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홍무 23년'명 직물 마패 : 서성호

중국 명대(明代)에는 황제가 중요한 공무로 여행하는 관원에게 지급하던 일종의 마패(馬牌)가 있었습니다. 직물로 된 이 마패의 본래 명칭은 신표(信標) 또는 증빙문서를 의미하는 ‘부험(符驗)’입니다. 여기에는 이를 지참한 관원에게 역마를 제공하라는 황제의 명령이 새겨져 있지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이 직물 마패(덕수1784)는 1390년(공양왕 2)에 제작된 것으로, 명 태조가 자국 영토에 도착한 고려 사신들의 통행 편의를 위해 고려에 발급한 부험들 중 현재 확인되는 유일한 것입니다.

<직물 마패>, 명(明), 1390년, 비단에 직조, 34×124cm, 덕수1784 <직물 마패> , 명(明), 1390년, 비단에 직조, 34×124cm, 덕수1784

직물 마패의 모양과 재질, 그리고 황제의 명령

두루마리 형태의 이 마패는 황색 비단에 액자 모양의 테두리를 만들고 그 안에 검은 색 실로 명 황제의 명령을 직조해 넣었습니다. 또 마구(馬具)를 갖춘 말의 형상과 마패의 제작 연월일 역시 실로 짜 넣고, 제작 연월일 왼쪽에 가는 글씨로 일련번호[通字陸拾捌號]를 묵서하였습니다. 제작 연월일과 일련번호 위에는 황제의 ‘제고지보(制誥之寶)’를 찍었습니다. 이를 에워싼 액자 모양 테두리에는 돌아가며 이룡(螭龍)과 구름을 수놓았습니다.

두루마리 맨 끝에는 나무로 만든 축이 있는데,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이 나무를 오목(烏木)이라 했습니다. 오목은 흑단(黑檀) 줄기 중심부의 검은 부분으로, 매우 단단하여 담배설대, 문갑 따위를 만드는 데 쓴다고 합니다.

제작 연월일, 일련번호, 제고지보

제작 연월일, 일련번호, 제고지보

 테두리에 베푼 이룡(螭龍)테두리에 베푼 이룡(螭龍)

 두루마리 축의 마구리두루마리 축의 마구리

왼쪽 테두리 옆의 연폭에는 절반만 날인된 작은 옥새와 그 위에 역시 일부가 세로로 잘려진 채로 쓰여진 일련번호[通字陸拾捌號]가 있습니다. 이는 역참에서 관원이 제시한 마패가 위조된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지만, 중국 내 역참이 여러 곳일 것을 감안하면 부합 여부를 확인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더 밝혀야 합니다.

연폭에 절반 날인된 작은 옥새와 일련번호 부분

연폭에 절반 날인된 작은 옥새와 일련번호 부분

사각의 테두리 안에 검은 색 실로 직조해 넣은 황제의 명령은 같은 종류의 부험을 묘사한 조선시대 연암 박지원의 글(「열하일기」, 口外異聞, 皇明馬牌)과 글자 하나까지 정확히 일치하고 있어서 이것이 명 황제가 지급한 부험, 즉 마패인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황제의 명령이시라. 공무로 가는 사람이 역(驛)을 거쳐 갈 때 이 부험을 지니고 있으면 주어야 할 마필(馬匹)을 주도록 허락하고, 만약 이 부험이 없는데도 멋대로 역마를 지급하거나 각 역의 관리로서 법대로 행하지 않고 인정에 따라 (역마를) 주는 자는 모두 중죄로 다스리도록 하니, 마땅히 이를 따르도록 하라.
皇帝聖旨 公差人員 經過驛分 持此符驗 方許應付馬疋 如無此符 擅便給驛 各驛官吏 不行執法 循情應付者 俱各治以重罪 宜令準此

명 부험의 수령과 사용

고려가 명에서 최초로 받은 부험은 1390년에 제작된 이 부험이 아니라 1386년(우왕 12)에 받은 것들이었습니다. 이때는 육로용·수로용을 합하여 8개의 부험을 받았는데, 당시 북원에 대한 외교를 종식하고 대명 사대 외교를 명확히 하려는 고려와, 북원 지지 잔존 세력인 나하추의 섬멸을 위해 고려를 의식해야 했던 명의 입장이 맞물린 외교적 상징물이라고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1386년에 받은 이 부험들은 부험 발급제도 개혁을 추진하던 명 정부의 요구에 따라 반납한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명 정부로부터 기존 부험을 반납하라는 요구가 실제로 있었을 뿐 아니라, 이후 문헌들의 명 부험 관련 기록에서 1386년에 받은 부험은 일절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대신 1386년 수령 부험의 일련번호 체계와는 전혀 다른 일련번호 체계를 가진 새 부험들만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은 그 중 하나입니다.

1390년에 제작되어 고려가 새로 수령한 부험, 즉 마패들은 우리 측 사행단별로 하나씩 정사(正使)가 지참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따로 정해진 유효 기간 없이 고려를 이어 조선 후기 대명 외교가 끝날 때까지 약 240년 간 사용되었습니다.

이것들은 명 황제의 ‘제고지보’가 찍힌 것인 만큼 문서로서의 위상이 매우 높았고, 따라서 조선의 대명 외교 의전에서 귀중하게 다루어졌습니다. 또 함부로 폐기하거나 훼손한 자는 참형에, 유실한 경우에도 장 90에 도 2년 반이라는 중형에 처하도록 정해져 있었습니다. 1446년(세종 28)에는 분실 직후 곧바로 찾았음에도 고신을 빼앗는 중징계가 내려지기도 했습니다. 부험, 즉 마패는 단지 역마 보장을 위한 사행용 증빙문서임을 넘어 조선과 명의 외교를 상징하는 의물(儀物)이기도 했던 것이지요.

다만 풍랑으로 인한 사행선 침몰 등 부득이한 사정으로 분실한 경우에는 저간의 사정을 명 측에 잘 설명하여 새 부험을 ‘보사(補賜)’ 받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에 대해 조선은 방물과 함께 당대의 문장가가 지은 표전으로 사은의 뜻을 매우 정성스럽게 표시하였습니다.

직물 마패의 유전(流傳)과 자료 가치

명 부험들은 1636년 병자호란으로 대명 외교가 종식되면서 그 쓰임새와 위상을 상실하고 국왕의 새보(璽寶)나 부신(符信) 등을 맡아 보던 상서원(尙瑞院)에 예전보다 허술한 상태로 보관 됩니다. 18세기 후반 상서원에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을 포함한 1390년 제작 부험 네 개와 1599년 제작 부험 두 개가 전해지고 있었는데, 이 중 1599년 제작 부험은 1621년과 1630~1631년의 풍랑으로 분실된 부험들을 대신하여 1631년에 ‘보사’받은 것으로 기록에 전하는 바로 그 부험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험들은 어떤 연유에서인지 모르지만 불과 얼마 지나지 않은 1811년 4월에 한 개만 잔존하는 것으로 비변사가 확인하고 있습니다. 이 명 부험이 바로 오늘날까지 전하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여전히 허술하게 보관되던 이 부험, 즉 직물 마패는 이때 좌의정 김재찬의 건의에 따라 명대(明代)의 구적(舊蹟)을 모은 경봉각(敬奉閣)으로 옮겨 봉안하게 됩니다.

경봉각에 옮겨진 이후의 상황과 본 소장품의 향방은 알 수 없으나,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품 카드에는 이를 1909년 일본인 골동상 곤도 사고에게 구입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한제국기의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일본인 골동상의 수중에 넘어가게 되었을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그간의 자세한 사정은 앞으로 밝혀야 하겠지만, 어떻든 제실박물관이 곤도에게서 구입한 직물 마패는 잠시 제실박물관의 소장품으로 있다가 일제강점기에 이왕가박물관[→이왕가미술관]의 소장품으로, 그리고 1969년 덕수궁 이왕가미술관 소장품의 국립박물관 통합 이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품으로, 시대변화에 따른 소속 변동을 겪으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직물 마패는 고려 말 원·명 교체라는 동북아 정세 변동에 대응한 고려의 외교를 상징하는 문화재이자, 고려 말~조선 후기에 걸친 수백 년 동안 명으로 가던 사신들이 서해 뱃길의 비바람과 육로의 풍진(風塵)을 견디며 지켰고, 또 명의 운명이 다 한 뒤에는 여러 곡절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가치가 실로 크고 특별하다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성과 더불어, 이를 제작했던 중국에서조차 같은 종류의 마패의 현존 사례가 극히 드물다는 희소성, 그리고 제작된 지 6백년이 지난 뒤에도 아주 양호한 보존 상태 등은 앞으로 이 소장품이 귀중한 문화재로서 높은 지위를 부여받을 것을 예상하게 합니다. 명대 초기의 견직물과 마구(馬具), 역참제, 문양 등에 대한 연구에도 물론 좋은 자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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