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유수란

파도치는 물결 위로 솟아오른 암반 위에 관음보살이 앉아 있습니다. 짙은 청색의 천의(天衣)를 걸치고 화려한 보관을 쓴 보살의 뒤로는 초록색 두광(頭光)과 찬란한 신광(身光)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화면 옆쪽에는 두 손을 뻗은 채 보살을 바라보고 있는 작은 동자가 있습니다. 우아한 자태의 관음보살이 그려진 <수월관음도>에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선지식(善知識)을 찾아다니던 선재동자(善財童子)의 기나긴 여정 중 한 장면이 담겨 있습니다.

 의겸(義謙) 등, <수월관음도>, 조선 1730년, 비단에 색, 105.7×143.5cm, 보물, 구9954

의겸(義謙) 등, <수월관음도>, 조선 1730년, 비단에 색, 105.7×143.5cm, 보물,
구9954

가르침을 얻기 위해 선재동자가 찾아간 보살의 정토, 보타락가산

관음보살은 현실에서 마주하는 어려움과 고난에서 사람들을 구원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는 존재입니다. 고통에 허덕이는 중생이 관음보살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그 부름에 응해 중생을 구원해 주었습니다. 경전에 따르면, 자비의 상징이기도 한 관음보살은 인도 남쪽 바다 건너 보타락가산에 머물고 있다고 합니다.
『화엄경(華嚴經)』 「입법계품(入法界品)」에는 진리를 구하기 위해 세상을 돌아다니며 53명의 스승을 만났던 선재동자의 구법(求法) 여행이 적혀 있습니다. 이 가운데 선재동자가 찾아간 스물여덟 번째 스승이 바로 관음보살이었습니다. 선재동자가 도착한 보타락가산의 서쪽 산골짜기에는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나무숲이 우거져 있었으며 가지각색의 아름다운 꽃으로 찬란하게 장엄되어 있었습니다. 관음보살은 암석 위에 앉아 여러 보살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선재동자는 보살 앞에 나아가 예배하고 가르침을 구했습니다. <수월관음도>는 경전에 나온 이 장면을 표현한 그림입니다.

가르침을 전하는 보살에서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보살로

관음보살과 선재동자의 구법 여행을 담은 수월관음도는 중국 당나라의 궁정화가 주방(周坊)이 창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험준한 바위에 앉아 가르침을 구하러 온 선재동자를 바라보는 구도의 수월관음도는 중국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에도 그려졌습니다. 당나라의 장언원(張彦遠)이 서화에 대한 자료를 모아 저술한 『역대명화기(歷代名畫記)』에는 주방의 수월관음도에 표현된 보살의 원광(圓光)과 대나무가 언급되어 있으며, 이는 고려시대 수월관음도에서도 확인됩니다. 이처럼 수월관음도는 동북아시아에서 널리 유행한 관음신앙을 살펴볼 수 있는 그림입니다.
고려시대 수월관음도의 도상(圖像)은 조선시대로 계승되었고, 시간이 지나며 새로운 도상도 등장하게 됩니다. 관음보살 옆에 나타나는 정병 형태의 변화, 새의 등장이 대표적인 예시입니다. 관음보살 옆에는 물줄기가 나오는 입구와 손잡이가 달린 라마교식 정병에 버드나무 가지가 꽂혀 있으며, 주위에 새 한 마리가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일본 다이도쿠지[大德寺] 소장 <수월관음도>처럼 고려시대 수월관음도에도 새가 나타나지만, 조선시대가 되면 새는 정병과 함께 화면의 주요 구성 요소가 됩니다.
또한 자신을 찾아온 선재동자를 그윽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고려시대 수월관음과 달리, 조선시대에는 관음보살에게 공경을 표하고 있는 화면 바깥의 예배자를 바라보는 듯한 정면관(正面觀)으로 많이 그려집니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수월관음도 속 관음보살은 자신에게 도움을 구하는 이들에게 자비롭게 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구도 때문에 예배자는 마주한 관음보살이 직접 자신을 내려다보고 자비를 건네고 있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1. <수월관음도>, 고려 14세기, 비단에 색, 80×42.7㎝, 증9354
관음보살의 붉은 치마에 수놓인 세밀한 귀갑무늬와 연꽃무늬, 보살을 뒤덮은 투명하고 섬세한 베일 표현은 세속을 초월하는 아름다움을 전합니다.
2. 서청(瑞淸) 등, <수월관음도>, 조선 1748년, 비단에 색, 72×54.5cm, 신수14085
넘실대는 파도 위로 솟은 바위에 정면을 향해 앉은 관음보살, 두 손을 합장하고 보살을 바라보는 선재동자, 라마교식 정병과 버드나무 가지 위에 앉은 파란 새 등은 조선시대 수월관음도의 대표적인 구성 요소입니다. 선재동자 맞은편에는 합장한 위태천(韋駄天)이 그려져 있습니다.

조선 후기의 대표 불화승(佛畫僧), 의겸(義謙)의 관음보살

하단의 붉은 화기(畫記)에는 1730년에 불화를 조성했다는 기록과 시주자들, 그리고 실제 그림을 그린 5명의 승려, 의겸·진행(陳行)·행종(幸宗)·채인(采仁)·석인(釋仁)의 이름이 남아 있습니다. 조선시대는 승려이면서 동시에 장인이었던 승장(僧匠)이 활동한 시대였습니다. 사찰의 불상과 불화는 승려로 구성된 집단이 제작했고, 스승과 제자 관계가 형성되며 유파가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이 <수월관음도> 역시 승장이 그린 작품입니다.
참여한 5명 가운데 불화 제작을 이끌었던 것은 바로 첫 번째로 등장하는 의겸입니다. 의겸은 18세기 전반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불화승입니다. 의겸은 ‘호선(毫仙, 붓의 신선)’, ‘존숙(尊宿, 덕이 높고 수행이 뛰어난 승려)’, ‘대정경(大正經, 크고 올바른 도리)’ 등의 존칭을 얻을 정도로 명성을 날렸던 화승입니다. <진주 청곡사 괘불>(1722), <고성 운흥사 괘불>(1730)을 비롯해 고성 운흥사와 공주 갑사의 불사(佛事)를 지휘했고, 순천 송광사 응진당, 여수 흥국사 응진당의 주요 불화 제작에 참여했습니다. 불화뿐만 아니라 의겸이 조성한 관음보살상도 남아 있습니다. 의겸의 작품을 통해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뛰어난 기량을 펼쳤던 조선시대 승려 장인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함께 이름이 남아 있는 행종, 채인 등은 의겸의 다른 불화에서도 확인되어, 이들의 사승(師承) 관계를 알 수 있습니다.
현재 의겸이 그린 수월관음도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수월관음도>를 비롯해 <여수 흥국사 수월관음도>(1723), <고성 운흥사 수월관음도>(1730) 등 세 점이 남아 있습니다. 세 점 모두 관음보살의 자세와 화면 구성 요소가 거의 유사하며, 대나무·정병·선재동자의 배치, 천의 표현, 용왕과 용녀 등 공양자 유무 정도에 차이가 있습니다. 세 점을 비교해 보면 의겸이 한 가지 도상을 나름대로 바꾸어 차용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의겸의 <수월관음도> 화기와 세부

의겸의 <수월관음도> 화기와 세부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출처표시+변경금지
국립중앙박물관이(가) 창작한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 보타락가산(普陀洛迦山)에 머물며 자비를 건네는 관음보살 저작물은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출처표시+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