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정덕십년(正德十年, 1515)의 연도가 새겨진 석조지장보살좌상  :허형욱

16세기 기년작 불교조각의 귀한 사례

조선시대 불교조각은 임진왜란(1592~1598)을 기준으로 크게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기 중 이른 시기인 15세기 작품 중에는 고려시대의 전통을 잇는 우수한 기년작(紀年作, 제작 연도가 기록된 작품)이 많이 남아 있는 편이고. 후기인 17세기부터는 사찰의 조각승이 주축이 되어 전국적으로 토착화·표준화된 양식의 상이 대거 제작되었으며 관련 기록도 풍부합니다. 이에 비해 과도기인 16세기에는 기념작뿐 아니라 확인된 상의 수량이 상대적으로 많지 않아서 불교조각이 전기에서 후기로 변모하는 구체적 양상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16세기의 기년작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글에서 소개하는 1515년(중종 10) 작 석조지장보살상은 제작 연도를 알 수 있는 16세기의 작품으로서 그 자료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1년에 보물(옛 지정번호 보물 제132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지장보살상과 조성기(造成記)

이 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은 특이하게도 바위처럼 울퉁불퉁한 대좌 위에 앉아 있습니다. 한 덩어리의 돌을 깎아 만들었고, 대좌에는 붉은색을 몸체에는 금을 입혔습니다. 머리에는 두건을 썼는데, 귀를 드러냈으며 귀걸이를 착용하였습니다. 몸에는 가사(대의)를 걸쳤고, 그 안쪽에 별도의 윗옷과 하의를 입은 것이 확인됩니다.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얹은 왼손에는 지장보살의 상징인 둥근 보주(寶珠)를 지물(持物)로 들고 있습니다. 머리가 커서 신체 비례는 4등신에 가깝습니다. 어깨가 좁고 하체가 빈약하여 전체적으로 위축된 몸의 표현은 조선시대 불상의 양식적 특징이기도 합니다. 둔중하고 비만한 인상을 주는 이 상은 전북 고창 선운사 성보박물관 소장 조선 15세기 후기의 금동지장보살좌상(옛 지정번호 보물 제279호)과 비슷합니다.

 정덕십년명 석조지장보살좌상(正德十年銘 石造地藏菩薩坐像)

1. 정덕십년명 석조지장보살좌상(正德十年銘 石造地藏菩薩坐像), 조선 1515년, 전체 높이 33.4㎝, 보물, 신수14491
2. 정덕십년명 석조지장보살좌상 옆면
3. 정덕십년명 석조지장보살좌상 상체 부분

이 지장보살좌상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부분은 대좌 뒷면에 8줄 49자로 새겨진 조성기(造成記)입니다.

 정덕십년명 석조지장보살좌상(正德十年銘 石造地藏菩薩坐像)

1. 정덕십년명 석조지장보살좌상 뒷면
2. 정덕십년명 석조지장보살좌상 뒷면 대좌의 명문 부분

<원문>
正德十年乙亥三月/ 造成觀音地藏施/ 金順孫兩主順大保/ 金貴千兩主宋和兩主/ 畵員節 學山人信■/ 助緣比丘/ 智日/ 法俊仁■ (/는 줄바꿈 표시, ■는 판독이 어려운 글자)

<해석>
정덕 10년(1515) 을해년 3월에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조성하였다. 시주자는 김순손 부부, 순대, 김귀천 부부, 송화 부부이다. 상을 만든 이는 화원(畵員) 절학과 산인(山人) 신■이다. 함께 도운 승려는 지일, 법준, 인■이다.

명문(銘文)은 상의 제작과 관련하여 몇 가지 유용한 정보를 알려 줍니다. 이 상은 본래 관음보살상과 한 쌍으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만, 아쉽게도 관음보살상은 전하지 않습니다. 상의 조성 경비를 댄 후원자는 주로 부부들입니다. 제작자인 화원(畫員) 절학(節學)과 산인(山人) 신■(信■)은 승려 장인으로 추정되며, 여기에 지일(智日)을 비롯한 세 명의 승려가 도움을 주었습니다. 부부를 양주(兩主)로, 제작을 맡은 승려 장인을 화원으로 적은 것은 조선 후기 불상 발원문에 자주 보이는 표기법으로 이 상의 과도기적인 성격을 잘 보여 줍니다. 이제 이 상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지장보살 신앙과 도상(圖像)을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지장보살 신앙과 경전

지장(地藏)의 산스크리트어 본명은 ‘크시티가르바(Ksitigarbha)’로서 만물을 감싸 주고 길러 주는 대지의 포용력과 생명력을 뜻합니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불이 열반하고 56억 7천만년 뒤 미래에 미륵불이 오기 전까지, 즉 부처가 없는 시기에 성불(成佛)하지 않고 육도윤회(六道輪迴)하는 모든 중생을 해탈시키겠다는 커다란 원(願)을 세웠다고 하여 대원본존(大願本尊) 보살이라고도 부릅니다. 중국 수당대(隋唐代)에 지장 신앙은 현세를 말법(末法)시대로 규정한 당시 불교의 세계관과 결부되어 크게 유행하였고, 시대가 내려가면서 저승을 관장하는 시왕(十王) 신앙과 결합하여 지장보살이 지옥에 떨어진 중생을 건져 준다는 명부(冥府)의 교주로 믿어지는 등 관련 영역이 점차 확대되었습니다. 지장보살은 아미타불, 약사불, 관음보살과 함께 불교 대중 신앙의 주요 예배 대상으로 확고히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지장 신앙의 근거가 되는 대표적인 한역 경전은 중국 수(隋: 581~617)의 보리등(菩提燈)이 번역했다는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 당(唐) 651년 현장(玄奘) 역 『대승대집지장십륜경(大乘大集地藏十輪經)』, 그리고 당 7세기경 실차난타(實叉難陀) 역으로 알려진 『지장보살본원경(地裝菩薩本願經)』(2권본) 등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7세기에 이미 『점찰선악업보경』에 근거한 점찰법회(占察法會)의 개최와 더불어 지장 신앙이 유입되었고, 통일신라 8세기에는 진표율사(眞表律師)에 의해 지장보살과 미륵보살 신앙이 함께 행해졌습니다. 이 시기에는 현장 역 『대승대집지장십륜경』이 수용되었으며, 지장보살 신앙은 참회와 계율 강조,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비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이와 달리 고려시대에는 죽은 사람의 천도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병을 낫게 해 달라는 치병(治病)의 기원 대상이 되며 많은 상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지장보살상이 제작된 조선 전기에는 『지장보살본원경』(3권본: 명나라의 법등[法燈] 역으로 전함)이 유통되며 지장 신앙 성행에 일조하였습니다. 특히 15세기 왕실에서는 죽은 이를 천도하기 위해 『지장보살본원경』을 인쇄하면서 지장보살상을 조성했다는 기록이 전하고, 한글 창제(1446년) 이후 간행된 불서(佛書)인 『석보상절』(1447년)과 『월인석보』(1459년)에는 『지장보살본원경』의 언해본 일부 또는 전체가 포함되어 지장 신앙의 대중적 확산에 기여했습니다. 총 13품으로 구성된 이 경전의 주요 무대는 수미산 꼭대기의 도리천(忉利天)으로서 지장보살도 이곳에 등장하여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특히 지장보살상을 조성하여 예배·공양하는 사람은 33천(도리천)에 태어나고 악도(惡道)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등 상 조성의 공덕을 중요시했고, 지장보살의 능력이 문수, 보현, 관음 등 다른 보살보다 월등히 뛰어남을 강조하였습니다. 아울러 지장보살을 열심히 믿으면 집안이 평안하거나 소원을 성취한다는 등의 10종류 이익, 의식이 풍족하고 질병이 없으며 재난을 만나지 않는다는 등의 28종류 이익을 말하고 있어 현세이익적인 측면을 포함한 것이 주목됩니다. 지장 신앙 하면 일반적으로 내세와 지옥에서의 구제만을 떠올리기 쉽지만, 육도윤회(六道輪廻)하는 중생 전체에 대한 포괄적 구원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에 약사 신앙이나 관음 신앙 못지않게 이승의 삶에 대해서도 결코 소홀하지 않은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장보살상의 도상적 특징

지장보살상의 가장 큰 도상적 특징은 화려한 세속인의 모습인 다른 보살상들과 달리 출가한 승려의 형상을 띤다는 점입니다. 손에는 보주나 지팡이인 석장(錫杖)을 들기도 합니다. 『대승대집지장십륜경』에서는 지장보살이 성문(聲聞) 즉 출가승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여의주(보주)의 중요성에 대해 여러 차례 설명하고 있어 지장보살 특유의 도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의 석굴암에 보주를 든 삭발형 지장보살상이 제작된 이래 고려시대에는 보주와 석장을 든 모습으로 다수 형상화되었습니다.
조선 전기에도 한동안 고려 지장보살상의 도상적 전통이 이어졌습니다. 세종 때인 1447~1450년에 태종과 그의 비 원경왕후, 소헌왕후(세종의 비)의 명복을 빌기 위해 간행된 『지장보살본원경』(옛 지정번호 보물 제933호, 삼성미술관 Leeum 소장)의 발원문에서 “지장보살의 신통력, 손바닥의 여의(주)가 빛을 발하여 널리 지옥을 비추어 모두 성불케 하고, 육환보장의 미묘한 소리는 무간지옥에 들어가 지옥의 사람 모두를 해탈하게 한다(地藏菩薩神通力 掌中放光如意(珠) 普照地獄 皆成佛 六環寶杖 微妙聲 無間入 人皆解脫).”라고 한 것으로 보아 지장보살의 보주와 석장이 지옥 구제의 상징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장보살상의 머리 모양은 민머리인 삭발형과 두건을 쓴 두건형의 두 종류로 구분됩니다. 두건형 지장보살 도상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두건형이든 삭발형이든 기본적으로 둘 다 출가승의 모습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지장보살상은 통일신라와 고려 전기에 삭발형이 대부분이었고,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에는 두건형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다시 삭발형이 유행하게 되어 시대별로 차이가 있습니다.
지장보살상의 존상 구성 방식도 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홀로 등장하는 독존, 아미타삼존불의 협시보살(아미타불+관음+지장), 명부(冥府)의 여러 권속(眷屬)들과 결합한 지장시왕이 있고, 지장과 관음이 결합된 예도 있습니다. 이 중에서 지장과 관음의 결합은 중국 북송 989년에 찬술된 『지장보살상영험기(地藏菩薩像靈驗記)』에 실린 방광보살상(放光菩薩像)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중국 남조 양(梁)의 화가 장승요(張僧繇)가 한주(漢州)의 선적사(善寂寺)라는 절에 지장과 관음 벽화를 그렸는데 이 상들이 빛을 내뿜으면 나라가 태평하고, 큰 파도가 잠잠해지며, 여인의 안전한 출산에 도움을 주는 등 기이한 일들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에 유행했던 참회 의례집인 『자비도량참법(慈悲道場懺法)』의 칭명염불 마지막 부분에서 무변신(無邊身)보살 즉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이 나란히 등장하는 예가 보입니다. 아울러 1462년(세조 8)에 주조된 흥천사 종의 명문에는 꿈에 관음, 지장 두 보살이 응대하는 기적을 보이자 두 보살상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작품으로는 불화로 일본 교토의 사이후쿠지[西福寺] 소장 고려 14세기 후반의 관음·지장 병립상(竝立像)과 일본 기후현의 아나인[阿名院] 소장 조선 15세기의 관음·지장 병립상 등이 전합니다. 이 자료들이 중국 문헌기록에 나오는 방광보살상인지의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우리나라에서도 지장과 관음이 결합된 도상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관음보살상과 한 쌍을 이루는 정덕십년명 지장보살상도 이러한 존상 구성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나가며

지장보살 신앙과 도상에 대한 내용 검토를 바탕으로 정덕십년명 지장보살상을 다시 살펴보며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먼저 이 상이 앉아 있는 울퉁불퉁한 형태의 대좌는 단순한 바위라기보다 『지장보살본원경』의 주요 무대로 나오는 도리천의 아래, 즉 수미산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정해 봅니다. 불교미술에서 수미산이 위·아래가 넓고 가운데가 좁은 모양으로 형상화되었던 전통을 참고하면, 이 상은 경전에서 말하는 수미산 위의 도리천에 앉은 모습을 나타낸 것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울러 이 상은 16세기에 만들어진 작품답게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에 유행한 두건형 지장보살상의 도상 전통을 따르고 있어서 조선 후기에 삭발형이 나타나기 이전 과도기적인 단계를 보여 줍니다.
이 상의 시주자들은 조성기에 구체적인 발원 내용을 적지 않았습니다. 다만, 죽은 자의 추모에 대한 언급이 없어서 사후 지옥으로부터의 구제뿐만 아니라 이승의 삶과 관련된 무언가를 기원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관음과 한 쌍으로 조성하였으니 방광보살상이라는 이름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렇지 않더라도 지장 신앙 자체에는 현세이익적인 측면이 내재돼 있습니다. 이 지장보살상 제작에 시주한 부부들은 어떤 소원을 빌었을까, 상상의 나래를 펼쳐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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