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77년 만의 귀환-국보 제105호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  : 박아연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 통일신라 9세기, 높이 약 4.2m, 국보, 신수18243, 국립진주박물관 야외전시장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 통일신라 9세기, 높이 약 4.2m, 국보,
신수18243, 국립진주박물관 야외전시장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옛 지정번호 국보 제105호)은 총 높이가 약 4.2m로, 9세기 후반 통일신라 석조미술을 대표하는 작품 가운데 하나입니다. 석탑은 2층 기단에 3층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통일신라 양식이며, 상층 기단과 1층 탑신에 신장상(神將像)과 보살상(菩薩像)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어 흥미롭습니다. 석탑의 부재는 대부분 보존 상태가 양호하지만, 꼭대기 장식[相輪部]과 하층 기단 덮개돌[甲石] 아래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섬장암(閃長岩)으로 만들어진 이 석탑은 어두운 회색과 부분적으로 연한 갈색이 잘 어우러져 석조임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질감이 느껴집니다.

석탑은 본래 산청군 범학리의 경호강이 내려다보이는 둔철산 자락 사찰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사찰의 성격이나 연혁을 확인할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석탑이 있었던 절터에 대해서는 범액사(梵額寺), 범학사(泛鶴寺), 범호사(泛虎寺) 등 여러 명칭이 전할 뿐입니다.

정교한 부조상과 석탑의 조화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은 바깥 면에 부조상(浮彫像)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습니다. 통일신라 석탑에는 8세기 후반부터 여러 상들이 본격적으로 부조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석탑에 부조상을 새기는 것은 석탑 외면을 장식하는 장엄(莊嚴)에 의미를 가지며, 탑 안에 봉안된 사리의 수호(守護)와 공양(供養)을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범학리 석탑 상층 기단에는 각 면에 2구씩 총 8구의 신장상이 있고, 1층 탑신의 각 면에는 총 4구의 보살상이 배치되었습니다. 탑의 부조상으로 보살상과 신장상의 조합은 독특한 사례이며, 경남 지역 석탑 중에서 부조상이 새겨진 유일한 탑이기도 합니다.

상층 기단의 신장상은 구름 위에 각기 다른 자세로 앉아 있습니다. 머리에는 빛을 발하는 두광(頭光)을 표현하였으며, 다양한 모양의 투구나 보관(寶冠)를 쓰고 갑옷을 입었습니다. 손에는 5구가 칼, 나머지 3구는 활, 화엄경, 삼지창을 들고 있어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장상은 약간 경직된 표정이지만, 역동적인 자세에 8구가 각기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뛰어난 조형미를 보여줍니다.

 상층 기단 신장상 (왼쪽 위: 동면, 왼쪽 아래: 서면, 오른쪽 위: 남면, 오른쪽 아래: 북면)

상층 기단 신장상 (왼쪽 위: 동면, 왼쪽 아래: 서면, 오른쪽 위: 남면, 오른쪽 아래: 북면)

1층 탑신의 보살상은 머리 주변에 두광이 있으며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연화좌(蓮花座) 위에 앉아 있습니다. 네 보살상 모두 연꽃 등의 지물(持物)을 쥐고 있어 공양하는 보살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장상과 마찬가지로 보살상도 자세와 지물 등을 다채롭게 표현하였습니다.

한편 보살상의 표현에서 흥미로운 점은 바라보고 있는 방향입니다. 석탑의 동쪽 보살상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고, 양 측면인 남쪽과 북쪽의 보살상은 마치 석탑 정면을 향해 공양하듯 측면을 향해 있습니다. 즉 보살상은 탑의 정면을 향해 공양하는 모습을 표현하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1층 탑신 보살상

1층 탑신 보살상

희귀한 암석, 섬장암으로 만들어진 석탑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재질입니다. 국내 석탑의 재질은 대부분 화강암이지만, 범학리 석탑은 암질을 분석한 결과 섬장암으로 밝혀졌습니다. 장석과 각섬석이 주성분인 섬장암은 ‘반짝이는 장석으로 된 암석’이라는 의미로, 화강암보다 부드럽습니다.

섬장암은 국내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지질 분포가 적어 석탑 부재로 사용하는 것은 희귀한 사례이자 범학리 석탑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추가로 섬장암의 산지를 추정하는 연구를 진행한 결과 산청군 범학리 일대에 섬장암이 분포하고 있었고, 범학리 석탑 부재와도 동질성이 높게 나타났습니다. 따라서 산청 범학리 주변의 섬장암을 사용하여 석탑을 조성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에 2018년 국립진주박물관에 재건할 당시 남아 있지 않던 하층 기단 일부 결실된 부분을 동일한 산지의 섬장암으로 복원하였습니다.

기구한 운명, 77년 만의 귀환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지만 일제강점기 이후 기구한 운명으로 여러 이전 과정과 우여곡절을 겪은 문화재 중 하나입니다. 1940년 경남 진주의 정정도(鄭貞道)가 일본인 골동품상 오쿠 지스케[奧治助]의 사주로 허물어져 있던 석탑의 반출을 시행했습니다. 당시에도 문화재 반출은 불법이었기 때문에 그는 주민들에게 반출 사실을 함구할 것을 요청했고 이에 대한 사례로 마을회관 건립비 100엔을 기부했습니다. 석탑의 부재들은 1941년 1월부터 30여 일간 대구로 옮겨져, 동운정에 위치한 이소가이[磯貝]라는 상호의 제면공장(製綿工場) 구내 빈터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조선총독부박물관에 반출 사실이 알려지면서 상태조사가 이루어졌고, 1942년 압수되어 서울의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옮겨졌습니다. 광복 이후 1946년 5월 27일 미군 공병대의 도움을 받아 경복궁 안에 세워졌으나, 1994년 경복궁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다시 해체되어 23년간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2018년, 마침내 범학리 석탑은 고향 경상남도의 국립진주박물관으로 돌아왔습니다. 긴 시간 타지에서 보내온 아픈 시간을 뒤로하고 77년 만의 귀향이었습니다.

이소가이 제면공장(대구) 내 흩어져 있는 석탑 부재(건판29427) 이소가이 제면공장(대구) 내 흩어져 있는 석탑 부재(건판29427)

 1946년 경복궁에 세워진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건판36529) 1946년 경복궁에 세워진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건판36529)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산청 범학리 사찰에 당대의 양식과 정교한 조각 솜씨로 조성된 석탑은 장인(匠人)의 수준과 정성을 짐작하게 합니다. 석탑은 통일신라 때부터 오랜 기간 많은 이들이 예불을 올리고 소망을 기원하는 존재였을 겁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잊힌 존재가 되어 무너져 있기도 하고 떠돌이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역사적 아픔을 간직한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은 역사, 미술사, 보존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연구 자료로서 의미를 지닌 통일신라 대표 문화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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