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 심포지엄 '통일신라 문자의 세계' 유튜브 중계
  • 등록일2020-10-29
  • 조회수1655
  • 담당부서 교육문화교류과

 국립경주박물관(관장 민병찬)은 신라 문화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기 위해 10월 30일(금) 오후(13:00-18:00)에 <심포지엄 통일신라 문자의 세계>를 개최한다. 이 심포지엄을 통해 통일신라시대를 중심으로 금석문, 문서와 목간 등 이 시대 문자자료를 총체적으로 살펴봄으로써 당대 문자문화를 조망할 예정이다.

  강좌는 코로나 예방 대책의 일환으로, 비대면 유튜브 생중계만으로 이뤄진다(https://www.youtube.com/watch?v=ZR1nkBO5VkU). 한편 유튜브 생중계 도중에 심포지엄 내용에 대해 댓글 및 질문을 남기신 분들 중 10분을 추첨하여 기념품과 발표문집을 송부할 예정이다.

남동신(서울대) 교수 등 권위자들의 연구성과 발표

  윤선태 동국대학교 교수, 하시모토 시게루 경북대 교수, 남동신 서울대 교수, 이영호 경북대 교수와 이용현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사가 각각 통일신라의 문서, 목간, 불상조상기, 사리함기와 고승비를 주제로 발표에 나선다. 박남수 동국역사연구소 연구원과 한정호 동국대 교수 등 5명의 학자가 토론하며, 종합토론의 좌장은 주보돈 전 한국고대사학회 회장이 맡는다.


1척×2척 크기의 종이를 제작하여 문서로 사용, 수명이 다한 종이는 포장지로 재활용

  촌락문서연구의 권위자인 윤선태 동국대 교수는 일본 정창원에 남아 있는 촌락문서와 좌파리가반에 부속되어 있는 문서를 분석, 정리하였다.
  종이는 보통 약 30cm×52cm크기인데, 아마도 당나라의 척으로 1척×2척의 크기로 생산하였다고 추산하였다. 또 종이와 종이를 이음새에도 주복해서, 촌락문서는 앞 쪽 종이가 뒷 편 종이 위에 붙여지고, 가반문서는 그와 반대였다고 한다. 또 문서로서 수명을 다한 것은 그 종이가 다시 불하되어 다른 문서나 포장지 등의 용도로 재활용되었다고 한다. 
  종래 연구를 재검검, 집대성한 성과로, 정체되어 있는 이 방면 연구를 재점화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소월리 목간은 촌(村), 배산성지 목간은 군(郡)의 기록

  일본학계에서 한국 목간 연구를 견인하고 있는 하시모토 시게루 경북대 인문학술원 연구교수는 근래 발견된 목간을 기존에 알려진 종이문서와 비교연구를 통해 연구성과를 발표한다.
  최근 발견된 경산 소월리 목간은 토지경작면적을 환산하는데 결부(結負)라는 단위를 쓰고 있는 점, 또 부산 배산성지 목간이 매달 초 곡물을 공진하는 점에 주목하였다. 이에 두 목간이 각각 신라촌락문서와 좌파리가반부속문서와 그 성격이 비슷하다고 보았다. 소월리 목간은 촌(村)을 단위로 한 공진물과 토지 면적을 기록한 것이고, 배산성지 목간은 군(郡)에서 공진물을 수납하고 기록한 문서라고 결론지었다.
  신출자료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로, 향후 이 방면 연구의 초석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감산사 조상기는 이두를 쓰지 않았다. 아미타불이 미륵보살보다 우위에 있도록 설계되었다

   사상사의 권위자인 남동신 서울대 교수는 통일신라 불상의 대표작인 감산사의 아미타불상과 미륵보살상 조상기를 집중 연구하였다.
  불상을 만든 배경으로 대반열반경 등 경전에 주목하고, 또 일찍부터 인도와 중국에서 효도(孝道)와 연관되어 조상공덕(造像功德)이 활발하였다고 한다. 또 실측 자료에서 아미타가 미륵보살 보다 더 큰 점, 또 기록에서 김지전의 사망을 아미타상 조상기에 추가로 기입한 것 등에 착안하여, 참배자의 시각에서 아미타불상이 미륵보살상보다 위계가 더 높아 보이도록 설계되었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문장이 이두가 아니라고 보고, 찬자가 나마인 총이고, 왕명을 받든이가 승려 경융과 대사 김취원이라는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였다.
  대상 유물의 RTI촬영 결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연구성과로서, 역사연구와 자연과학의 융합적 연구로서 주목된다.


황룡사 찰주 건립일로 4월 초파일을 선택하여, 거국적인 이벤트를 거행하였다

  신라사의 권위자인 이영호 경북대 교수는 황룡사찰주본기를 새롭게 분석하였다. 
  분석을 통해 건립 과정을 단계별로 구분하여,  643년 3월 16일 자장의 건립 건의 이래, 2년간의 공사 준비를 거쳐  645년 3월 기초공사, 4월 8일 찰주 건립, 이듬해 완공의 3단계를 거친 것임을 재확인하였다.
  한편, 찰주 건립일이 4월 8일 초파일이었던 점에 착안하여, 건립 주체인 국가가 공사를 진행하면서 이 날을 특별히 택하여 사리봉안을 진행하면서 거국적 이벤트로서 극적 효과를 추구했다고 보았다.
  특히 중아간 김견기 등을 기인(其人)이하고 표기한 것에 대해 하대 신라 금석문의 용례를 분석하여 이것이 “그 사람”이며, 국왕의 신임을 받은 특별한 사람이라는 신설을 제시하였다.


고승비 건립은 중대 왕릉비 건립의 외연 확대였으며
중앙과 지방의 상호 작용의 일환이었다

  이용현 경주박물관 연구사는 9세기 신라 고승비를 외적으로 분석하였다. 지역적 분포로 보아 대체로 지역 안배가 이뤄졌으며, 국가의 관리와 규제 속에서 탑비가 건립되었다고 하였다.
  특히 고승비가 귀부와 비신, 이수로 구성된 귀부비(龜趺碑)의 형식을 띠고 있는데, 그 기원은 삼국말 중대초에 걸치는 태종무열왕릉비와 유인원기공비에서 찾았다. 중국 당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는 가운데, 당 귀부비 제도가 도입되고, 국왕을 중심으로 건립되던 귀부비가, 9세기 무렵부터 그 외연을 확대하여, 지역 유력 사찰의 고승에게도 허락되었다고 하였다. 아울러, 비문 내용의 서식이나 비석의 크기 등 규모, 또 귀부의 변화 등에 주목하여 9세기 후반부터 규정을 넘어 대형화되는 경향을 전망하면서, 이것이 하대 중앙의 구심력 약화 및 지방의 원심력 강화현상과 비례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 유튜브 검색어 : 국립경주박물관 신라학 심포지엄
▲ 유튜브 주소 : https://www.youtube.com/watch?v=ZR1nkBO5V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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