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김천 갈항사 터 동·서 삼층석탑 사리장엄구쌍탑에서 발견된 두 쌍의 사리장엄구:김민송

김천 갈항사 터 동·서 삼층석탑, 통일신라 758년, 동탑 4.2m, 서탑 4.0m, 국보, 본관4185

김천 갈항사 터 동·서 삼층석탑, 통일신라 758년,
동탑 4.2m, 서탑 4.0m, 국보, 본관4185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석조물 정원을 거닐다 보면 똑 닮은 두 탑이 나란히 서 있는 풍경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김천 갈항사 터에 있던 동·서 삼층석탑입니다. 1916년 이 쌍탑을 서울 경복궁으로 옮긴 뒤 국립중앙박물관이 현재 위치로 이전할 때 함께 옮겨와 야외에서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 쌍탑에서는 각각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는데, 어떠한 이유에서 제작되었을까요?


본래의 자리를 떠나오다

경북 김천시 갈항사 터에 동·서로 세워져 있던 두 탑은 어떠한 이유로 본래의 자리를 떠나 이곳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오게 되었을까요? 그 과정을 살펴보면 일제강점기인 1916년 2월 도굴범들이 탑 안에 봉안된 사리장엄구를 훔치려고 탑을 훼손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때 무너진 탑의 부재를 수습하여 1916년 6월 서울 경복궁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이 2005년 현재 위치로 이전 개관하면서 쌍탑 또한 함께 옮겨와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쌍탑에서 발견된 닮은 꼴의 사리장엄구

1916년 갈항사 터 쌍탑을 이전할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기단부 아래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사리를 봉안하는 공간인 사리공은 진흙으로 채워져 있었는데, 두 탑에서 각각 동제 사리호와 금동사리병을 비롯한 다라니 등의 기타 공양품이 발견되었습니다.

갈항사 터 동·서 삼층석탑 사리장엄구(좌: 동탑 출토품, 우: 서탑 출토품), 통일신라 758년경, 높이 15.2cm(서탑 출토 사리호), 보물, 본관3779·3780

갈항사 터 동·서 삼층석탑 사리장엄구(좌: 동탑 출토품, 우: 서탑 출토품), 통일신라 758년경,
높이 15.2cm(서탑 출토 사리호), 보물, 본관3779·3780

각각의 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는 비슷한 형태와 구성을 보이는데, 항아리 모양의 사리기 안에는 정병 모양의 사리병이 각각 들어 있었습니다. 통일신라시대 사리장엄구는 다양한 형태와 재질의 사리기가 확인되지만, 동제 항아리와 금동제 병은 드문 예입니다. 항아리 모양의 사리기는 어깨 부분이 넓고 몸체는 역사다리꼴에 가깝습니다. 특히 뚜껑 꼭지와 뚜껑 연결면 사이의 홈에 금속선을 한 바퀴 감아서 몸체의 고리 구멍에 넣어 뚜껑과 몸체를 고정해 묶었습니다. 이러한 형태의 사리기는 갈항사 터 석탑 사리장엄구 이외에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통일신라시대 뼈항아리로 사용된 연결고리 유개호와 비슷한 형태여서 서로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1. 갈항사 터 동탑 사리호</br>                      2. 뚜껑에 ‘원화십년(元和十年)’이 새겨진 뼈항아리, 통일신라 815년, 높이 19.3cm,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경주424221. 갈항사 터 동탑 사리호
2. 뚜껑에 ‘원화십년(元和十年)’이 새겨진 뼈항아리, 통일신라 815년, 높이 19.3cm,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경주42422

갈항사 터 동탑 사리병(좌), 서탑 사리병(우) 갈항사 터 동탑 사리병(좌), 서탑 사리병(우)
 

금동 사리병은 타원형 몸체에 긴 목이 달렸으며 아래에 굽이 있는 형태입니다. 두 사리병은 기본 형태는 비슷하나 세부 장식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동탑 사리병에는 대나무 마디 형태의 긴 목과 꽃잎 모양 굽이 있으나 서탑 사리병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습니다. 이런 형태의 금동 사리병은 통일신라시대 사리장엄구 중에서 유일한 사례입니다.

탑의 명문으로 살펴보는 사리장엄구 제작 시기

사리장엄구는 대개 탑이 건립되는 시점이나 후대에 탑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봉안되곤 합니다. 사리장엄구의 제작 시기는 대체로 명문이나 기록물을 근거로 추정합니다. 갈항사 터 동·서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 역시 동삼층석탑 상층 기단부에 새겨진 명문을 근거로 제작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데, 그 명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二塔天寶十七年戊戌中立在之 娚女市妹三人業以成在之 娚者零妙寺言寂法師在 女市者照文皇太后君妳在 妹者敬信太王妳在也
“두 탑은 천보(天寶) 17년(758)에 세워졌다. 영묘사(零妙寺)의 언적법사(言寂法師), 큰누이 소문황태후, 작은누이인 경신태왕 이모의 업으로 이루었다.”

소문황태후와 경신태왕은 『삼국사기』에서도 확인되는 인물입니다. 통일신라 38대 왕인 원성왕의 본명은 김경신(金敬信)으로, 경신태왕은 원성왕을 의미하며, 소문황태후는 원성왕의 어머니를 가리킵니다. 명문에서 시호를 사용하지 않고 원성왕 이름을 적은 점으로 보아, 원성왕의 재위 기간인 785~798년 사이에 명문을 새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탑이 세워진 이후에 명문을 새겼지만 이를 통해 758년에 탑을 세웠음을 알 수 있으며, 쌍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 또한 같은 해에 함께 봉안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쌍탑에서 비슷한 형태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된 사례는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등이 전하지만 그 예는 적습니다. 김천 갈항사 터 동·서 삼층석탑 사리장엄구는 쌍탑에서 비슷한 모양으로 나란히 발견되었다는 점 외에도 탑의 명문을 근거로 제작 시기를 파악할 수 있으며, 각각 금속제 항아리와 병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유물입니다.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출처표시+변경금지
국립중앙박물관이(가) 창작한 김천 갈항사 터 동·서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 쌍탑에서 발견된 두 쌍의 사리장엄구 저작물은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출처표시+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