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듣고보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철불
  • 등록일2022-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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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보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철불 수어영상

 [듣고보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철불



<자막>

오늘 만날 문화재는 고려시대의 두 불상입니다. 광주 하사창동 철불과 서산 보원사 터 철불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나라 철불은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전기에 많이 만들어져, 현재 70여 점 정도가 알려져 있습니다. 철은 완성된 표면이 거칠고 온도가 내려가면 금방 굳어버리기 때문에 불상을 제작하는 데에 많이 쓰이지 않는 재료였습니다.

 

철불이 많이 제작된 9세기에서 10세기는 불상의 주재료로 쓰였던 동의 수입과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중국 당나라에서 유학한 승려들에 의해 거부감 없이 철불을 수용하게 되었습니다. 후삼국기 통일 전쟁을 치루면서 전쟁무기인 철을 친숙하게 다룰 수 있었던 것도 철불 제작의 요인이 되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경기도 광주와 개성, 강원도 원주와 철원 등은 철 산지인 충주와 남한강 수로로 연결된 곳이어서 이 지역을 중심으로 철불이 제작됩니다.
광주 하사창동 철불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철불 중 가장 크기가 큽니다. 높이는 2.8미터이고, 무게는 무려 6.2톤에 달합니다. 옛날 불단에 봉안된 철불을 바라본 예배자가 느꼈을 높이는 아마도 4미터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당당한 어깨와 장중한 체구, 쇠의 묵직한 느낌은 그 앞에 서 있는 자를 압도하였을 것입니다.

 

이 거대한 불상은 통일신라 석굴암 불상과 모습이 비슷합니다. 땅의 신을 불러 부처가 깨달은 것이 진리임을 증명하고자 한 항마촉지인 손 모양을 비롯하여, 한쪽 어깨를 드러낸 법의와, 무릎 앞에 펼쳐진 부채꼴의 주름은 석굴암 불상과 매우 유사합니다. 이 불상을 통해 통일신라 문화를 수용하면서도 외향적이고 진취적이었던 고려 문화를 엿보게 합니다.

 

이 불상이 발견된 곳은 경기도 하남시 하사창동의 한 절터였습니다. 이곳은 고려시대에는 광주(廣州) 지역이었습니다. 학계에서는 고려 초 이 지역의 유력한 호족인 왕규(王規)를 주목합니다. 왕규는 태조와 혜종 2대에 걸쳐 국왕의 장인이 되었을 정도로 광주 지역의 세력가였습니다. 이에 따라 이 불상의 제작 시기를 왕규의 활동시기인 10세기 전반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서산 보원사지 철불은 고려 초 보원사에서 활약했던 화엄종 승려 탄문(坦文, 900~975년)의 발원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보원사 터에 전하고 있는 탄문 국사의 비문에 의하면, 탄문은 광종이 즉위하자 왕의 만수무강을 위해 석가삼존상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철불상은 바로 그 석가불상으로 추정됩니다.

 

이 불상은 몸에 비해 머리가 크고, 목은 굵고 어깨는 좁은 형태입니다. 눈이 옆으로 길고, 코의 폭이 좁으며, 입술이 얇습니다. 또 왼팔이 접히는 곳에 리본 형태의 옷 주름을 새겼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강원도 원주에서 발견된 철불과 매우 닮아있습니다. 아마도 같은 공방이거나 같은 제작 집단이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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