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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수도란?
왕이나 왕비의 무덤을 조성한 기록인 산릉도감의궤에는 사수도(四獸圖)가 수록되어 있다. 사수(四獸)란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작(朱雀), 현무(玄武)를 뜻한다.
의궤에 기록된 사수도를 통해 삼국시대 고분벽화에서 보이는 사신도(四神圖)의 오랜 전통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사수도는 산릉 조성 당시 동원된 화원화가가 그렸고 의궤에 수록되어 제작 연대를 알 수 있으므로, 시대에 다른 양식적 변천에 대한 파악뿐만 아니라 동시대 회화사 연구에도 중요한 하나의 단서가 된다.
의궤에 기록된 사수도를 통해 삼국시대 고분벽화에서 보이는 사신도(四神圖)의 오랜 전통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사수도는 산릉 조성 당시 동원된 화원화가가 그렸고 의궤에 수록되어 제작 연대를 알 수 있으므로, 시대에 다른 양식적 변천에 대한 파악뿐만 아니라 동시대 회화사 연구에도 중요한 하나의 단서가 된다.
죽은 자의 수호신, 사수
사수에 속하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는 신령스러운 상상의 동물로, 죽은 자의 공간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고 인식되었다. 청룡은 동쪽, 백호는 서쪽, 주작은 남쪽, 현무는 북쪽을 상징하였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강서대묘와 같이 무덤 내부 벽의 동서남북 네 벽에, 고려시대에는 석관의 바깥쪽 네 면에 십이지상과 함께 사신도를 그리거나 새겨 넣었다.
01 ㅣ 청룡 – 강서대묘 (고구려)
02 ㅣ 청룡 – 사신문 석관 (고려)
조선시대에는 ‘사신(四神)’보다는 ‘사수(四獸)’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하였다. 또한, 묘제(墓制)가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벽화가 불가능한 구조였고 주로 목관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수도의 전통이 이어졌다. 즉, 관을 임시로 모셔두는 집 모양의 구조물인 찬궁(欑宮) 내부의 네 벽에 그림을 그려 붙였던 것이다. 찬궁은 장례를 마친 후 태워버리므로 실제 장례에 사용되었던 사수도는 남아있지 않으며, 산릉도감의궤에 기록된 사수도만 남게 되었다.
03 ㅣ 찬궁도 – 익종수릉천봉산릉도감의궤 (1846)
사수의 모양과 특징
의궤의 사수도는 기본적으로 청룡은 청색, 백호는 흰색, 주작은 붉은 색, 현무는 남색이나 검은색을 주조로 하였으며, 몸의 무늬나 여백의 문양 등은 화려한 채색으로 장식하였다.
청룡은 상상의 동물로 사지를 갖춘 뱀의 몸통에 사슴의 뿔, 말의 얼굴, 물고기의 비늘 등 여러 동물의 특징이 합성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구도는 일자형, 말발굽(⊃)형, S자형 등 시기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지만 대체로 도상에 큰 변화가 없다.
백호는 일반적으로 얼룩무늬에 화염문 갈퀴를 단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시기에 따라 현실적인 흰 호랑이의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또 모습, 자세, 머리와 꼬리의 방향 등이 다양하게 나타나 사수 중 가장 변화상이 많다.
주작은 전통적으로 봉황의 모습과 유사하게 표현되었지만, 의궤에 수록된 주작은 이와 완전히 다르다. 주작은 머리와 다리가 각각 세 개씩 달리고 날개를 펼친 새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는 조선시대 이전에는 볼 수 없는 도상이다.
현무는 대체로 거북의 몸을 뱀이 휘감은 형태로 그려졌다.
백호는 일반적으로 얼룩무늬에 화염문 갈퀴를 단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시기에 따라 현실적인 흰 호랑이의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또 모습, 자세, 머리와 꼬리의 방향 등이 다양하게 나타나 사수 중 가장 변화상이 많다.
주작은 전통적으로 봉황의 모습과 유사하게 표현되었지만, 의궤에 수록된 주작은 이와 완전히 다르다. 주작은 머리와 다리가 각각 세 개씩 달리고 날개를 펼친 새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는 조선시대 이전에는 볼 수 없는 도상이다.
현무는 대체로 거북의 몸을 뱀이 휘감은 형태로 그려졌다.
04 ㅣ 청룡 - 인선왕후영릉산릉도감의궤
05 ㅣ 백호 - 인선왕후영릉산릉도감의궤
06 ㅣ 주작 - 인선왕후영릉산릉도감의궤
07 ㅣ 현무 - 인선왕후영릉산릉도감의궤
사수도의 변천
현재 남아 있는 사수도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선조목릉천장산릉도감의궤(宣祖穆陵遷葬山陵都監儀軌)』(1630)에 수록된 것이다. 1776년의 『영조원릉산릉도감의궤(英祖元陵山陵都監儀軌)』까지는 사수도가 의궤의 첫 부분에 그려졌고, 그 이후부터는 책 중간에 있는 「조성조(造成條)」의 ‘도설’ 부분에 그려졌다.
『선조목릉천장산릉도감의궤』의 사수도는 조선 초부터 17세기 초반까지의 양식을 반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청룡과 백호는 가로로 긴 화면에 일자형으로 그렸는데, 청룡은 우향, 화염문 갈퀴를 단 백호는 좌향을 한 모습이다. 삼두삼족(三頭三足)의 주작과 거북과 뱀이 얽힌 모양의 현무는 세로로 긴 화면에 그려져 있다. 또 여백에 아무런 장식 문양이 없다.
『선조목릉천장산릉도감의궤』의 사수도는 조선 초부터 17세기 초반까지의 양식을 반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청룡과 백호는 가로로 긴 화면에 일자형으로 그렸는데, 청룡은 우향, 화염문 갈퀴를 단 백호는 좌향을 한 모습이다. 삼두삼족(三頭三足)의 주작과 거북과 뱀이 얽힌 모양의 현무는 세로로 긴 화면에 그려져 있다. 또 여백에 아무런 장식 문양이 없다.
08 ㅣ 청룡 - 선조목릉천장산릉도감의궤
09 ㅣ 백호 - 선조목릉천장산릉도감의궤
10 ㅣ 주작 - 선조목릉천장산릉도감의궤
11 ㅣ 현무 - 선조목릉천장산릉도감의궤
17세기 중반 이후에는 도상에 몇 가지 변화가 생기는데, 우선 청룡은 일자형에서 말발굽(⊃)형의 자세를 취해 세로로 긴 화면에 알맞게 배치되어 훨씬 역동적인 느낌을 주며, 여백은 구름과 화염보주(火焰寶珠) 등의 문양으로 장식하였다. 백호 역시 세로로 긴 화면에 맞게 배치되었는데, 화염문 갈퀴가 없는 현실적 호랑이가 앉아 있는 형태와 머리를 왼쪽으로 두고 어깨에 화염문 갈퀴가 있는 호랑이의 형태 두 가지가 모두 나타난다. 18세기 이후에는 백호가 앞으로 걸어 나오는 듯한 자세가 일반화되었으며 화염문 갈퀴는 남아 있다. 주작은 전체적인 틀은 유사하되 날개의 줄무늬나 꼬리 등 세부 표현이 간략화되었으며, 현무는 기본 도상에서 큰 변화가 없다. 『숙종명릉산릉도감의궤』(1720)의 사수도에도 이러한 특징이 잘 나타났다.
12 ㅣ 청룡 - 숙종명릉산릉도감의궤
13 ㅣ 백호 - 숙종명릉산릉도감의궤
14 ㅣ 주작 - 숙종명릉산릉도감의궤
15 ㅣ 현무 - 숙종명릉산릉도감의궤
사수도 전반에 걸쳐 가장 큰 변화를 보인 것은 『정성왕후홍릉산릉도감의궤』(1725)와 『인원왕후명릉산릉도감의궤』(1725) 이다. 두 의궤의 사수도는 거의 유사한 양식을 보이는데, 청룡은 S자형으로 바뀌어 움직임이 훨씬 강조되었으며 색채나 문양이 더욱 화려해졌다. 백호는 동세는 변화가 없으나 양 어깨의 화염문 갈퀴가 사라져 신비함 대신 현실성을 강조하였다. 특히 주작은 삼두삼족의 형태에서 붉은 색을 띈 참새와 같은 모양의 날아가는 새로 표현되었다. 현무는 본체의 몸을 휘감고 있던 뱀이 사라져 거북과 유사하게 표현되었다. 즉, 추상적이고 신비한 요소를 제거하고 보다 현실적인 도상으로 변화한 것이다. 이러한 사수도의 양식은 이후 제작된 의궤의 사수도에서도 유지되었다.
16 ㅣ 청룡 - 인원왕후명릉산릉도감의궤
17 ㅣ 백호 - 인원왕후명릉산릉도감의궤
18 ㅣ 주작 - 인원왕후명릉산릉도감의궤
19 ㅣ 현무 - 인원왕후명릉산릉도감의궤
- 더 알아보기
- 『국조오례의』(국역본), 법제처(1981)
- 『인조산릉도감의궤』(영인본), 한국학중앙연구원(2007)
- 『다시 보는 역사 편지, 고려묘지명』, 국립중앙박물관(2006)
- 『145년 만의 귀환 외규장각 의궤』, 국립중앙박물관(2011)
- 강관식, 「진경시대 후기 화원화의 시각적 사실성」, 『간송문화』49(1995)
- 전호태, 『고구려 고분벽화의 세계』, 서울대학교출판부(2004)
- 윤진영, 「조선왕조 산릉도감의궤의 사수도」, 『인조산릉도감의궤』, 한국학중앙연구원(2007)
- 이성미, 「외규장각 의궤의 문화사적 의의」, 『145년 만의 귀환 외규장각 의궤』, 국립중앙박물관(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