원이었고 계에서 함께 만든 금속활자로 찍은 책을 나누어 가졌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조선의 금속활자는 국가의 전유물이자 왕권의 상징이었습니다. 국왕은 금속활자로 통치에 필요한 책을 간행하여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국가에서 관리하던 활자들이 사라지고 책 공급도 원활하지 못했습니다. 전란을 겪으면서 왕권도 약해지고 사회에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유력한 가문에서는 이처럼 변화된 환경에서 자신들이 필요한 책을 간행하기 위해 스스로 금속활자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조정에서는 『현종실록』을 간행하면서 낙동계에서 금속활자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전란 이전과 같이 실록을 금속활자로 찍으려고 낙동계자를 들여오고 모자라는 활자를 다시 만들었을 것입니다. 실록을 인쇄한 뒤에는 두 활자가 섞여 구분하기 어려웠고, 활자가 나뉘면 여러 종류의 책을 찍기에 부족할 수 있다 하여 궁중에 두기로 하였습니다. 원래 주인에게 대가를 지불하려 했으나 받으려 하지 않자, 이후 궁중에서 이 활자로 간행한 책을 한 건씩 지급하기로 하였습니다. 이후 낙동계자는 현종실록자와 섞여 실록을 비롯해 『열성어제(列聖御製)』, 『삼국사기(三國史記)』 등 여러 책을 찍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현종실록자로 간행한 『감란록(勘亂錄)』

현종실록자로 간행한 『감란록(勘亂錄)』, 32.0×20.4cm, 구4635
* 감란록 : 1728년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의 전말을 정리한 책

낙동계자와 현종실록자는 구분이 가능한가?

국립중앙박물관에는 현종실록자가 6만여 자 남아 있습니다. 글자체는 갑인자와 비슷하지만 더 딱딱하며 전형적인 해서체(楷書體)입니다. 하지만 글자별로 자세히 보면, 같은 글자라도 글자체나 활자의 모양, 크기가 일정하지 않습니다. 남아 있는 책과 대조해 보면 어떤 활자는 낙동계자로 찍은 책에서부터 사용되었고, 어떤 활자는 『현종실록』부터 사용되었습니다. 『현종실록』 이후의 실록에서 사용된 활자도 확인됩니다. 일부는 『숙종실록(肅宗實錄)』에 처음 나타나지만, 1838년(헌종 4) 간행된 『순조실록(純祖實錄)』에 처음 나오는 글자체의 활자가 특히 많습니다. 남아 있는 활자들 가운데 『순조실록』 이후 간행된 책에 사용된 활자들을 관찰해 보니, 그 이전에 만든 활자들에 비해 형태가 비교적 일정하고 주조 방법도 정교하며 무게도 가볍습니다. 19세기 초에 실록자를 대규모로 제작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렇듯 ‘현종실록자’라는 이름이 붙은 활자에는 17세기부터 19세기의 활자가 섞여 있어, 시간에 따른 활자 모양의 변화를 추적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됩니다.

제작 시기에 따라 글자체와 모양이 다른 활자들

제작 시기에 따라 글자체와 모양이 다른 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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