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700년 동안의 간절한 바람이 담긴, 금동아미타삼존불상 :양수미

우리 삶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인 우리로서는 깊이 생각해본 적 없는 문제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 심오한 질문에 고려시대 사람들은 이번 생의 마지막에는 또 다른 생이 시작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끝없는 윤회를 인정하는 불교의 세계관에서 한생의 끝은 또 다른 생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살아가는 동안 선업(善業)을 많이 쌓아 다음 생에는 더 나은 존재로 태어나고, 궁극에는 깨달음을 얻어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이 불교에서 목표로 하는 최고의 경지였습니다.
세간을 벗어나 치열하게 수행에 정진하는 승려가 아니더라도 불교는 고려시대 일반 신앙 대중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선업과 공덕을 쌓으며 살려고 노력했고, 불교에 의지해 살아가면서 겪는 여러 고난을 극복해나가고자 했습니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아미타 신앙이 유행하면서 현실 세계의 고통에서 벗어나 아미타불이 있는 서방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염원하는 사람이 많아졌고, 이에 따라 아미타불상과 불화가 많이 조성되었습니다.
이 글에서 소개하는 아미타삼존불은 명확한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상으로, 고려 후기 불교조각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또한 700여 년 전 이 상을 만든 고려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상이기도 합니다.

1333년에 만들어진 아미타삼존불상

먼저, 상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이 상은 본존불인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관음보살을 오른쪽에는 대세지보살을 둔 아미타삼존불입니다. 본존인 아미타불은 좌상, 두 보살은 입상입니다. 원래는 연화대좌 위에 안치되어 지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원래 어떤 모습으로 봉안했는지 알 수 없지만 고려불화에서 보이는 것처럼 아미타불좌상을 높은 대좌에, 보살 입상을 그 아래에 배치했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 아미타삼존불상은 정확한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고려시대 불상으로 일찍부터 주목받았습니다. 관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상 바닥에는 상을 조성한 때와 조성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적은 묵서(墨書)가 전합니다. 이에 따르면 고려 충숙왕 복위 2년인 1333년 9월 22일에 이 아미타삼존불상을 만들었는데, 장현(張鉉)과 그의 부인 선씨(宣氏)가 후원하였고, 승려 행인(行因), 영전(永田), 계환(戒桓)이 조성에 참여했습니다. 장현이라는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자세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아내와 함께 단독으로 불상 조성을 후원한 것을 보면 상당한 경제력과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삼존불은 만듦새가 뛰어난 상입니다. 세 점 모두 금동으로 만들어졌고 주조한 표면에 옻칠을 한 다음 여러 겹의 금박을 입혀 마무리했습니다. 아미타불상은 동그란 얼굴에 지긋이 뜬 두 눈, 짧고 오뚝한 코와 작은 입이 특징입니다. 턱선과 목에는 삼도가 뚜렷이 표현되었고, 대의(大衣) 주름이 자연스럽고 유려하게 조각되어서 부드럽고 입체적인 느낌을 줍니다. 대의 안에는 내의를 입었고 가슴 왼쪽에는 승기지(僧祇支, 승려들이 삼의 안에 입는 작은 옷)를 고정한 장식이 보입니다. 관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상은 얼굴 생김새나 신체 표현이 아미타불과 유사하며, 화려한 보관과 몸 전체를 덮은 장신구가 특히 눈에 띕니다. 지금은 두 손에 아무런 지물(持物)도 없지만, 손의 위치와 형태로 미루어 보아 관음보살상은 보병(寶甁)을, 대세지보살상은 연꽃을 들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세 점의 상은 14세기 불교 조각 양식을 잘 보여주는 상으로 평가됩니다. 서산 부석사 관음보살상과 문수사 아미타불상, 청양 장곡사 약사불상 등 충청도 지역의 14세기 불교 조각과 유사한 양식을 보여줍니다.
한편, 최근 조사에서는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세 점의 상을 만드는 데 쓰인 구리, 주석, 납의 함량과 불순물의 함량이 매우 유사하고 도금층 두께도 비슷하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따라서 아미타불상과 두 보살상은 같은 공방에서 동시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세 점 모두 상 안에 복장물(腹藏物)이 들어 있어서 이를 통해 이 삼존불이 전하는 이야기를 더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아미타삼존불, 고려 1333년, 금동, 높이 88.45cm(보관 포함, 대세지보살, 사진 왼쪽), 69.25cm(아미타불, 가운데), 86.42cm(관음보살, 사진 오른쪽), 덕수3364(대세지보살, 보물), 덕수71(아미타불), 덕수3363(관음보살), 보물

아미타삼존불, 고려 1333년, 금동, 높이 88.45cm(보관 포함, 대세지보살, 사진 왼쪽), 69.25cm(아미타불, 가운데), 86.42cm(관음보살, 사진 오른쪽), 덕수3364(대세지보살), 덕수71(아미타불), 덕수3363(관음보살), 보물
뛰어난 조각 수준과 상 안에서 발견된 복장물의 자료적 가치를 인정받아 고려 후기 불교 조각을 대표하는 상으로 꼽힙니다.

관음보살상 바닥 명문

관음보살상 바닥 명문
관음보살상 바닥면에 있는 명문으로 상의 정확한 조성 시기와 조성에 참여한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276명의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만든 아미타삼존불상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이 아미타삼존불상과 관련된 복장 발원문(發願文) 한 점이 전합니다. 발원문이란 불교 신앙을 바탕으로 개인 또는 특정 집단의 간절한 바람을 적어놓은 글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사찰이나 탑을 세우거나 불상과 불화를 봉안하고 의식을 행하는 불사(佛事)를 할 때 발원의 내용, 불사의 시기, 내용,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 등을 함께 기록합니다. 따라서 발원문은 불상이나 불화, 건축물 등 불교 미술품이 만들어진 당시의 상세한 상황을 전해주는 매우 중요한 기록이 됩니다.
그러면 발원문을 한번 자세히 볼까요? 화면 왼쪽에는 커다란 원형 금강계 다라니가 찍혀 있습니다. 가장 바깥쪽에는 네 방위를 상징하는 범자(梵字)가 적힌 원 네 개가 있고, 커다란 원의 중심에는 다섯 개의 원이 십자 형태로 놓여 있습니다. 다섯 개의 원 안에는 금강계 만다라의 오불(五佛)인 중앙 대일여래(大日如來), 동방 아촉불(阿閦佛), 남방 보생불(寶生佛), 서방 아미타불(阿彌陀佛), 북방 불공성취불(不空成就佛)을 상징하는 범자가 적혀 있습니다.
원형 다라니를 제외한 나머지 화면에는 글씨가 빽빽하게 적혀 있습니다. 첫 번째 문장인 ‘연기법송(緣起法頌)’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 삼존불상을 만드는 데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인데요, 헤아려 보면 276명에 이릅니다.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은 화면 오른쪽에 쓰인 이름들은 마치 한 사람이 적은 듯이 반듯하고 가지런한 데 비해 화면 왼쪽에 쓰인 이름들은 저마다 개성 있는 필치를 보인다는 점입니다. 오른쪽에 쓰인 이름들을 보면 ‘…막생(莫生), 가이(加伊), 덕이(德伊), 복이(福伊)…’ 등 모두 성(姓)이 없는 평민의 이름입니다. 글을 알지 못했을 테니 누군가가 이들을 대신해서 이름을 정갈하게 써주었던 것이지요. 반면에 글을 아는 이들은 오늘날의 서명에 해당하는 자신만의 수결(手決)을 남겼습니다. 이들은 아마도 이 불사를 주도했던 승려와 신분이 높은 후원자들로 추정됩니다.

복장 발원문, 고려 1333년, 종이에 먹, 56.7×60.3㎝, 덕수5425

복장 발원문, 고려 1333년, 종이에 먹, 56.7×60.3㎝, 덕수5425
이 발원문은 아미타삼존불상의 협시보살상 가운데 하나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상을 조성한 목적, 조성 시기, 의식을 주관한 자와 후원에 참여한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성조차 없었던 평민들과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 함께 발원하여 불상을 만들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고려 후기가 되면 이 아미타삼존불상에서 보이는 것처럼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 불사에 참여하는 예를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고려 1346년에 청양 장곡사 금동약사불좌상을 조성할 때도 평민부터 군부인(郡夫人), 승려까지 천 명이 넘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이 불사에 함께 참여했습니다. 이토록 다양한 사람이 한마음으로 간절하게 바랐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내 주변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의 행복한 삶과 내세에서의 평안을 기원하지 않았을까요? 이와 더불어 이 상에는 발원문에 적힌 ‘연기법송’이 전하는 것처럼 “…이 공덕을 모든 중생에게 널리 미치게 하여 모두 함께 불도(佛道)를 이루기를…” 기원했던 당시 불교도의 원대한 바람 또한 담겨 있습니다.

부처님 배 속에 담긴 물건, 아미타삼존불상의 복장물

이 아미타삼존불상과 관련해서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는 바로 불상 안에서 발견된 복장물에 대한 것입니다. 복장물이란 불상의 몸속에 넣은 물건이라는 뜻으로, 불상 안에 사리와 같은 성스러운 물건이나 각종 공양물을 넣어서 불상에 신성함과 영험함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평범한 나무나 금속, 돌로 만든 이미지에 불과했던 불상은 복장 의식을 거치면서 진정한 종교적 성물(聖物)로 거듭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13세기 전반에 이미 복장물을 불상에 넣는 전통이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지은 「낙산관음복장수보문병송(洛山觀音腹藏修補文幷頌)」은 복장물과 관련한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 중 하나입니다. 이에 따르면 오랑캐에 의해 낙산사 관음보살상의 복장물이 없어졌는데 이후 원래 내용을 근거로 거울[心圓鏡] 두 개와 다섯 가지 향[五香], 다섯 가지 약[五藥], 색실[色絲], 비단 주머니[錦囊] 등을 다시 갖추어 넣었다고 전하고 있어 당시 복장물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많게는 수백 점에 이르는 다양한 복장물과 이를 봉안하기 위한 의식과 의례, 불복장 불사에 참여한 후원자들까지 고려하면 복장물은 그야말로 한 시대의 신앙 경향을 고스란히 전해주는 마치 타임캡슐같은 존재입니다.
고려시대 복장물에 대해 정리해놓은 문헌이 전하지는 않지만, 복장물을 갖추기 위한 일정한 내용과 절차를 공유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고려시대에는 대체로 동제 방울인 후령(喉鈴)과 함께 각 방위를 상징하는 형태와 색상의 천 또는 종이에 씨앗과 광물, 오방경(五方鏡)을 싸서 넣은 오보병(五寶甁)을 담은 팔엽통(八葉筒)이나 후령통을 중심으로 발원문, 경전, 직물, 복식, 다라니 등이 복장물로서 불보살상 안에 모셔졌습니다.

『수구근본천수존승육자준제소재등진언합부』 다라니, 고려 1333년, 종이에 목판 인쇄, 55.8×57.7cm, 덕수3364-6-1 『수구근본천수존승육자준제소재등진언합부』 다라니, 종이에 목판 인쇄, 55.8×57.7cm, 덕수3364-6-1

직물편, 고려 1333년, 문릉, 주, 소라, 3.4~8.7×21.0~60.5cm, 덕수3363-1-4, 7, 10, 15 직물편, 문릉, 명주[紬], 소라, 3.4~8.7×21.0~60.5cm,
덕수3363-1-4, 7, 10, 15


대세지보살상과 관음보살상에서 발견된 복장물 가운데 일부입니다. 직물은 남색, 붉은색, 흰색, 검은색 등 각 방위를 상징하는 색채에 맞춰서 준비했습니다.

이 글에서 소개하는 아미타삼존불상에는 위에서 언급한 모든 품목 가운데 일부만이 전합니다. 아마도 처음 복장물을 넣은 이후 어느 시점에 개봉되어 일부 복장물이 반출된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전하는 복장물의 대부분은 다라니 판본과 같은 지류와 직물들입니다. 아미타불상에서는 두 종류의 다라니경 판본 68매가, 관음보살상에서는 『수구근본천수존승육자준제소재등진언합부(隨求根本千手尊勝六字准提消災等眞言合部)』 다라니 목판본 15매, 『불설락차다라니(佛說洛叉陀羅尼)』 목판본 1매가 발견되었습니다. 이외에도 원권(圓圈) 다라니 26매, 구회인(九回印) 다라니 2매와 십육회인(十六回印) 다라니 1매가 확인되었고 대세지보살상에서도 『수구근본천수존승육자준제소재등진언합부』 등 다라니 65매가 발견되었습니다. 세 점의 상에서 발견된 다라니만 해도 178매에 이릅니다. 다라니는 지혜나 삼매(三昧) 또는 산스크리트어 음을 번역 없이 외는 진언(眞言)을 가리키는 불교 용어입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종교적인 의미를 갖지만 복장물로 상 안에 넣을 때는 상 내부 공간을 채우는 충전재라는 실용적인 기능도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이 글에서 소개하는 아미타삼존불상에서는 후령통이나 오곡, 오약과 같은 복장물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관음보살상 내부에서 오보병이나 후령통을 담았던 황색 직물[黃稍幅子]이 발견되어 원래는 이러한 품목을 갖추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여기에는 관음보살을 뜻하는 ‘관(觀)’ 자가 적혀 있어서 이 직물이 관음보살상의 복장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황초폭자, 고려 1333년, 주(紬), 38.5×51.0cm, 덕수3363-1-3                 관음보살상에서 발견된 황초폭자입니다. 오보병이나 후령통 등의 복장물을 담았던 직물로, 가운데 부분에 연두색 실이 묶인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방위를 의미하는 범자와 관음보살의 ‘관(觀)’ 자가 묵서로 적혀 있습니다.

황초폭자, 명주[紬], 38.5×51.0cm, 덕수3363-1-3
관음보살상에서 발견된 황초폭자입니다. 오보병이나 후령통 등의 복장물을 담았던 직물로, 가운데 부분에 연두색 실이 묶인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방위를 의미하는 범자와 관음보살의 ‘관(觀)’ 자가 묵서로 적혀 있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복장 발원문에 따르면 복장 불사를 주도했던 인물은 오회(烏廻)라는 승려입니다. 아울러 대세지보살상에서 발견된 다라니에는 김진(金稹, 1292~?), 영가군부인 권씨(永嘉群夫人 權氏) 등의 이름이 곳곳에 묵서로 적혀 있습니다. 김진은 1333년 광정대부(匡靖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 지위에 있던 인물로, 아미타삼존불상을 조성하는 이 불사에 평민과 더불어 고위 관료, 신분이 높은 여성도 참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십육회인 다라니, 고려 1333년, 종이에 목판 인쇄, 40.6×39.8cm, 덕수3364-11-1                 대세지보살상에서 발견된 다라니입니다. 원형 다라니 사이에 ‘김진’이라는 이름과 ‘영가권씨’의 인장이 찍혀 있어 이들이 이 상을 조성하는 데 중요한 후원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십육회인 다라니, 종이에 목판 인쇄, 40.6×39.8cm, 덕수3364-11-1
대세지보살상에서 발견된 다라니입니다. 원형 다라니 사이에 ‘김진’이라는 이름과 ‘영가권씨’의 인장이 찍혀 있어 이들이 이 상을 조성하는 데 중요한 후원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불상, 보살상을 하나의 ‘미술품’으로 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불상을 볼 때는 크기나 외형적인 특징에 먼저 눈이 가기 마련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비슷한 시기의 다른 상들, 또는 그 이전이나 이후 시기의 상들, 다른 나라의 예들까지 떠올리면서 종합적으로 비교하고 이해해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 글에서 소개한 아미타삼존불상은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상 너머에 불상이 종교적 성물로서 간직하고 있는 진짜 이야기를 전합니다, 여기에는 자신의 이름조차 쓸 줄 몰랐던 평민이었지만 극락왕생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는 부족함이 없었던 소박한 후원자들의 이야기도, 세상을 호령하던 고위 관료의 이야기도 들어 있습니다. 이제 다시 박물관에서 불상을 마주한다면 그 상을 만들었던 사람들의 뜨거운 마음과 눈에 보이는 불상 그 너머에 남아있을 이야기들을 상상해보시면 어떨까요?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출처표시+변경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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