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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북한 국보급 문화재 90점 서울 도착
  • 작성일 2006-05-10
  • 조회수 4837
  • 담당자 고고역사부 오영찬 (s8r+)
 

북한 국보급 문화재 90점 서울 도착

특별전「북녘의 문화유산-평양에서 온 국보들」전시 위해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이건무李健茂)이 평양 조선중앙력사박물관(관장 김송현)으로부터 대여한 북한의 국보급 문화재 90점이 지난 5월 4일 금강산을 거쳐 서울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이번에 평양에서 들여온 북한의 중요 문화재 90점은 오는 6월 12일부터 개최 예정인 「북녘의 문화유산-평양에서 온 국보들」의 특별전에 전시될 예정이다. 이는 지난 3월 24일 개성에서 남북의 양 박물관장이 개최키로 합의한 북한 문화재 전시가 실질적으로 결실을 맺은 것으로, 남북 문화 교류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고려 태조 왕건상을 비롯한 전시품은 평양 조선중앙력사박물관을 출발하여 원산을 거쳐 5월 1일 금강산에 도착되었다. 이어 5월 3일까지 금강산에서 북한 조선중앙력사박물관과 남한 국립중앙박물관 직원 간 유물 확인 및 상태 점검 등의 인수·인계를 위한 작업을 거쳤다. 전시품은 5월 4일 금강산을 출발하여 군사분계선을 넘은 뒤, 통일부·관세청 등의 관계기관 수속을 마치고, 경찰청의 호송 협조를 받아 서울 국립중앙박물관까지 안전하게 이송되었다.

 

이에 앞서 지난 4월 4일에서 4월 8일에는 국립중앙박물관 직원이 해방 이후 최초로 평양 조선중앙력사박물관을 방문하여 유물 실사 및 전시품 내용 등을 협의하였으며 최종적으로 전시품 90점을 확정하였다. 이번 전시에 출품되는 90점 중에는 고려 태조 왕건상을 비롯한 북한의 국보 50점과 고려 금속활자 등 준국보 11점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 외 대부분의 전시품도 학계에서 크게 주목하고 있는 북한의 대표적 유물로 구성되어 있다.

 

「북녘의 문화유산-평양에서 온 국보들」은 국립중앙박물관과 문화방송, 남북역사학자협의회가 공동으로 주최하며, 6월 12일부터 8월 16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그리고 8월 28일부터 10월 26일까지 국립대구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 관련 유물 >>

 

 

1. 독, 평양시 삼석구역 호남리 표대 유적, 신석기시대 후기, 높이 93.5cm, 국보

1994년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 연구소에서 발굴 조사한 평양시 삼석구역 호남리 표대 유적 89호 집자리에서 출토되었다. 간결한 V자 모양에 바닥을 제외한 그릇 전면에 가로로 된 생선뼈무늬(橫走魚骨文)를 새긴 이른바 ‘금탄리Ⅱ식 토기’이다. 바탕흙에는 굵은 모래가 섞여 있다. 무늬는 아가리 바로 아래부터 빼곡히 새겨져 있다. 그릇의 크기는 높이가 90cm 이상으로, 저장용 그릇인 ‘독’으로 분류할 수 있을 만큼 대형이다.

신석기시대 후기가 되면 유적에서 출토되는 농기구의 수와 종류가 증가하고 또한 조, 피 등의 탄화된 곡물도 함께 나온다. 이와 더불어 대형 독의 양도 증가한다. 이러한 유물상의 변화는 생업경제에 있어 농경의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확대되어 가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2. 뼈피리, 함경북도 선봉군 서포항유적, 기원전 2000년기 후반기, 길이 17.3cm, 지름 1cm, 준국보

조류의 다리뼈를 잘라서 만든 피리로, 현재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최고(最古)의 악기이다. 세장한 원통형으로, 가운데가 완전히 관통되어 있고 동체면에 한 줄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13개의 구멍이 뚫려져 있다. 구멍 사이의 간격은 대체로 1cm 내외다. 양끝의 한쪽은 제대로 남아 있고, 다른 한쪽은 좀 파손된 상태로 출토되었다.

함경북도 선봉군(舊 웅기군) 굴포리 서포항동에서 1961년 발굴되었다. 서포항유적은 1960부터 1964년까지 5차에 걸쳐 실시된 발굴조사에서 구석기시대의 2개 문화층과 신석기시대의 5개 문화층, 그리고 청동기시대의 2개의 문화층 등 시기

를 달리하는 9개의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뼈피리는 1호 무덤에서 북쪽으로 3m지점의 청동기시대 제1기층에서 출토되었다. 대체로 기원전 2000년기 후반으로 편년된다.

 

3. 거울 거푸집, 傳 평안남도 맹산군, 청동기시대, 지름 20cm, 준국보

평안남도 맹산군 봉인면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며, 1930년 평양부립박물관을 거쳐 현재 조선중앙력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거푸집의 발견은 청동기의 제작을 알려주는 직접적인 증거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되고 있는 거푸집은 대부분이 활석제인데, 돌이 무르기 때문에 조각하기 쉽고, 주조할 때 터지지 않아 반영구적이며, 표면이 매끄러워 주조된 청동기 표면의 질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거푸집의 경우 앞·뒷면에 각기 다른 형태의 거친무늬 거울의 주형이 새겨져 있다. 앞면에 새겨진 거울은 지름이

17.15cm인데, 2개의 꼭지가 있으며 꼭지 사이에는 구멍을 뚫기 위한 연결부가 잘 남아 있다. 거울의 테두리는 반원형이며 꼭지 반대편에 용액을 주입하는 탕구의 흔적이 남아 있다. 뒷면에 새겨진 거울 주형은 지름이 12.8cm인데, 역시 주형의 한쪽에 치우쳐 2개의 꼭지가 있고 주입구는 역시 그 반대편에 위치하며 테두리도 반원형을 띠고 있다.


4. 쇠칼·칼집, 평양시 낙랑구역 정백동, 기원전 1세기, 길이 47.1cm, 너비 13cm

칼날인 검신(劍身), 손잡이인 검파(劍把), 칼집인 검초(劍鞘)가 완전하게 남아 있다. 먼저 검신은 철제인데, 부식이 심한 상태이다. 칼 손잡이는 목제이며 손잡이 끝에 청동제 검파두식이 결합되어 있고, 반부(盤部)는 결실되었다. 칼집은 기본적으로 옻칠을 입힌 나무 칼집이며, 상·하단과 결입부에 모두 5개의 청동금구로 연결시켜 검파형(劍把形)을 이루고 있다. 청동금구에는 이등변삼각형이 연속된 거치문이 투조되어 있으며, 특히 최하단금구[珌]의 아래 마구리에는 거치문이 반투조상태로 새겨져 있다. 이처럼 한국식동검문화 단계에서 보이는 독특한 칼집은 고조선 후기부터 서북한 지역에서 유행하였으며, 한반도 남부지역에도 영향을 미쳐 창원 다호리유적, 대구 평리동 유적 등 여러 유적에서 확인되고 있다.

 

5. 베개 마구리 장식, 평양시 역포구역 진파리 7호무덤 출토, 고구려 4∼5세기, 길이 22.8㎝, 너비 13㎝, 국보

고구려의 대표적인 금속공예품이다. 전체적으로 복숭아를 절반으로 잘라 옆으로 약간 눕힌 형태를 하고 있는데, 외곽 테와 내부 문양 사이에는 뒷면에서 두드려 볼록하게 만든 원형 장식을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하였다. 중앙에 2겹의 둥근 테두리 속에는 태양을 상징하는 삼족오를 표현하였고, 그 위쪽에는 봉황을, 양 옆으로는 2마리의 용을 표현하였다. 이 장식품은 당초 피장자의 머리부분에서 한 쌍이 출토되어 금동관의 일부로 보기도 하였지만, 최근에는 피장자의 베개(頭枕) 마구리에 장식하였던 금동판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6. 치미, 중국 흑룡강성 영안시 상경용천부 제9절터, 발해 10세기, 높이 91㎝, 너비 91.5㎝, 두께 36㎝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 내에 있는 제9절터에서 출토된 치미이다. 발해의 절터에서 치미가 출토된 예는 다수가 있지만, 이 중 완전히 복원되는 것은 상경성 제1절터와 제9절터에서 출토된 것뿐이다.

이 치미는 진한 녹색의 유약을 바른 것으로, 두 날개에는 각각 17개의 돋을 선을 새겨 새의 깃을 표현하였다. 날개와 몸통 사이에 7개의 구멍을 뚫고, 거기에 머리가 꽃모양으로 생긴 장식을 맞추어 넣었는데, 가운데 꽃술 부분이 둥그스름하게 도드라졌고, 그 둘레에는 다수의 꽃잎을 새겨져 있다. 몸체의 등 부분에는 작은 구멍들이 줄을 맞추어 가면서 수십 개나 뚫려있다. 보기 좋은 곡선을 그리면서 펼친 두 날개 사이로 주둥이를 쑥 내민 형상에 녹색유약이 잘 조화되

어 전반적으로 힘이 있고 세련된 느낌이다. 제1절터에서 출토된 치미는 형태가 약간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같은 양식이다. 안학궁에서 이와 동일한 대형의 치미가 출토되었는데, 이를 통해 고구려와 발해의 문화적 계승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7. 고려 태조 왕건 청동상, 개성시 해선리 현릉, 고려 10세기말-11세기초, 높이 143.5m,  국보

1992년 10월 고려 태조릉인 현릉(顯陵)의 보수 공사 중, 봉분 북쪽 약 5m 지점에서 출토되었다. 발견 초기에는 ‘청동불상’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연구 결과 고려의 태조 왕건의 동상으로 보고 있다. 머리에 왕관을 쓰고 있고, 동상과 함께 발견된 옥띠 장식 등이 왕건의 관에 있던 옥띠 장식품과 재질 및 형태가 동일하며, 결정적으로는 1428년(세종 10년) 태조 왕건의 주상(鑄像)을 능 옆에 묻었다는 조선시대의 기록과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고려 태조 왕건(877~943)은 918년 고려를 세운 후 936년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최초의 임금으로, 죽은 후에도 고려 왕실을 상징하는 신과 같은 존재로 인식되었다. 태조의 제사를 지냈던 봉은사는 국가의 중요 행사가 있을 때마다 고려 국왕이 직접 분향하였다. 태조 왕건상은 봉은사에 모셔졌던 것으로, 양식상 10~11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나신(裸身) 형태의 동상이지만, 머리에는 외관과 내관으로 된 관을 쓰고 있으며, 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발굴 당시 몸을 비롯한 여러 곳에 금도금을 한 조각과 얇은 비단 천들이 붙어 있었는데, 이는 당초에는 몸에 도금(鍍金)을 하였으며, 비단으로 만든 옷을 걸쳤음을 보여준다.

 

8. 공양탑, 개성시 판문군 선죽리 불일사 5층 석탑 내, 고려, 높이 26cm(대), 높이 18.5cm(중), 높이 11.5cm(소), 국보

1960년 개성시 판문군 선죽리 불일사 절터에 있던 5층 석탑의 탑신 내부에서 발견되었다. 당시 석탑 내부에서는 금동탑, 석제 소탑 등 20여점과 청자 사리합, 불경 등이 출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중 금동 9층탑, 금동 5층탑, 금동 3층탑 등 3점이 이번 전시에 출품되었는데, 탑신과 기단부가 별도로 제작되어 조립되도록 되어 있다. 금동 9층탑은 옥개석과 탑신의 세부 표현에서 목탑의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으며, 금동 5층탑에는 옥개석에 매달린 풍경이 7점 현존하고 있으며, 상륜부의 장식도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다. 석탑의 양식을 충실히 모방한 금동 3층탑의 경우 도금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다. 불일사는 고려 광종대인 951년 지은 절로, 현재 절터만 남아 있으며, 5층석탑은 현재 개성시 고려박물관에 이전 복원되어 있다.

 

9. ‘전(方角頁 )’자가 새겨진 활자, 개성시 만월대, 고려, 길이1.3cm, 너비 1cm, 준국보

1958년 개성시 만월대 신봉문 터로부터 서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곳에서 발굴되었다. ‘이마 전 方角頁 '자가 새겨진 이 활자는 활자의 생김새, 글자의 모양, 출토지점 등을 고려할 때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활자로 판단된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복 山+復’자가 새겨진 활자 역시 개성의 개인 무덤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며 고려시대 활자로 알려져 있는데, 글자의 느낌 역시 ‘전’자가 새겨진 활자와 비슷하다.

고려시대에는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에 의한 인쇄가 시작되었으며, 프랑

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은 현재 남아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본으로 1377년에 인쇄되었다. 이규보李奎報(1168~1241)가 지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는 《상정예문詳定禮文》을 금속활자로 찍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직지심체요절》이전에 이미 금속활자를 사용한 출판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활자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복자가 새겨진 활자’와 함께 고려시대 금속활자 기술의 선진성과 우수성을 보여 주는 귀중한 유물로 평가된다.

 

10. 신계사 향로, 강원도 고성군 온정리 신계사, 고려 1352년, 높이 45cm, 지름 44.5cm, 국보

사찰의 불단 앞에 놓여 향을 피우는 데 쓰였던 고려시대 고배형 은입사 향완의 하나로서 몸체와 대부, 전 등을 돌아가며 화려한 문양이 가득 장식되었다. 향완의 몸체에는  여의두문으로 두른 범자문을  4군데에 번갈아 가며 시문하였고, 그 외곽에도 연당초문을 빽빽이 돌아가며 시문하였다. 직선으로 뻗은 몸체 아래에는 굵고 든든한 대부가 달려 있는데, 바로 아래쪽에는 각이 진 방형의 연판(蓮瓣)을 굵은 은입사로 배치하고, 그 내부에는 중첩된 연판문과 꽃술을 장식하여 조금 번잡하게 꾸몄다. 대부 전면을 돌아가며 화려한 연당초문을 은입사 하였으며, 퍼진 짧은 다리에는 노부(爐部)와 동일한 연당초문(蓮唐草文)을 입사하였으나, 옆으로 굴곡을 이루며 전개되어 나갔고 그 크기도 조금 커졌다. 다시 하단부의 몰

딩을 이룬 대부 받침에는 역시 노부 하부에 시문된 운문과 동일한 형태의 운문을 둥글게 돌아가며 은입사를 하였다. 향완의 받침 외연을 돌아가며  ‘ 至正十二年壬辰潤三月日’ 로 시작되는 발원문이 은입사로 기록되었다. 그 제작년대는 고려 1352년으로서, 일본 김용두 씨 소장의 1357년 (恭愍王 6년) 향완과 함께 고려 후기의 귀중한 편년자료로 높이 평가된다.

 

11. 선녀도, 김홍도(金弘道, 1745- ?), 18세기말-19세기초, 비단에 먹․담채(絹本墨筆淡彩), 19×13.2cm, 국보

이 작품은 김홍도만의 활달하고 거침없는 필치가 절제된 묵법 및 담채와 잘 어울려 감칠 맛 나는 회화미를 보여주는 득의작(得意作)이라고 할 수 있다. 화면 오른편 하단에 ‘단원’이라는 묵서와 ‘사능’이라는 주문방인(朱文方印)이 있다. 선녀를 다룬 유사한 소재로는 〈생황을 부는 꼬마 신선仙童吹笙圖〉과 〈밤 피리 부는 신선仙人夜笛圖〉 등이 소개되었지만,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화경(畵境)은 그것을 뛰어넘는 것처럼 보인다. 김홍도의 50대 이후 후기 양식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작품이다.

화면의 인물은 영지선녀이다. 선녀는 오른편 어깨에 괭이를 맨 채 고개를 돌려 왼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등에 진 바구니에 벌써 영지가 가득 차 있는 것으로 미루어 영지를 다 캐고 내려오는 길의 한 순간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후덕한 얼굴에 띄워진 부드러운 미소와 자애로운

눈길은 과연 신선만의 영지를 인간도 먹을 수 있도록 허락하였던 선녀의 고운 마음씨가 그대로 드러나는 듯 하며, 얼굴에 바려진 미묘한 색조의 담채에는 인간을 사랑한 선녀의 애틋한 감정이 묻어나는 듯 하다.

 

12. 붉은 매화, 양기훈(楊基薰, 1843~?), 19세기, 종이에 먹․담채(紙本墨筆淡彩), 134×289.5cm, 국보

석연(石然) 양기훈은 오원 장승업이 서울화단을 주도하던 시기에 평양화단을 이끌었는데, 특히 기러기(蘆雁)로 유명하며 병풍의 대작을 많이 남기고 있다. 이 작품은 10폭 병풍의 대작으로서 제8폭과 9폭에 제화시(題畵詩)와 자신의 관지(款識)가 있어서 양기훈이 그렸음을 확인할 수 있다. 깊은 밤 은은한 달빛을 맞으며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매화나무 위에서 졸고 있는 새 두 마리를 소재로 하고 있다. 양기훈은 조희룡의 장육매화도(丈六梅花圖: 5m가까운 대형매화) 전통에서 비롯된 화려한 장식성과 조선 중기 이래의 ‘나무에서 조는 새(宿鳥圖)’ 전통에서 보이는 고요한 시적 운치를 절충하여 또 다른 화면을 보여주고 있다. 빠르고 거친 필치에도 불구하고 단붓질[沒骨]과 붓날림[飛白]은 전혀 들뜨지 않고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어 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10폭 병풍의 장대한 화면에서 보이는 장식성과 서정성의 절묘한 결합은 당대 평양화단을 대표하는 양기훈의 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작품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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