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내면을 비추는 거울, 강세황 초상 : 문동수

얼굴은 나와 다른 사람 사이에 의사를 소통하는 일차적인 도구입니다. 그러나 얼굴을 구성하는 근육, 뼈, 살의 두께와 이목구비의 모양새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하기 마련입니다. 동시에 눈빛, 주름의 결방향, 표정, 얼굴 빛도 자연스레 변모하게 됩니다. 사람의 인상은 생각하고 사는 방식에 따라 달라지며 내면과 심리 상태를 반영합니다. 따라서 현재의 얼굴은 자신이 살아온 과거의 흔적을 말해주며 내면을 비춰 주는 거울입니다.

조선시대의 초상화는 얼굴에 드러난 주름과 요철, 반점, 작은 생채기 하나까지 낱낱이 그려놓은 초정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 위에 내면의 정신을 담기 위해 전신의 요체까지도 놓치지 않으려는 화가들의 노력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노년의 모습을 그린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의 초상은 이를 대표하는 그림입니다. 양미간에 세로로 움푹 접힌 주름살은 벼슬을 포기하고 평탄치 않은 시절, 수많은 글과 그림을 쌓아 두고 서재에서 씨름하는 젊은 모습 위에, 황혼에 접어들어 정치 역정을 살아온 모습이 고스란히 포개지는 듯합니다. 이처럼 그의 초상화는 18세기 문인의 삶을 들여다보게 하고 그의 내면 세계까지도 읽게 해주는 중요한 시각매체입니다.

강세황, 어떤 사람이기에

18세기 화단을 이끌어간 강세황의 어린시절, 청년시절, 중년시절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두 손을 다리 위에 올린 채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어디를 봐도 점잖고 엄숙한 분위기로 충만하여 9남매 중 막내라고 여겨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는 조부 강백년(姜栢年, 1603~1681)에서부터 아버지 강현(姜鋧, 1650~1733)까지 기로소에 들어갈 정도로 부와 명예를 누린 진주강씨(晋州姜氏) 가문에서 늦둥이로 태어났습니다. 서울 남소문동(현 장충체육관)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그는 젖비린내 겨우 가시던 나이에 시를 짓기 시작하여 열서너살 무렵에는 글씨에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입지의 나이 15세에는 진주 유씨 집안의 딸과 혼인을 하였습니다. 어린시절부터 글재주가 특출났던 그가 왜 환갑이 넘어서야 벼슬에 나가게 됐을까요?

부와 권력을 누리며 대대로 번성한 보수적인 소북계 남인인 그의 집안은 진보성향의 노론이 주도권을 쥐면서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여기에 맏형인 강세윤(姜世胤, 1684~1741)의 과거 부정사건이 아버지의 청탁에 따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1728년에는 그가 이인좌의 난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강세황의 친가와 처가까지도 역적 집안으로 낙인 찍히면서 벼슬길은 막히게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과거부정사건이 일어난 해가 강세황이 태어난 해였습니다.

집안 형편이 점차 어려워지면서 강세황은 나이 25세 때 남대문 밖 염천교 근처인 처가의 빈집으로 이사를 가게 됩니다. 그때 그는 자신의 작은 서재를 산향재(山響齋)라고 짓고, 그림을 감상하고 거문고를 연주하면서 소일하였습니다. 서재 벽을 온통 산수화로 그려 붙이고, 거문고 줄을 고르고 연주를 하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옛 곡조의 고상한 음운이 산수와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을 느꼈을 정도로 힘든 일상 속에서도 넉넉하고 너그러운 풍류의 정취를 잊지 않았습니다.

다음의 글에서 청년시절 속세를 등진 그의 고뇌와 그 너머의 풍류가 느껴지는 삶의 일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림 속의 여울 물이 돌에 부딪치는 소리
약한 바람이 솔 사이로 들려오는 소리
고기잡이 어부의 노랫소리
벼랑에 붙은 절간의 저녁 종소리
숲 사이에서 우는 학 소리
물속에서 울부짖는 용의 소리들이 거문고 소리에 완전히 어울려
그림이 거문고인지, 거문고가 그림인지 알 수 없게 되었고, 이 경지에 이르자
몸과 마음의 병을 잊고 평화로워져
우울증도 없어지게 되었다.

1743년 셋째아들 강관(姜강관, 1743~1824)이 태어났고, 그 다음해에는 처남이 살던 경기도 안산으로 두번째 이사를 가게 됩니다.

이후 30년간 그는 시서화와 악기 연주에 전념하며 지냈습니다. 다행히도 그의 주위에는 고금의 시가에 능하고 글씨에 뛰어난 매형 임정(任珽, 1694~1750)을 비롯하여 처남 유경종(柳慶種, 1714~1784), 벗인 허필(許佖, 1709~1761), 이수봉(李壽鳳 1710~?), 이익(李瀷, 1681~1763), 강희언(姜熙彦, 1710~?), 김홍도(金弘道, 1745~1816이후), 신위(申緯, 1769~1845) 등 당대의 유명한 문인들이 즐비하였고, 그들과 시서화로 소일하였습니다.

사진. 강세황, <현정승집도> 강세황, <현정승집도>, 조선, 1747년, 종이에 먹, 34.9 × 50.0 cm, 개인소장

당시 문인들과 교유하는 모습은 <현정승집도(玄亭勝集圖)>에서 볼 수 있습니다. 34세 때인 1747년 6월 초복 다음날, 안산 현곡의 청문당(聽聞堂)에서 벗들과 개장국을 끓여 술에 곁들인 뒤 거문고 소리와 노래를 듣고 시를 지으며 소일한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의 인척들인 유경종, 유경용(柳慶容, 1718~1753), 유성(柳煋, ?~?), 강세황의 두 아들인 강인(姜강인,1729~1791), 강완(姜강완, 1739~1775) 등이 등장하며, 거문고 옆에 앉아 오른쪽으로 향한 사람이 강세황입니다.

이 그림에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습니다.

탁 트인 산 경치를 바라보며 벌인 술자리
거문고 곡조 솔바람 따라 멀리 흩날리고
우박이 개이자 바둑 두는 소리 서늘하다.
촛불 잡고 마냥 취하기를 사양 마소
흐르는 세월 쏜살같다 애석해 하랴.

불혹의 나이를 넘기면서 그는 시서화에 심취한 것이 스스로 만족하고 감상하기 위함이지 남이 자신을 인정해 주길 원하는 게 아니라는 심정을 밝힙니다.

취하지 않으면 미칠 수 없고
미칠 때에는 자못 시를 짓네.
시가 지어지면 초서로 쓰니
서법 또한 기이하다네.
스스로 감상하고 스스로 인정할 뿐
남이 알아주길 바라지 않는다네.

그는 이토록 서화를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초상화와 산수화, 그리고 사군자 등 여러 화목들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초상화는 산수를 그릴 때처럼 한 치의 오차 없이 대상물의 형태를 그대로 닮게 그리기를 강조하였습니다. 일흔 나이에 이르기까지 대여섯 점의 자화상을 남길 정도로 그는 초상화에도 관심이 높았습니다. 초상화뿐만 아니라 산수화에서도 전신을 강조하였고, 서양화법에 대한 관심을 갖고 서화에 대한 안목과 식견을 쌓으려는 노력과 열정은 노년까지도 지속되었습니다.

서화와 풍류에 빠져 있던 강세황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은 환갑을 맞이하면서부터였습니다. 영조의 배려로 처음으로 벼슬길에 오르게 된 이후 64세 때 기구과, 66세 때 문신정시에 장원급제하게 됩니다. 관직은 영릉 참봉(英陵參奉)ㆍ사포 별제(司圃別提)ㆍ병조 참의(兵曹參議)ㆍ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등을 두루 역임하였습니다.

기로신이 되고 난 72세 때에는 사행으로 북경에 가 서화로 이름을 날렸고, 76세 때 금강산 유람을 하고 기행문과 실경사생 등을 남겼습니다.

이명기의 명작 강세황 초상(姜世晃 肖像)

강세황의 집안은 할아버지에서부터 아버지, 그리고 강세황 자신에 이르기까지 삼대째 기로신에 임명되는 명예를 누렸습니다. 할아버지 강백년이 71세에 기로소(耆老所, 정2품 이상, 70세 이상 문신을 예우하기 위한 노인당)에 들어갔고, 손자인 강세황도 71세에 기로신이 되었습니다. 계묘년(癸卯年, 1783) 입소 두 달 뒤 정조는 27세의 젊은 화원이었던 이명기(李命基, 1756~?)에게 전교를 내려 그의 초상을 그리게 합니다.

사진. 이명기(李命基, 1756 ~ ?), <강세황 초상> 이명기(李命基, 1756 ~ ?), <강세황 초상>, 조선, 1783년, 비단에 색
145.5 × 94.0 cm, 보물

초상화 분야에서 가히 독보적이라 할 만큼 뛰어난 기량을 지닌 이명기에게 김홍도의 스승이자 문인화가인 강세황의 초상화를 그리는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더구나 머리털 하나라도 한 치의 오차 없이 그대로 닮게 그리기를 강조한 그를 응대하여 재현하는 일은 아무리 화명을 날린 화가라 할지라도 심리적인 부담을 덜어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명기는 깊은 통찰력과 과학적 분석력을 동원하여 이목구비의 생김새를 낱낱이 해부하고 강세황의 어두운 내면을 햇살처럼 밝힘으로써 강한 생명력을 불어넣었습니다. 강세황이 살아가면서 경험한 성공과 좌절, 희열과 열패감 등 온갖 오욕(五慾)과 칠정(七情)을 그의 붓끝으로 표현해냈습니다. 미세한 살결과 눈두덩이 주변 미륜골과 미릉골, 볼과 코 주변의 주름인 법륜, 안면의 들어가고 튀어나온 곳, 높고 낮은 곳에 명암을 부여하여 오악을 뒤흔들 정도로 적확하게 나타냈습니다. 선과 점들로 반복된 세세한 피부결과 주름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을 대하듯 자연스럽게, 흰 수염과 어우러지게 하여 생생하게 표현하였습니다. 그의 세심함은 소매 밖으로 드러낸 손가락 마디마디까지 놓치지 않은 표현력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정조의 제문은 강세황이라는 인물과 그의 삶을 축약하여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툭 트인 흉금, 고상한 운치, 소탈한 자취는 자연을 벗하네.
붓을 휘둘러 수만 장 글씨를
궁중의 병풍과 시전지에 썼네.
경대부의 벼슬이 끊이지 않아
당나라 정건(鄭虔)의 삼절을 본받았네.
중국에 사신으로 가니
서루에서 앞 다투어 찾아오네.
인재를 얻기 어려운 생각에
거친 술이나마 내리노라.
조윤형이 삼가쓰다 [曹允亨謹書]

강세황의 셋째아들 관은「계추기사(癸秋記事)」에 아버지 강세황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하여 완성하는 날까지 총 19일간의 제작과정을 일정별로 정리하였습니다. 나아가 그린 화가, 비용과 재료, 구입처, 사례비, 장인의 이름, 감상의 소감 등을 일기체 형식으로 소상히 적어놓음으로써 당대 예술계를 이끌어간 아버지의 초상화가 어떻게 탄생하였는지를 낱낱이 알려줍니다.

이 기록을 요약하면 초상화를 그리는 데 들어간 비용은 총 37냥이었습니다. 화가인 이명기는 강세황의 집에 10일간 머물면서 10냥의 사례비를 받았습니다. 7월 18일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완성한 다음 장황하여 보관할 궤를 만들고, 8월 7일에서야 그림을 감상하게 됩니다.

이 초상화가 그려진 지 23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더라도 호연의 기상(氣像)이 넘칩니다. 예법에 맞게 갖춰 입은 의관이나 자세는 엄숙하고 위엄 있어 지체 높은 존재감을 과시합니다. 71세 기로신의 앉음새는 위의(威儀)를 대표하며, 시서화 삼절로서의 풍모를 잘 대변해 줍니다.

이명기는 기념사진을 찍듯이 연로한 강세황의 모습을 재현하는 데 한점 한점 혼신의 힘을 기울였습니다. 전신(傳神)을 담아내기 위하여 젊은 시절 시서화와 풍류로 현실을 극복해낸 모습 위에 내공으로 다져진 기로신의 당당함을 오버랩시켜 완성하였습니다. 당대의 대가인 이명기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출처표시+변경금지
국립중앙박물관이(가) 창작한 강세황 초상 저작물은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출처표시+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