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평양성도

2018년 ‘4.27. 남북정상회담’으로 평양냉면과 함께 을밀대, 대동강 등 지명이 거론되면서 평양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평양은 고조선(古朝鮮)의 수도이고,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일 정도로 중요한 도시입니다. 조선시대 평양은 ‘단군(檀君)과 기자(箕子)의 고장’이며 경치가 아름다운 도시, 풍류의 도시로 유명했습니다. 그러나 현대 평양은 쉽게 갈 수도 없고 정보가 제한적이어서 우리가 잘 모르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평양에 대한 심리적 거리를 조선시대 평양 그림으로 다소나마 해소할 수 있을 듯합니다. 물론 조선시대 평양과 현대 평양은 많이 다르지만 말입니다.

평양성도 8폭 병풍, 조선 19세기 말, 종이에 색, 각 폭 107.6×37.5cm, 본관10071

평양성도 8폭 병풍, 조선 19세기 말, 종이에 색, 각 폭 107.6×37.5cm, 본관10071

평양성도 병풍

평양성과 이를 둘러싼 강, 그리고 주변 산천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그린 ‘평양성도 병풍(平壤城圖屛風)'이 수십 점 전해집니다. 주로 조선 18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제작된 병풍 형태의 평양성 그림입니다.
병풍 형태 평양성도에서 평양성은 가로로 길게 타원형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성 안은 도로로 구획되어 있고 수많은 가옥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으며, 주요 지명과 건물 명칭이 적혀 있습니다. 18세기 말 평양은 조선에서 두 번째로 가구 수가 많은 고을이었는데, 이를 짐작할 수 있는 그림입니다. 평양성을 둘러싸고 양쪽으로 강이 흐르는데 앞쪽은 대동강, 뒤쪽은 보통강입니다. 대동강 오른편과 왼편에 각각 능라도(綾羅島)와 양각도(羊角島)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림 속 방위는 오른쪽이 북쪽, 왼쪽이 남쪽, 위아래가 각각 서쪽과 동쪽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실제 평양의 모습은 이와 다릅니다. 평양은 오른쪽 지역이 비스듬하게 올라간 길쭉한 자루 모양으로, 지형적으로 동북쪽이 높고 좁으며 남서쪽이 넓게 퍼져 있습니다.
평양성을 타원형으로 표현한 가장 오래된 예는 평안감사를 역임한 윤두수(尹斗壽, 1533~1601)가 1590년(선조 23)에 편찬한 『평양지(平壤志)』에 수록된 <평양관부도(平壤官府圖)>입니다. 이 판화를 보면 16세기 평양성은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으로만 이루어져 있습니다. 현재 전하는 평양성도 병풍 속 평양성 모습과는 다릅니다.

자루 모양인 평양의 지형 (출처: 구글 지도)

1 자루 모양인 평양의 지형 (출처: 구글 지도)
2 윤유(尹游, 1674-1737)가 편찬한 『평양속지(平壤續志)』에 수록된 <평양폭원총도(平壤幅員緫圖)> 부분, 조선 1730년
3 윤두수(尹斗壽, 1533~1601)가 편찬한 『평양지(平壤志)』에 수록된 <평양관부도(平壤官府圖)>, 조선 1590년


평양성 축조 및 재정비

평양성은 고구려가 586년 평양으로 천도할 때부터 축조되었으나 고구려 멸망 후 황폐해졌습니다. 조선 건국 후 평양성을 다시 쌓기 시작하였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피해를 입었고 18세기에 재정비되었습니다. 1710년(숙종 36) 주작문(朱雀門) 건립을 시작으로 이듬해 30척 높이로 성곽을 쌓아 외성 사이에 중성이라는 공간이 만들어졌습니다. 외성도 이 시기에 정비되었고, 북성은 1714년(숙종 40) 처음으로 축성되었습니다. 이로써 병풍 속 평양성처럼 우측부터 북성(北城), 내성, 중성(中城), 외성으로 이루어진 모습을 갖춘 것입니다. 윤유(尹游, 1674~1737)는 윤두수의 5대손으로 1727년부터 1729년까지 평안감사를 지냈는데, 그가 1730년에 편찬한 『평양속지(平壤續志)』에 수록된 <평양관부도(平壤官府圖)>에서 재정비된 평양성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윤유(尹游, 1674~1737)가 편찬한 『평양속지(平壤續志)』에 수록된 <평양관부도(平壤官府圖)>, 조선 1730년

윤유(尹游, 1674~1737)가 편찬한 『평양속지(平壤續志)』에 수록된 <평양관부도(平壤官府圖)>, 조선 1730년

평양성도 병풍의 구성

8폭 병풍 형태의 평양성도 제1폭에는 평양 북성 밖 풍경, 제2폭에는 북성, 제3~5폭은 내성, 제6폭은 중성, 제7~8폭은 외성이 그려져 있습니다. 매우 복잡해 보이는 평양성도 병풍을 조선시대 평양 방문 여정에 따라 소개하고자 합니다.

 제7~8폭 재송원을 지나 영제교를 건너 십리 장림을 지나 평양성으로 가는 길

제7~8폭 재송원을 지나 영제교를 건너 십리 장림을 지나 평양성으로 가는 길

개인 유람, 관리 부임, 중국으로 오가는 사행 등 평양에서의 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세 가지 일정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 일정은 평양성 입성입니다. 제8폭 아래에 있는 역관(驛館)인 재송원(栽松院)을 거쳐 영제교(永濟橋)를 지나, 십리에 이르는 긴 숲[十里長林]의 백사장을 따라 대동강 나루에 도착합니다. 공적 업무이면 호화롭게 치장한 배를 타고 제4폭에 있는 평양의 관문인 대동문(大同門)으로 들어섭니다. 대동문에서 위쪽으로 가면 평양에서 가장 웅장한 건물인 대동관(大同館)에 도착하게 됩니다. 대동관은 임금을 상징하는 전폐(殿陛)를 모셔 두는 곳으로 중국 사신이나 조선의 관리가 머무는 숙소입니다. 대동관 오른쪽으로 난 길로 가면 평안감사가 정무(政務)를 보는 감영이 나옵니다. 평안감영은 조선 태조(太祖)의 어진(御眞)을 보관하던 영숭전(永崇殿)이 전쟁으로 훼손되자 1684년(숙종 20) 이 자리로 옮겨졌습니다. 감영의 중심 건물은 선화당(宣化堂)이고 그에 딸린 부속 건물이 많습니다. 군관청(軍官廳), 회계소(會計所), 주방(廚房), 통인청(通引廳), 호고(戶庫), 영고(營庫), 약고(藥庫), 지고(紙庫), 보선고(補膳庫), 고마고(雇馬庫) 등 관청과 창고가 있어서 감영의 역할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감영에서 공적 업무를 마치면, 대동문 우측의 연광정(練光亭)으로 공연을 보러 갑니다.

 제4폭 평양의 중심부인 대동문, 대동관, 애련당 제4폭 평양의 중심부인 대동문, 대동관, 애련당

 제4폭 평안도 관찰사가 머무는 평안 감영 제4폭 평안도 관찰사가 머무는 평안 감영

제2폭에 그려진 두 번째 여정은 평양에서 가장 풍경이 좋은 금수산 모란봉(높이 96.1m) 아래 영명사(永明寺)와 부벽루(浮碧樓)로 가는 것입니다. 배를 타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 전금문(轉錦門)에서 내려 영명사로 들어갑니다. 영명사는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구제궁(九梯宮) 터에 세운 절입니다. 동명왕이 기린마를 키웠다고 전하는 기린굴(麒麟窟)이 표기되어 있습니다. 부벽루는 대동강 능라도와 건너편 넓은 평야가 바라다보이는 절경으로 이름이 높습니다. 내성 가장자리에 을밀대(乙密臺)가 높이 솟아 있습니다. 을밀대 좌측 기자묘(箕子墓)는 기자의 도시 평양을 여실히 보여 주는 유적입니다. 을밀대 우측 아래로 현무문(玄武門)이 있고 바깥쪽에 선연동(嬋娟洞)이라고 표시되어 있습니다. 선연동에는 기생들의 묘지가 있는데, 유람기에서 종종 언급되는 장소입니다. 기생으로 유명한 평양의 한 단면을 보여 줍니다.

영명사와 부벽루 사진, 20세기 전반

1 영명사와 부벽루 사진, 20세기 전반
2 제2폭 평양 최고의 명승지 영명사와 부벽루
3 제2폭 평양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모란봉과 내성의 북서쪽 을밀대

세 번째 일정은 외성에 있는 기자(箕子) 유적 방문입니다. 제7폭은 기자의 공간입니다. 기자는 중국 상(商)나라 사람으로 상이 주(周)나라에 멸망하자 유민을 이끌고 동쪽으로 이주하여 기자조선을 세웠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기자가 살았다는 기궁(箕宮), 기자가 식수로 썼다는 기자정(箕子井), 기자가 실시했다고 전해지는 정전제(井田制)의 유지(遺址)인 바둑판 모양 도로와 밭이 그려져 있습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바둑판 모양 도로와 밭을 기자 관련 유적으로 생각하였으나 실제로는 고구려 도성의 도로 유적으로 밝혀졌습니다.

 제7폭 기자 유적인 기궁, 기자정, 정전제 유지(遺址)

제7폭 기자 유적인 기궁, 기자정, 정전제 유지(遺址)

 기자정과 비석 사진, 20세기 전반

기자정과 비석 사진, 20세기 전반

건물 명칭으로 알 수 있는 평양성도 제작 시기

그림의 제작 시기를 산수나 건물 표현법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이처럼 실경을 바탕으로 한 그림은 건물의 건립 또는 소실(消失)의 역사로 어느 시기의 모습을 반영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제8폭 외성 남쪽 끝 차문(車門)에 있는 한사정(閒似亭)은 18세기 후반에 생긴 정자입니다. 제4폭 대동문 뒤쪽의 애련당(愛蓮塘)과 장대(將臺)에 건물이 그려져 있지 않은데, 이는 1804년 화재 후 전소된 뒤 재건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평양속지』에 수록된 <평양관부도>와 차이 나는 부분입니다. 이 병풍의 제작 시기를 좁힐 수 있는 단서를 좀 더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제6폭 창광산(蒼光山)에 있던 인현서원(仁賢書院)을 비롯하여 서원과 사당이 표기되지 않은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인현서원은 기자의 초상화를 모신 곳이었으나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습니다. 둘째, 1888년(고종 25)부터 기자묘를 기자릉(箕子陵)으로 높여 부른 사실입니다. 20세기 초 사진에서 ‘기자릉’이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병풍에는 여전히 기자묘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단서들을 근거로 이 평양성도 병풍은 1871년 이후부터 1888년 사이의 평양을 그렸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제6폭 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서원이 사라진 창광산 제6폭 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서원이 사라진 창광산

기자릉 사진, 20세기 전반 기자릉 사진, 20세기 전반

평양성도에 보여 주고자 하는 평양

18세기 이후 평양은 ‘기자의 도읍지’, ‘상업이 번화한 도시’, ‘풍류의 도시’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면 병풍 형식의 평양성도에서는 어떠한 평양을 보여 주고 있을까요?

제4폭 단군과 기자의 사당 숭령전과 숭인전 제4폭 단군과 기자의 사당 숭령전과 숭인전

제3폭 평양 부근 군현의 창고인 삼등창, 상원창, 중화창 제3폭 평양 부근 군현의 창고인 삼등창, 상원창, 중화창

이미 언급한 대로 기자 유적이 매우 강조되어 있습니다. 제2폭의 기자묘는 실제보다 크게 그려져 있고, 제7폭 기자 유적 외에도 제4폭 대동관 뒤쪽으로 기자 사당인 숭인전(崇仁殿)과 단군 사당인 숭령전(崇靈殿)이 있습니다. 조선에서는 단군은 동방에서 처음 천명(天命)을 받은 임금이고 기자는 처음으로 교화를 일으킨 임금으로 인식하고, 고려에 이어 건국 직후부터 이곳에서 단군과 기자를 위한 제사를 지냈습니다.
다음으로 ‘풍류의 도시’ 평양답게 연광정, 부벽루 등 누각과 정자가 많이 보입니다. “평양에는 열 걸음에 누각이 한 채이고 다섯 걸음에 정자가 하나다.”라고 할 정도로 누정(樓亭)이 많았습니다. 평양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사족(士族)이 발달하지 않아 사회 분위기가 자유로웠고, 사신 접대를 위한 유흥 문화가 발달했습니다. 유명한 누정은 실제 공적인 행사를 위한 유흥 공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상업 도시’ 평양의 모습은 평양성도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없습니다. 평양은 17세기 후반부터 대외무역과 상업이 발달하면서 재화가 풍부했습니다. 대동관 사거리에는 상점이 이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림 속에서는 상업용 건물을 볼 수 없습니다. 대신 제3폭 장경문(長慶門) 안쪽에 인근 군현의 창고인 강동창(江東倉), 삼등창(三登倉), 상원창(祥原倉), 중화창(中和倉)이 있어서 평양으로 물류가 모여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복잡한 평양성도 병풍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이 평양성도 병풍은 서원철폐령이 있었던 1871년 이후 평양의 모습을 그린 것이며, 그림 속 평양은 ‘기자와 단군의 고장’과 ‘풍류의 도시’, ‘평안도의 중심 도시’로 구현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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