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에 그린 제갈량 초상

제갈공명(諸葛孔明)으로 널리 알려진 제갈량(諸葛亮, 181~234)은 한나라가 멸망한 뒤 위(魏)・촉(蜀)・오(吳) 세 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각축을 벌이던 시기에 한나라 왕실의 후예임을 내세운 유비(劉備)를 도와 촉나라를 이끈 명재상입니다. 그의 초상은 조선 후기 문인 사회에 팽배해 있던 숭명배청(崇明背淸) 풍조와 군신일체(君臣一體)의 북벌(北伐) 의지를 드러내는 시대의 아이콘으로 오랜 기간 애호되었습니다.

주자학의 발달과 제갈량 숭배의 확산

삼국시대 지략가인 제갈량에 대한 숭배는 남송(南宋) 대에 크게 확대되었습니다. 오랑캐라 여겼던 금나라에 중원(中原)을 빼앗기고 막대한 세폐(歲幣)를 바쳐야 했던 남송 지식인들의 상처받은 자존심은 중원을 호령하던 조조(曹操)의 위나라보다는 변방의 작은 나라였지만 한(漢)나라를 계승한다는 명분을 지켰던 유비의 촉나라와 더 강한 공감대를 형성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남송의 주희(朱熹, 1130~1200)는『통감강목(通鑑綱目)』을 집필하며 춘추대의(春秋大義)에 따라 역대 왕조의 정통성을 가려내어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인 삼강오상(三綱五常)을 확립하고자 했습니다. 그는『자치통감(資治通鑑)』을 펴낸 북송의 사마광(司馬光, 1019~1086)과는 달리 촉나라가 한나라의 역사적 계승자임을 선언하는 ‘촉한정통론(蜀漢正統論)’을 발전시켰습니다. “삼대 이하를 의로써 논한다면 오로지 제갈공명 한 사람만 있을 뿐이다.”(胡廣 等 撰, 『性理大全書』卷63 歷代5 晉 “論三代而下, 以義爲之, 只有一个諸葛孔明.”) 라는 주희의 평가는 바로 이러한 촉한정통론의 발로이며, 아울러 후대 성리학자들이 제갈공명 숭배 풍조를 확산하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고려시대에 성리학과 함께‘촉한정통론’과 제갈공명 숭배 풍조도 수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주희의『통감강목』은 이미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가 언급한 이래로, 조선 초부터 경연(經筵)의 교재로 사용하고 세종 16년(1434)에는 갑인자(甲寅字)로 인출(印出)되어 널리 퍼졌습니다. 고려 말기의 학자 이제현(李齊賢)은 아미산(峨眉山)에 들러 제갈공명을 모신 사당에 참배하기도 했습니다. 제갈공명에 대한 숭배는 조선 후기 들어 급속히 확산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도와준 명나라에 대한 고마운 기억과 병자호란 때 삼전도의 굴욕을 안겨 준 청나라에 대한 반감은 명청(明淸) 교체기에 대세를 따라 청나라를 추종하기보다는 명나라에서 끝나 버린 중화(中華)의 정통을 계승해 오랑캐 북벌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조선중화(朝鮮中華) 의식으로 발전했습니다. 조선 왕실 및 송시열宋時烈(1607~1689)같은 17세기 조선 성리학자들은 비록 나라는 멸망했어도 명분을 지키며 최선을 다했던 촉나라의 제갈량이나 남송의 무장 악비(岳飛, 1103~1142) 같은 인물들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들의 역사적 롤모델을 찾고, 이들을 애국자로 칭송하면서 그 숭배문화가 확산되는 것을 직간접적으로 후원했습니다. 17세기에 존명배청(尊明排淸)과 조선중화 의식의 대두는 이 시기 제갈공명 사당 건립과 초상 제작 및 그가 쓴 출사표(出師表)의 확산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선 후기 제갈량 사당 건립과 초상 안치

조선 최초의 제갈량 사당은 임진왜란 이후 건립되었는데, 이를 주도한 것은 의리와 명분을 강조하며 청나라를 배척하고 북벌을 주장하던 송시열과 그 제자들이었습니다. 일찍이 선조 말년인 계묘년(1603) 또는 을사년(1605)에 임진왜란을 극복하겠다는 뜻을 담아 어명으로 평안도 영유현(永柔縣)에 ‘제갈무후묘(諸葛武侯廟)’를 설립한 이래, 병자호란(1636~1637) 후 이민서(李敏敍, 1633~1688)의 상소를 계기로 현종 8년(1667) 묘호(廟號)를 ‘와룡(臥龍)’이라 사액(賜額)하고, 숙종 12년(1686)에 중건비를 세웠으며, 영조 39년(1763)에는 다시 ‘삼충사(三忠祠)’라 사액하는 등 왕실의 지속적인 후원이 있었습니다. 남양(南陽)의 제갈무후사(諸葛武候祠)는 남양 현감(縣監) 민시중(閔蓍重, 1625~1677)과 시골유생(鄕儒)들이 1666년경 창건했는데, 촉한의 제갈량과 남송의 호안국(胡安國, 1074~1138),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순국한 윤계(尹棨, 1583~1636)를 제사하는 사당이었습니다. 현종 10년(1669) ‘용백사(龍柏祠)’라는 사액을 받은 뒤 18세기 영・정조 대에 걸쳐 왕실의 관심을 받았습니다.
조선에서 제작한 최초의 제갈공명상은 임진왜란 때 선조가 하사해 평안도 영유현의 와룡사(臥龍祠)에 안치했던 작품으로 추정되며, 용백사의 제갈공명상 역시 와룡사의 것과 유사한 도상(圖像)이거나 그 모본(模本)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두 사당의 건립과 중수 등을 주도한 세력이 송시열과 그의 제자들로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1661년 부교리 이민서는 영유현에 있는 와룡사의 중수를 청하는 상소에서 ‘적을 토벌하고 국가를 부흥할’ 호걸이 출현하기를 기대한다는 뜻을 비쳤는데, 비록 노골적으로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제갈공명 사당 건립 취지에 북벌 의지가 숨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의 군주와 17세기 성리학자들은 오랑캐를 정벌하는 데 뜻을 같이할 제갈공명 같은 지략가가 어서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그 초상을 모셨던 것입니다.

제갈량의 용모에 대한 인식과 전형적 도상

와룡사의 무후상(武候像)은 1902년에 도둑맞아 지금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조선에서 처음으로 그린 제갈무후상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누가 그렸는지 구체적으로 확인하기는 어렵습니다. 『삼국지(三國志)』 「촉서(蜀書)」에 제갈량은 “키가 여덟 자고 용모는 매우 위엄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제갈량이 살던 시대에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형상화했는지 알 수 있는 자료는 없습니다. 당대(唐代) 화가 염립본(閻立本)이 그린 <제갈량화상(諸葛亮畫像)>이 남송 대까지 여러 차례 중모(重模, 다시 그리기)되어 전래되었다고 하나 이 또한 전하지 않습니다. 베이징의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에 원대(元代)에 그린 <제갈량상(諸葛亮像)>이 소장되어 있는데, 맨발에 여의(如意)를 들고 평상(平床)에 앉은 모습이 죽림칠현(竹林七賢) 같은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대의 은사(隱士) 혹은 신선(神仙)을 표현한 것과 유사해, 맨 처음 제갈량 화상의 흔적을 흐릿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제갈량화상>은 원대에 제작한 것인데, 비록 작은 목판본이나마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1321~1323)에 그려 넣은 삽화에서 학창의(鶴氅衣)에 우선(羽扇)을 들었거나 수레를 탄 제갈량의 모습을 최초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명청대(明淸代)에는『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인기를 바탕으로 “얼굴이 관옥(冠玉)같이 희고, 머리에는 관건(綸巾)이요 몸에는 학창의에 손에는 우선을 들었으며, 세간을 벗어난 신선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데가 있다.”고 하는 제갈량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가 구축되었습니다. 제갈량의 용모 설명은 모두 나관중(羅貫中)이 지은『삼국지연의』(14세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러한 묘사는 《석각충효절의도(石刻忠孝節義圖)》(1493) 와 『역대고인상찬(歷代古人像讚)』(1498), 『삼재도회(三才圖會)』(1609)의 제갈량상 도상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들 초상에 보이는 전형적인 제갈량의 모습은 관건에 학창의를 입거나 여기에 더해 우선을 들고 있는데, 조선에 수용된 것은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하는 두 점의 제갈량 초상

肅宗御題, < 諸葛武侯圖>, 조선, 1695년, 비단에 색, 164.2×99.4cm, 덕수4337 肅宗御題, < 諸葛武侯圖>, 조선, 1695년, 비단에 색, 164.2×99.4cm, 덕수4337

 작가미상, <諸葛亮肖像>, 조선후기, 비단에 색, 127.3×50.9cm, 덕수 4566 작가미상, <諸葛亮肖像>, 조선후기, 비단에 색, 127.3×50.9cm, 덕수 4566

2008년 국립중앙박물관의 테마전 ‘왕의 글이 있는 그림’에서 처음 공개되었던 <제갈무후도(諸葛武侯圖)>(덕수4337)는 1695년 5월에 쓴 숙종(肅宗, 재위 1674~1720)의 어제(御題)와 제왕의 친필을 뜻하는 ‘신장(宸章)’이라는 주문방인(朱文方印)이 남아 있는 수하인물(樹下人物) 형식의 우안칠분면전신좌상(右顔七分面全身坐像)입니다. 이 작품 위에는 숙종이 직접 “내가 서로 감응하는 바가 있어 선생의 모습을 그림으로 생각해 보니 관건에 학창의를 입은 모습이 옛 풍속과 비슷한 듯하다. 같은 시대에 태어나 함께 세상을 다스려 보지 못함이 한스러워 오로지 경모하는 마음을 기탁해 글을 쓰노라[我用相感繪畫想思 綸巾學氅彷佛夙儀 恨不同時天職共治 惟將敬慕聊寓賛辭].”라는 제찬(題賛)을 남겼습니다. 숙종이 제갈량같이 자신과 뜻을 함께할 신하를 그리워하며 그리게 한 이 그림이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사사당한 송시열을 복관(復官)한 갑술환국(甲戌換局) 바로 이듬해에 제작되었음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합니다.
이 그림은『삼재도회』의 제갈량상과 비교하면, 봉안(鳳眼)으로 깊게 찢어진 눈과 호랑이처럼 꼬리가 올라간 눈썹, 팔자수염과 미소 짓는 듯한 입술, 넉넉한 귓불과 후덕한 뺨, 목의 삼도(三道)같은 이목구비뿐만 아니라, 학창의 안으로 보이는 직령포의 오른쪽으로 단단히 여민 모습과 목선 부분에서 한번 꺾인 내의(內衣)의 주름까지 기본적으로 동일한 도상에서 출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숙종 어제 <제갈무후도>에 그려진 오량형(五梁形)의 관건은 현재 우리가 접하는『삼재도회』중의 모습과는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만,『삼재도회』의 삽화를 잘 알고 있던 숙종의 지시에 따라『삼재도회』를 참고했거나『삼재도회』를 참고한 다른 작품을 보고 제작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한편 필자를 알 수 없는 「제갈무후화상찬(諸葛武侯畫像贊)」이 쓰인 제갈량 초상도 있습니다. 이 작품은 관건에 학창의를 입고 두 손으로 우선을 잡고 있는 제갈량의 우안칠분면(右顔七分面) 전신 입상으로, 비단 위에 옅은 홍색과 묵필로 구륵선(鉤勒線)을 긋고, 부위에 따라 담홍・담황・담록・담자(淡紫) 및 백색과 금색을 배채(背彩)한 뒤 부분적으로 석록(石綠), 석청(石靑), 금니(金泥), 묵필(墨筆) 등을 사용해 마무리한 정교한 채색 인물화입니다. 주선(朱線)으로 윤곽을 잡은 이목구비를 보면, 봉안을 닮은 눈매는 뚜렷하면서도 지혜롭고, 넓은 양미간과 원만한 볼살은 입가의 미소와 함께 어질면서도 근엄한 표정을 더욱 강조해 줍니다. 많지 않은 구레나룻과 수염은 정결한 인상을 풍기고, 백옥처럼 투명한 피부에 붉은 입술과 갈색이 뚜렷한 눈동자는 제갈량의 고결한 충절을 떠오르게 합니다. 몸에는 우임(右袵)으로 단단히 조여 입은 담자색 직령포 위에 옥색 학창의를 걸쳤는데, 흑색 옷깃은 가슴 아래까지 여유롭게 벌어져 있고 소매는 넓으며, 학창의 아래로는 백색 바지가 보입니다. 발에는 석록과 석청색으로 꾸민 태사혜(太史鞋)를 신었는데, 오른 발꿈치가 살짝 들린 채 옷자락이 몸 뒤쪽으로 조금 흩날리는 모양으로 하고 있어 마치 앞으로 나아가는 듯한 운동감을 표현했습니다. 머리에는 흑색 관건을 썼는데 머리 뒤에서 묶은 띠가 양어깨 아래로 흘러 내려오고, 양손으로는 백색 우선을 들어 오른 어깨에 기댔는데, 와룡관(臥龍冠)이라고도 불리는 관건과 백색 우선으로 제갈량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관건에서 흘러 내려오는 두 줄의 띠와 학창의의 흑색 깃, 우선의 자루와 태사혜에는 구륵선(鉤勒線)을 따라 금니로 베풀어져 있어서 제갈량의 고귀한 신분을 더욱 강조하는 듯합니다.
이 작품의 표현법은 민간 화가들이 그린 무속적인 분위기의 제갈량상과는 크게 다릅니다. 전체적으로 필선의 굵고 가는 변화가 크지 않으면서도 한 점 흐트러짐 없는 필법과 전통 배채법(背彩法) 에 바탕을 둔 고아하고 섬세한 채색은 이 인물화의 작가가 초상화를 전문으로 그리는 화원(畫員)이었을 가능성을 뒷받침해 줍니다. 우안칠분면의 화상이라는 점과 후덕한 인상에서 1695년에 제작된 숙종 어제 <제갈무후도>의 도상과 연결되는 듯하지만, 팔량형(八梁形)의 관건과 띠라든지, 오른손에 잡고 어깨에 받친 우선과 바람에 나부끼는 듯한 옷 주름에서는 차이점이 발견됩니다. 숙종 어제 <제갈무후도>에 비해 도상은 좀 더 복잡해지고, 자세는 좀 더 자연스러우며, 필법은 좀 더 양식화되어 보입니다. 따라서 같은 화원 출신의 화가가 그렸다고 하더라도 시기적으로 숙종 어제 <제갈무후도>가 그려진 1695년보다 앞서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듯합니다. 한편 총 8열 10행의 작은 글씨로 쓰인 「제갈무후화상찬」의 정중함과 화려한 채색 및 상당한 크기를 갖는 단독 전신 입상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 작품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제갈량 사당에 안치할 것을 염두에 두고 제작된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추후 유사한 도상의 제갈공명상의 발굴과 관련 자료의 비교 검토가 되면 제작 추정 시기를 좀 더 좁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제갈무후화상찬(諸葛武侯畫像贊)」

惟忠武侯 충무후忠武侯(제갈공명의 시호)는
識其大者 학식이 대단한 사람이다.
仗义履仁 인의仁義를 몸소 실천했으며
卓然不舍 높고 원대한 뜻을 놓지 않았다.
方卧南阳 남양南陽에서 은거 생활을 하며
若将终身 한평생을 마칠 것 같더니만
三顾而起 삼고초려三顧草廬한 유비의 간청으로 세상에 나왔으니
时哉屈伸 뜻을 펼칠 만한 시기가 되어서다.
难平者事 평정하기 어려운 것은 전쟁이요
不昧者機 밝게 살펴야 할 것은 사물의 기미機微다.
大纲既得 큰 원칙을 이미 터득했다면
萬目乃随 작은 여러 일은 따라온다.
我奉天讨 내가 하늘을 대신해 토벌을 하니
不震不悚 놀라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惟一其心 오직 마음을 하나로 하여
而以时动 시대의 요청에 따라 움직인다.
噫侯此心 아! 제갈무후의 이 마음은
萬世不泯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리.
遺像有嚴遗像有严 남긴 초상화에 엄숙함이 묻어 있으니
瞻者起敬 보는 사람은 공경심을 일으킬지어다.
南軒 張栻 賛 남헌(南軒) 장식(張栻) 지음
(번역 임재완)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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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한국서화도록 제24집 : 조선시대고사인물화 2』(국립중앙박물관,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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