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반차도열람>
전체>효명세자책례도감의궤
* 색인어를 클릭해 보세요
- 가귀선인기(駕龜仙人旗)
- 가귀선인기(駕龜仙人旗)
- 각단기(角端旗)
- 각단기(角端旗)
- 감역관(監役官)
- 감조관(監造官)
- 감조관(監造官)
- 감조관(監造官)
- 거안집사(擧案執事)
- 거안집사(擧案執事)
- 거안집사(擧案執事)
- 거안집사(擧案執事)
- 거안집사(擧案執事)
- 고(鼓)
- 교명요여(敎命腰輿)
- 교명집사(敎命執事)
- 궐달마(闕闥馬)
- 궐달마(闕闥馬)
- 금(金)
- 금등자(金鐙子)
- 금등자(金鐙子)
- 금등자(金鐙子)
- 금등자(金鐙子)
- 금월부(金鉞斧)
- 금월부(金鉞斧)
- 금입과(金立瓜)
- 금장도(金粧刀)
- 금횡과(金橫瓜)
- 금횡과(金橫瓜)
- 기린기(麒麟旗)
- 기린기(麒麟旗)
- 낭청(郎廳)
- 낭청(郎廳)
- 당부관(當部官)
- 도제조(都提調)
- 도청(都廳)
- 독책안(讀冊案)
- 독책안집사(讀冊案執事)
- 모절(旄節)
- 모절(旄節)
- 배안상(排案牀)
- 배안상(排案牀)
- 배안상(排案牀)
- 백택기(白澤旗)
- 백택기(白澤旗)
- 백택기(白澤旗)
- 백택기(白澤旗)
- 백학기(白鶴旗)
- 벽봉기(碧鳳旗)
- 벽봉기(碧鳳旗)
- 별감(別監)
- 별감(別監)
- 별감(別監)
- 별감(別監)
- 봉선(鳳扇)
- 봉선(鳳扇)
- 사령(使令)
- 사령(使令)
- 사령(使令)
- 사령(使令)
- 삼각기(三角旗)
- 삼각기(三角旗)
- 서리(書吏)
- 서리(書吏)
- 악공(樂工)
- 악공(樂工)
- 연(輦)
- 영자기(令字旗)
- 영자기(令字旗)
- 오장차비(烏杖差備)
- 오장차비(烏杖差備)
- 오장차비(烏杖差備)
- 오장차비(烏杖差備)
- 옥인집사(玉印執事)
- 옥인채여(玉印彩輿)
- 욕석(褥席)
- 욕석(褥席)
- 욕석(褥席)
- 욕석(褥席)
- 욕석집사(褥席執事)
- 욕석집사(褥席執事)
- 욕석집사(褥席執事)
- 웅골타(熊骨朶)
- 월도차비(月刀差備)
- 월도차비(月刀差備)
- 은등자(銀鐙子)
- 은등자(銀鐙子)
- 은등자(銀鐙子)
- 은등자(銀鐙子)
- 은입과(銀立瓜)
- 은입과(銀立瓜)
- 은입과(銀立瓜)
- 은장도(銀粧刀)
- 은횡과(銀橫瓜)
- 은횡과(銀橫瓜)
- 의장낭청(儀仗郎廳)
- 의장낭청(儀仗郎廳)
- 인마(印馬)
- 작선(雀扇)
- 작선(雀扇)
- 작선(雀扇)
- 작선(雀扇)
- 작선(雀扇)
- 작선(雀扇)
- 장마(仗馬)
- 장마(仗馬)
- 전악(典樂)
- 정(旌)
- 정(旌)
- 제조(提調)
- 제조(提調)
- 주작기(朱雀旗)
- 주작기(朱雀旗)
- 죽책집사(竹冊執事)
- 죽책채여(竹冊彩輿)
- 청개(靑蓋)
- 청개(靑蓋)
- 청선(靑扇)
- 청선(靑扇)
- 청양산(靑陽繖)
- 청일산(靑日傘)
- 평교자(平轎子)
- 표골타(豹骨朶)
- 향정(香亭)
- 현학기(玄鶴旗)
- 홍개(紅蓋)
- 홍개(紅蓋)
- 흑개(黑蓋)
- 흑개(黑蓋)
1812년(순조 12) 5월~7월에 순조(純祖)의 맏아들 영(旲, 1809~1830)을 왕세자로 책봉하는 과정을 기록한 『효명세자책례도감의궤(孝明世子冊禮都監儀軌)』에 수록된 반차도이다. 세자는 순원왕후 김씨(純元王后 金氏) 소생으로 당시 4살이었다. 5월 1일 세자 책봉을 위한 도감이 구성되어 7월 6일 책봉의식이 거행되었다. 당일 순조는 창덕궁 인정전에서 세자가 참석하지 않은 권정례(權停例)로 책봉의식을 행하고, 정사 김재찬(金載瓚), 부사 홍명호(洪明浩)를 희정당으로 보내 교명함과 책함, 인수(印綬)를 전하는 수책례를 행하였다. 왕세자는 1827년(순조 27)부터 순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하다가 1830년(순조 30)에 훙서하였고 사후에 효명(孝明)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도감에서는 예행연습이 있기 전인 6월 19일 전례(前例)에 따라 책례 시 반차도를 제작하여 순조에게 올렸다. 반차도의 내용은 도감에서 제작한 교명·책·인을 절차에 따라 대궐로 들여오는 행렬을 순서대로 그린 것이다. 행렬은 당부(當部)의 관원이 선도하고 세의장(細儀仗)과 고취(鼓吹)를 진열한 가운데 교명·죽책·옥인을 모신 가마가 서고, 이어 평교자, 궐달마, 왕세자의 연, 왕세자의 의장이 나아가고 도제조 이하 도감 관원들이 조복을 갖춰 입고 뒤따르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 각 가마 뒤에는 의물을 담당하는 집사들이 조복을 입고 배진하였다. 책봉을 할 때에는 교명·책·인 외에 왕세자가 탈 평교자와 연 및 의장을 함께 제작하였기 때문에 같이 대궐로 들여온 것이다. 당시 반차도는 의식 절차 전반을 관장한 도감 일방에서 제작하였는데, 교명과 책·인을 내입할 때 “반차도에 따라 배진”해 온다고 하여 책례 시 반차도의 성격을 명확히 밝혀놓았다.
이 반차도는 책봉의식 후 제작된 의궤 8건 중 어람용 의궤에 수록된 반차도이다. 사고에 분상된 일반 의궤의 반차도와 비교하면 행렬의 구성은 동일하나 각 면에 배치한 상의 수에 약간 차이가 있다. 이 반차도는 어람용이지만 도장[印刻]을 활용하여 제작하였는데 이는 19세기 어람용 의궤 반차도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던 방식이다. 대신 어람용 반차도에서는 관원의 금관조복과 채여 및 요여, 왕세자 연의 세부 문양을 좀 더 정밀하게 묘사한 점이 돋보인다. 행렬 앞에 세의장을 배치한 것은 정조 대 『문효세자책례도감의궤』 반차도의 예를 따랐으나 선도하는 금부도사 2인이 빠지고 왕세자 의장이 연 다음에 위치하여 차이를 보인다. 왕세자의 실제 행렬이 아니었으므로 왕세자 의물 중 중요도가 높은 순서대로 배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송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