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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장렬왕후가례도감의궤(仁祖莊烈王后嘉禮都監儀軌) 상세보기 이전으로 설명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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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8년(인조 16) 12월에 인조(仁祖, 1595~1649, 재위 1623~1649)가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조창원(趙昌遠)의 딸을 계비(장렬왕후(莊烈王后), 1624~1688)로 맞는 과정을 기록한 『인조장렬왕후가례도감의궤』에 수록된 반차도이다. 10월 26일 삼간택에서 뽑힌 신부는 별궁인 어의동(於義洞) 봉림대군가로 나아가 궁중 법도와 가례의식 절차를 미리 익히고 납채·납징·고기·책봉 의식을 치렀다. 이어 12월 3일 신랑인 인조가 어의동 본궁으로 가서 친영의식을 치르고 가례의 마지막 절차인 동뢰연을 위해 신부를 맞아 대궐로 나아갔는데 당시 신부 행렬의 반차를 그린 것이다. 반차도 앞에 ‘중궁전자별궁예궐시반차도(中宮殿自別宮詣闕時班次圖)’라고 써서 신부인 중궁전이 별궁에서 대궐로 나아갈 때의 행렬을 그린 반차도임을 밝혀 놓았다. 친영의식 후 대궐로 나아갈 때에는 인조가 앞서 환궁하고 신부의 행렬이 이어졌는데 국왕 행렬의 반차도는 그려지지 않았다.
왕비의 예궐 행렬은 훈련도감 포살수(砲殺手)로 이루어진 시위대가 앞서고 근장(近仗)군사가 길을 인도하는 가운데 왕비 책봉 시에 받은 의물(儀物)인 교명(敎命)·옥책(玉冊)·금보(金寶)·명복(命服)을 봉안한 가마(교명과 명복은 채여에, 옥책과 금보는 요여에 모심)가 차례대로 나아가고, 이어 좌우에 의장기를 진열하고 왕비가 탄 연(輦), 연 뒤에 따르는 군관과 도감 관원, 후미에서 시위하는 훈련도감 포살수 부대로 편성되었다. 신부 연 앞에 초롱 3쌍을 밝히고 좌우에 상궁과 시녀들이 말을 타고 시위하였다.
왕비의 의장은 실제 규정보다 적은 34자루와 주장(朱杖) 20개가 제작되었으나 그마저도 줄여 16자루만 그렸으며 신부 행렬 앞에 두던 행악(行樂)도 생략되었다. 또한 예물을 머리에 이거나 지게에 진 시녀와 지게꾼의 행렬, 신부 연 앞에서 부용향(芙蓉香)을 피우면서 가던 행렬, 신부를 따르던 유모와 나인 등의 행렬도 빠져 있다. 병자호란 직후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의례를 간소하게 치른 데다 참고할 국가의 전적(典籍)이 흩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소략한 반차도가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 반차도의 행렬은 1627년(인조 5) 소현세자(昭顯世子) 가례 때의 반차도와 비슷하다.
반차도는 인물이나 가마와 의장 등을 화원이 일일이 그려서 제작하였다. 시위군사나 의장수, 가마꾼 등 인물은 윤곽선 위주로 간략하게 묘사하고 옅은 채색으로 대충 처리한 반면, 교명·옥책·금보·명복을 모신 요여와 채여, 왕비의 연 등 가마류는 입체형으로 정성껏 묘사하고 지붕과 처마 장식 및 문양 등의 세부를 신경 써서 묘사하였다. 또한 보행하는 인물보다 말 탄 인물들이 좀 더 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현재 확인된 왕비의 가례 관련 반차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송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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