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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도 국립중앙박물관 기획특별전 “하늘이 내린 재상, 류성룡”
  • 작성일 2007-05-25
  • 조회수 2227
  • 담당자 전시과 박준호 (s8r+)


2007년도 국립중앙박물관 기획특별전
“하늘이 내린 재상, 류성룡”

 

류성룡은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지도자의 상을 제시하였다.

 

류성룡은 공신 초상을 거부하고, 대신 『징비록』을 남겼다.

 

 

  국립중앙박물관(관장 김홍남)은 2007년도 기획특별전 “하늘이 내린 재상, 류성룡”을 5월 29일(화)부터 7월 8일(일)까지 역사관 기획전시실에서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전란에 휩싸인 나라를 이끌어 갔던 명재상이며, 군사 전략가이며, 위대한 학자였던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1542-1607)의 서세 400주기를 기념하여 그의 삶을 조망하고자 마련된 것이다. 이 전시는 크게 류성룡이 어린 시절과 노년을 보냈던 하회 마을에 대한 이야기, 류성룡의 성장 과정과 그 가문의 이야기, 국난을 헤쳐 나가는 영웅의 이야기, 운둔의 길을 걷는 학자의 이야기, 그리고 영웅을 그리워하는 역사 이야기 등 5부로 구성된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하회탈(국보 제121호)과 징비록(국보 제132호), 이순신 장군 장검(보물 제326호) 등 쉽게 접하기 어려운 중요 문화재가 선보이며, 외부에 공개된 바 없는 안동 하회마을의 충효당(류성룡 종가) 소장 유물 모두가 한자리에 전시되는 등 총 120여점이 전시된다.

  1부 전시는 하회 마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하회 마을은 류성룡의 고향이며,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기도 하다. 하회 마을의 별신굿 탈놀이에 쓰이는 하회탈은 특히 한국인의 얼굴을 대표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이번 전시에서는 현존하는 9점의 탈 전체가 최초로 한자리에서 전시된다. 탈놀이의 내용은 지배 계층이었던 양반과 선비의 허위성을 폭로하는 것으로써 양반과 상민의 갈등 관계가 탈놀이를 통해 극화되고 있으며, 당시 피지배계층이었던 서민들의 삶의 애환을 풍자적으로 그리고 있다. 류성룡의 고향이었던 하회마을에서는 탈놀이를 통해 양반과 상민들의 신분적 차이에서 오는 갈등과 불만을 해소하였으며, 서로 조화롭게 공동체 생활을 꾸려 나갈 수 있었다.

  2부는 류성룡의 성장과 그의 가문 이야기이다. 풍산 류씨들이 하회로 들어온 것은 류성룡의 6대조인 류종혜(柳從惠)가 명당을 찾아 풍산에서 하회로 이주하면서부터이다. 하회의 명당에 터를 잡은 류씨 가문은 이때부터 류성룡과 같은 인재를 여럿 배출하였다. 류성룡은 21살에 퇴계 문하에 들어가 그의 학맥을 이었으며, 25살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여러 방면에 능력이 있었던 류성룡은 주요 관직을 거치는 빠른 승진의 길을 걸어갔다.

  3부 영웅의 이야기에서는 류성룡이 입었던 갑주·평양성탈환도·각종 화포·이순신 장군 장검 등을 전시하며, 임진왜란 중에 류성룡이 제시했던 여러 정책과 업적을 보여주는 유물이 소개된다. 류성룡은 전란 중에 도체찰사로 있으면서 군무를 총괄하였고, 명나라 군대를 맞이하였으며, 평양성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 류성룡의 추천으로 정읍현감에서 전라좌수사로 관직이 몇 단계나 크게 올랐다. 이후 전라좌수사가 된 이순신은 일본군의 해상 통로를 봉쇄하여 전쟁의 승기를 잡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4부 은거의 길에는 임진왜란의 참상을 기록한 징비록이 전시된다. 1598년 탄핵으로 정계에서 물러난 류성룡은 고향 하회의 옥연정사로 돌아와서 저술과 제자 양성에 전념하였다. 1604년 임진왜란의 공훈으로 호성공신에 책봉되었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특히 충훈부에서 공신의 초상을 그리기 위해 보낸 화사(畵師)도 공신 책봉을 거절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다시 돌려보냈다. 그리고 그는 지난 전쟁의 참상을 반성하며 후손들이 다시는 전란을 되풀이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징비록』을 저술하였다. 『징비록』의 징비(懲毖)는 『시경(詩經)』의 ‘내 그 징계하는지라, 후환을 삼갈 수 있을까.(予其懲而毖後患)’라는 문구에서 따온 것이다. 결국 『징비록』은 지난날 임진왜란의 상처를 반성하고 앞날을 대비하기 위해 후손에게 남긴 고통의 기록이며, 반성의 기록이었다. 『징비록』은 당시 국정을 총괄하였던 류성룡의 철저한 자기 반성적 저술로, 조선에서도 여러 번 간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침략국이었던 일본에서까지도 널리 출간되었다.

  5부는 영웅을 그리워하는 역사의 이야기이다. 세상을 떠난 류성룡의 업적을 평가하는 여러 기록들이 전시된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정조 임금의 글이다. 정조는 화성을 건설하고, 장용영을 만들며, 여러 현실적인 정책을 구상하면서 류성룡이 전란 중에 추진했었던 여러 정책을 참고했다. 그러면서 정조는 류성룡에 대해 시대를 뛰어넘는 그리움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이번 전시에서는 조선시대의 위대한 재상 류성룡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그가 남긴 여러 역사적 자료를 전시함으로써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진정한 영웅의 역사적 전례를 찾고자 하였다. 그 역사적 전례로써 류성룡은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방면에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 능력은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더욱 빛을 발하였던 것이다.

  이번 전시 기간 중에는 안동의 유교 문화와 관련한 특별 강연회가 마련되어 있다. 6월 23일(토) 오후 1시부터 국립중앙박물관 교육관에서는 『안동 하회마을을 찾아서』의 저자이기도 한 서수용(박약회 감사)의 “왜 안동 하회마을인가”에 대한 특별 강연회와 “안동 하회 풍산류씨가의 전통과 학문”이라는 제목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권오영 교수의 특별 강연이 있을 예정이다.

 

 

 
징비록 <국보 제132호>
<징비록>은 류성룡이 임진왜란 중에 있었던 여러 사건을 정리한 책으로, 전란의 상처를 반성하여 앞으로 닥쳐올 일을 대비하기 위해 지어진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도체찰사와 영의정 등을 지내면서 국정의 요직에 있었기 때문에 전란의 흐름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류성룡이 지은 <징비록>은 그가 접했던 각종 공문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류성룡 개인의 비판적인 평가를 추가하여 왜란의 전반적인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류성룡이 임진왜란 중에 입었던 갑옷과 투구 <보물 제460호>
도체찰사로써 현지에서 전쟁 업무를 총괄한 류성룡이 입던 갑옷과 투구이다. 5월 2일 하루 동안 영의정에 임명되고 파직된 다음 류성룡은 특별한 직함 없이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1592년 12월 평안도 도체찰사로 임명되어 전쟁을 반전시킨 평양성 전투의 승리를 이끌었고, 1593년에는 조명연합군이 남하함에 따라 충청·전라·경상도 도체찰사가 되어 전란을 실질적으로 총괄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어 전시 국정을 총괄하였다.

 
이순신 장군 장검 <보물 제326호>
이순신(李舜臣;1545-1598) 장군이 지녔던 칼로 길이가 197센티미터에 이른다. 류성룡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선조24), 정읍현감(종6품의 벼슬)으로 있던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정3품의 벼슬)에 천거하였다. 이순신은 평소 말과 웃음이 적었고, 원칙에 어긋난 것과는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 그래서 좀처럼 승진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는데, 관직 생활을 시작한지 15년이 지났음에도 현감 벼슬에 만족해야 했던 것이다. 여러 대신들은 이와 같은 고속 승진을 관직의 위계질서를 흩트리는 것으로 보고 시정을 요구하였으나, 선조 임금이 인재의 중요성을 들어 승진을 승낙하였다.

 
하회탈 <국보 제121호>
하회탈은 하회마을의 마을 굿에서 탈놀이에 쓰이던 탈로, 국보 121호이다. 하회탈은 오리나무로 만들어졌으며, 12세기 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탈은 양반·선비·중·백정·초랭이·할미·이매·부네·각시·총각·떡다리·별채 등 12개와 동물 형상을 한 암주지·숫주지 2개가 있었는데, 총각·떡다리·별채는 분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명나라 이여송 장군이 시를 써서 류성룡에게 준 부채 <보물 제160호>
명나라 지원 부대가 대거 조선으로 투입되고 있는 시기에 류성룡은 평안도 지역의 최고 군령권자인 도체찰사에 임명되었다. 류성룡은  조명연합군의 평양성 탈환 작전을 성공리에 수행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 기틀을 마련하였다.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이 4만 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안주(安州)까지 내려왔을때 류성룡은 이여송을 찾아와 평양 지도를 꺼내어 그 지형의 특징과 평양에 있는 일본군의 형세를 자세히 알려주었다. 이에 이여송은 “적이 내 눈에 환하게 보인다.”고 하였다. 얼마 후 이여송은 부채에 시를 써서 류성룡에게 보내주었다.

 
동래부서 송상현의 순절도 <보물 제392호>
1592년 4월 15일 동래부에서 벌어진 전투 장면을 그린 기록화이다. 일본군은 약 2만의 군대로 동래성을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부산성에서 군관민이 용감히 맞서 싸웠듯이, 동래성에서도 동래부사 송상현의 지휘하에 군관민이 합심하여 끝까지 저항하였다. 『징비록』에는 동래부서 송상현의 순절과 도망가는 이각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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