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창 외 13인, 《서화첩》, 1918년, 종이에 엷은 색, 12×18cm, 구9994
한 손바닥에 쥘 수 있는 크기의 작은 화첩에 여러 사람의 그림과 글씨가 담겨 있습니다. 표지에는 단정한 전서체(篆書體)로 ‘서화첩(書畫帖)’이라는 제목이 쓰여 있고 ‘세창(世昌)’, ‘위창(葦滄)’이라는 도장이 찍혀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 1864~1953)이 만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표지를 넘기면 모두 14명에 이르는 우리 근대 서화가들의 글씨와 그림들이 화면 앞뒤로 병풍처럼 펼쳐집니다.
심전(心田)에서 청전(靑田)까지
첫 화면에는 영친왕(英親王)의 서화 스승이었으며 천연당사진관(天然堂寫眞館)을 운영했던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63~ 1933)의 대나무 그림이 있습니다. 잎이 다 떨어진 고목과 정자가 있는 풍경에 옅은 채색을 가미해 맑은 느낌으로 그린 산수화는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 활동했던 춘곡 고희동(春谷 高羲東, 1886-1965)의 작품입니다. 유학 이전부터 심전 안중식(心田 安中植, 1861~1919)으로부터 서화를 배웠던 그는 서양화가로 활동하면서도 서화가들과 교유(交遊)하며 서화가로서 정체성도 유지해갔습니다. 소림 조석진(小琳 趙錫晉, 1853~1920), 석지 채용신(石芝 蔡龍臣, 1850~1941)과 함께 1900년 태조어진(太祖御眞)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던 위사 강필주(渭士 姜弼周, 1850년대~1930년대 이후)는 인물과 영모(翎毛), 화훼 등 여러 소재의 그림을 잘 그렸습니다. 중국 당나라 시대의 시인 이백(李白, 701~762)의 시 중 한 구절, “布帆無恙挂秋風(돛배는 순조롭게 가을바람을 맞네)을 인용한 그의 작품에는 가을날 배를 타고 강을 내려가는 서정적인 풍경이 담겨 있습니다.
이 작은 화첩 속에 스승과 제자들의 작품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것도 눈에 띕니다. 김규진으로부터 서화를 배우고 이후 서화 수집가로도 명성이 높았던 송은 이병직(松隱 李秉直, 1896~1973)은 대담한 구도와 능숙한 필치로 거꾸로 선 대나무를 그렸습니다. 그 옆으로 먹잇감을 노려보는 참새를 화사한 색감으로 그린 무오 이한복(無號 李漢福, 1897~1940), 물기를 잔뜩 머금은 붓으로 툭툭 찍어 산과 강을 담백하게 그린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 1897~1972), 갈대를 물고 있는 두 마리의 게를 그린 관재 이도영(貫齋 李道榮, 1887~1933) 등 안중식과 조석진의 제자이면서 일제강점기 우리 서화계를 이끌어간 인물들의 작품이 이어집니다. 뒷면에는 이들의 스승이면서 조금 더 나이가 많은 위 세대 작가의 작품들이 등장합니다. 물고기와 게 그림을 잘 그렸던 조석진은 집게발을 들고 서로 싸우는 게 두 마리를 생생하게 포착했습니다.
상형문자의 조형미가 잘 드러나는 오세창의 전서 <덕울(德蔚, 덕이 널리 퍼지다)>과 유려한 행서체로 쓴 백당 현재(白堂 玄采, 1886~1925)의 글씨 <서향(書香, 글의 향기)>에서는 대한제국기 언론인과 교육가로서 계몽운동에 투신했던 이들의 고매한 학식과 인품이 드러나는 듯합니다. 뒤이은 우향 정대유(又香 丁大有, 1852~1927)의 글씨 <덕화(德和, 덕이 조화를 이루다)>, 수산 정학수(壽山 丁學秀, 1860년 이전~1920년 이후)의 매화 그림을 비롯하여 청운 강진희(菁雲 姜璡熙, 1851~1919)의 괴석(怪石), 안중식의 단아하면서도 세련된 참새 그림에 이르기까지, 1860년을 전후하여 탄생한 새로운 세대의 서화가들 작품으로 화첩을 꾸몄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유명한 서화가들의 작품이 어떻게 한 화첩에 모이게 되었을까요? 먼저 화첩은 병풍처럼 각 화면이 이어져 있기 때문에 개별 그림들이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그려진 것은 아닐 겁니다. 작은 화면에 수묵이나 옅은 채색으로 가볍게 써 내려간 글씨와 그림들은 오랜 시간 정성을 들인 것이라기보다는 빠르고 즉흥적으로 제작된 듯한 느낌을 줍니다. 자연스럽게 여러 서화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빈 화첩을 돌려가며 자유롭게 그림과 글씨를 쓰는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여러 서화가들이 함께 작품을 제작하는 합작(合作)은 주로 친목을 다지거나 특정 모임을 기념하는 교유의 하나로써 제작되는 경우가 많았고, 여러 작품이 함께 수록된 만큼 선물용으로도 인기가 높았습니다. 특히 서화가들의 결속이 강해지고 집단 활동이 빈번해지던 일제강점기에 많이 제작되어 새로운 창작 방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작품도 이러한 일제강점기 서화 합작 유행의 한 양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중식과 조석진으로부터 이상범과 이한복에 이르기까지 세대를 넘나드는 14명의 서화가들 작품이 모두 한 화첩에 담긴 것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1918년 여름, 태화정
고희동의 그림에 “무오년(1918) 여름, 서화협회 휘호회 자리에서 제작[戊午夏於書畫協會揮毫席上作]”이라고 쓴 글씨가 이 화첩의 제작 배경을 알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입니다. 이한복의 그림에도 “무오년 여름[戊午夏日]”이라고 제작 시기가 쓰여 있어 각 그림이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그려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1918년 7월 23일자 『매일신보(每日申報)』에는 「성황(盛況)의 서화협회(書畫協會) 휘호회(揮毫會)」라는 제목의 기사와 사진이 실려 있어 당시의 정황을 짐작하게 합니다. 기사에 따르면 이날 이문동(현 인사동) 태화정(太華亭)에서 안중식을 비롯해 김규진, 조석진, 정대유, 오세창 등 20여 명의 서화가들이 참여해 즉석에서 그림과 글씨를 선보이는 ‘휘호회’가 열렸고, 행사는 오후 7시가 넘도록 성황리에 개최되었습니다. 종이와 화첩, 부채와 붓, 채색 도구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가운데 여러 명이 함께 있는 사진에서, 북적였던 당시의 행사 분위기를 생생히 느낄 수 있습니다.
「성황의 서화협회 휘호회」 기사 사진, 『매일신보』 (1918년 7월 23일자)
서화협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 단체로서 1918년 5월 안중식, 조석진, 오세창, 김규진, 강진희, 정대유, 이도영 등 당시 내로라하는 13명의 서화가들이 뜻을 모아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초대 회장은 안중식이었고 점차 서양화가들도 참여하는 등 회원 수도 많아졌습니다. 설립 목적은 신구 서화계(新舊書畵界)의 발전, 친선 도모와 연구 활동, 후진 양성, 공중(公衆)의 안목과 취향을 높이는 것[高趣雅想]이었으며 이를 위해 각종 휘호회와 전람회 개최, 주문 제작, 도서 발간, 강습소 운영 등 대중을 상대로 한 여러 사업을 기획하였습니다. 사실 일제강점기 서화가들의 조직적인 움직임은 이미 1910년 강제 병합 직후부터 교육활동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안중식과 조석진은 1911년 서화미술회(書畫美術會) 강습소에서 교수로 참여하여 서화 교육의 대중화를 선도하였고, 새로운 세대의 젊은 서화가들을 길러냈습니다. 1913년 평양에서 결성된 기성서화미술회(箕城書畫美術會) 역시 강습소를 운영했고, 김규진은 서울에서 서화연구회(書畫硏究會)를 열어 후학들을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서화협회는 1910년대 지역과 개인에 따라 분산되었던 서화가들의 활동을 하나로 규합하고 더 큰 규모로 단체 활동을 펼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서화협회와 전람회 시대
서화협회가 추진했던 휘호회나 전람회는 1920년대 이후 우리 서화계의 변화된 모습 중 하나입니다. 휘호회는 즉석에서 창작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서화 감상과 맥을 같이하는 부분이 있지만, 공적 장소에서 완성된 서화를 대중에게 전시하는 전람회는 한정된 공간과 사적인 관계에 기반을 둔 전통적인 서화 창작 및 유통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시도였습니다. 서화협회는 처음 창립 이듬해인 1919년에 전람회 개최를 구상하였으나 3.1운동과 안중식의 서거로 더 이상 추진하지 못했고, 2년 뒤인 1921년에 제1회 서화협회전람회(書畫協會展覽會)를 개최하면서 본격적인 전람회 시대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1922년부터 조선총독부가 개최했던 대규모 공모전인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와 달리 순수 한국인만 참가하는 회원전 성격의 서화협회전람회는 마지막 전람회가 열린 1936년까지 일제강점기 동안 우리 서화의 전통을 이어가는 공간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1921년 서화협회창립기념 휘호회 광경
『매일신보』 (1921년 6월 20일자)
1921년 서화협회창립기념 휘호회 광경
『매일신보』 (1921년 6월 20일자)
서화협회는 서화의 대중화와 서화가들의 결집을 내세우며 의욕적으로 출발했지만 안중식 사후 김규진을 중심으로 한 일군의 서화가들이 탈퇴하며 결속력이 약해졌고, 전람회 역시 초창기와는 달리 점차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조선미술전람회에 밀려 회원들의 참여가 저조해지고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졌습니다. 또한 서화협회의 설립과 운영에 있어 일제강점기 제도권 안에서의 활동을 위해 친일 인사들의 참여를 배제하지 못한 점이 태생적인 한계로 지적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화협회는 일본화가 유입되고 서양화가들이 출현하는 달라진 환경 속에서 전통을 지키고 변화를 모색하면서 새로운 시대에 대응하고자 했던 우리 서화가들의 유일한 결집체였음은 분명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1918년 서화협회 창립 기념 휘호회를 계기로 14명의 우리 근대 서화가들이 모여 함께 만든 이 화첩은 그 의욕적인 출발을 알리는 역사적인 순간의 기록으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