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1932년 10월 6일, 금강산 월출봉(1580m)에서 산불 저지선 공사를 하던 인부들이 돌 상자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그 안에는 사리갖춤이 들어 있었는데, 이성계와 부인 강씨, 그리고 후에 조선의 개국공신이 된 이들을 비롯한 1만여 명이 미륵을 기다리며 금강산 비로봉(1638m)에 사리갖춤을 모신다는 내용의 명문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당초 비로봉에 봉안한 사리갖춤이 어떻게 월출봉에서 발견됐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은기(銀器) 3점, 동기(銅器) 1점, 백자(白磁) 5점으로 이루어진 이 사리갖춤(이하, 이성계 발원 사리갖춤)은 발견 반년 후인 이듬해 7월,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정식 유물로 등록되고, 후에 국립박물관이 인수하여 오늘에 이릅니다. 이성계 발원 사리갖춤은 그 조형적 특징과 미술사적 위상이란 면에서 크게 주목되지만, 한편으로 역성혁명을 목전에 둔 신흥무장 출신 이성계의 자신감과 야망이 매우 정치색 짙게 드러나는 특이한 역사 유물인 점에서도 대중적 재조명이 필요한 유물이라 생각됩니다.1)
라마탑형 사리기
가장 안쪽에 모신 사리기는 은제금도금 라마탑형 사리기입니다. 이 사리기는 유리와 금속으로 된 가느다란 원통형 용기와 연좌형 대좌, 원통형 은판, 그리고 라마탑형 용기가 결합한 형태입니다. 불사리를 직접 봉안했을 가느다란 원통형 용기를 연좌형 대좌 위 원통형 은판 안에 놓고, 여기에 라마탑형 용기를 뚜껑으로 덮었을 것입니다. 이 용기에는 돌아가며 4구의 불입상(佛立像)이 새겨져 있습니다. 양 발을 벌리고 마치 호위 무사처럼 정면으로 서 있는 이 불상들은 전형적인 고려 불화의 양식과 달리 정면관(正面觀)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면관 강조는 뒤에 볼 팔각당형 사리기에도 보이는데, 조선 초기 미술에서 보이는 특색이라는 점에서 조선시대로 연결되는 새로운 양식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불입상을 비롯한 여러 문양은 축조(蹴彫)와 어자문기법(魚子文技法), 그리고 선조기법(線彫技法)으로 표현되었고, 대좌부ㆍ상륜부 등 주요 부분과 함께 부분 도금을 하였습니다. 이런 부분도금은 현존 고려시대 금은기(金銀器)나 사리갖춤 중에서는 예를 찾기 어려운데, 이 점에서 이 무렵에 새로 유행한 양식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은제도금 라마탑형 사리기(분리한 모습), 고려 1390년 추정, 전체 높이 15.5cm. 〈출처:『국립춘천박물관』(국립춘천박물관, 2002년), 120쪽.〉
은제도금 라마탑형 사리기의 대좌 밑면. 〈출처:[李成桂發願 佛舍利莊嚴具의 硏究](미술사학연구257, 주경미, 2008년 3월), 43쪽 도5.〉
연화형 대좌는 타출한 은판 1장과 연꽃 모양으로 자른 은판 3장을 겹쳐 연결하였는데, 하단부는 한 장의 은판을 타출하여 변형 여의두문 형태의 독특한 다리와 2단의 연파문대, 원형 대좌부 등을 표현하였습니다. 뚜껑으로 쓰인 라마탑형 용기는 상륜부와 계란형 탑신부를 따로 만들어 결합한 것으로, 한 장의 은판으로 제작한 상륜부는 고도의 타출기법을 보여줍니다.
한편 원통형 은판의 표면에는 ‘奮忠定難匡復燮理佐命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守門下侍中 李成桂 三韓國大夫人 康氏 勿其氏’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불사의 핵심 발원자인 이성계와 그 부인 강씨를 기록한 것입니다. ‘奮忠定難…守門下侍中’은 1389년 공양왕 옹립 후에 받은 위호로서, 사실상 왕을 능가하는 권력자 이성계의 위상을 담고 있습니다. 그처럼 대단한 이성계의 불사에서 첫째 부인 한씨(韓氏) 대신 둘째 부인 강씨가 이름을 올린 연유는 잘 알 수 없습니다. 물론 한씨는 불사 넉 달 후에 신병으로 사망하지만, 아무리 건강이 나빴다 하더라도 이름조차 새겨 넣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적이 궁금합니다.
이성계 부부에 이어 새긴 물기씨(勿其氏)는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사리기 제작에 참여한 기술자일 가능성도 있으나, 당대 최고의 지위에 있던 두 사람과 아무런 형식적 구분도 없이 장인의 이름을 이어 새겼을지 의문입니다. 혹 이들 부부와 각별한 인연이 있는 인물일지도 모릅니다. 그 점에서는 여진인과 같은 외국인일 가능성도 전혀 배제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라마탑형 사리기는 보통의 고려 후기 사리갖춤에서는 바깥쪽에 사용됩니다. 그런데 이성계 발원 사리갖춤에서는 가장 안쪽에 모셔지고 그 바깥을 뒤에 볼 팔각당형 사리기가 감쌉니다. 보통 사리를 직접 봉안하는 가장 안쪽 사리기가 제일 중요시되고 재질도 가장 값비싼 것을 사용하는 점을 감안할 때, 당시 발원자들이 라마탑 형식을 전통적인 팔각당 또는 다각탑 형식보다 더 의미 있는 것으로 인식했던 것일까요? 라마탑형 사리기의 제작 시기는 명문에 보이지 않으나, 기법과 양식 면에서 유사한 팔각당형 사리기가 만들어진 1390년 3월경에 두 사리기가 한 세트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팔각당형 사리기
라마탑형 사리기를 품은 것은 은제금도금 팔각당형 사리기일 것입니다. 팔각당형 사리기도 라마탑형 사리기처럼 연화형 대좌와 팔각형 은판, 팔각당형 뚜껑 등 각 부분을 따로 제작하여 결합한 형태입니다. 팔각형 은판의 표면에는 종서(縱書)와 횡서(橫書)로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庚午년(1390년, 공민왕 2) 3월에 사리탑을 조성하여 모신다는 내용과 발원자들의 이름이 보입니다. 강양군부인(江陽郡夫人) 이씨(李氏), 낙안군부인(樂安郡夫人) 김씨(金氏)(혹은 전씨(全氏)) 등 상류층 여성 신도들과 함께 발원에 참여한 사람들 중 주목되는 것은 승려 월암(月菴)과 영삼사사(領三司事) 홍영통(洪永通), 동지밀직(同知密直) 황희석(黃希), 그리고 박자청(朴子靑)입니다.
월암은 이성계가 일찍이 보살피던 승려로서 뒤에 볼 백자발의 명문에도 이름이 나옵니다. 그는 이성계와의 인연으로 사리갖춤 불사에서 봉안 의례와 관련하여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홍영통은 유명한 재상 홍자번의 증손으로, 신돈 집권 시 중용되었으나 신돈 몰락과 더불어 유배된 인물입니다. 명재상으로 이름을 떨친 증조부와 달리 그는 비리로 악명 높던 이인임과 밀착하여 원성을 듣고, 정당한 업무 수행을 하던 관리들을 폭행하는 등 많은 악행으로 조정 관료들의 비난을 받았으나, 그때마다 우왕의 인척이라 하여 무거운 처벌에서 비껴나며 최고위 관직까지 역임하였습니다. 구시대적 인물의 전형이면서도 후에 조선 개국 공신에 책록된 연유는 알 수 없으나, 어떤 식으로든 조선 개국 과정에 기여를 했을 것입니다. 이 사리갖춤 불사 외에도 이전부터 이성계와 함께 불사에 참여한 예들이 확인되지만, 그것만으로 공신에 책록되지는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황희석(黃希)은 1388년 요동 정벌시 청주상만호(靑州上萬戶)로 이성계 휘하에 있으면서 위화도 회군 이후 회군공신에 책록되고, 1392년에 살해된 정몽주 일파의 단죄 요청을 주도하는 등의 활약으로 개국공신이 된 황희석(黃希碩)과 동일 인물일 것입니다. 그가 환속한 승려인데도 개국공신에 책록된 것은 잘못이라는 태종 때 권희달의 주장이 있는 것으로 보아, 회군공신인 데다 불교계와의 깊은 인연으로 이성계의 사리갖춤 불사에 동참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황희석의 가인(家人)으로서 태조 즉위 시 중랑장(中郞將)이 되고 1395년(태조 4)에 원종공신녹권을 받은 박자청의 이름도 보입니다. 그가 태종 연간에 토목 공사 감역관으로 이름을 떨친 것이나, 은(銀) 채굴을 책임졌던 일, 사리기 제작을 맡은 인물로 추정되는 나득부(羅得富), 이씨(李氏), ○룡(竜) 등과 함께 명문 맨 끝부분에 기록된 점, 그리고 사리기에 돌아가며 새긴 8구의 합장한 불입상이 1408년 박자청이 감역한 태조(太祖) 건원릉(建元陵)의 무인석상(武人石像)과 양식적 친연성(둥그스름한 어깨, 귀가 크고 넓적한 얼굴 모습, 양쪽 발을 벌리고 서 있는 자세 등)이 있다는 견해 등을 감안하면, 이성계 휘하인 황희석의 가인으로 있으면서 장인으로서의 전문성이 인정되어 동참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성계 발원 사리갖춤은 조선 초 저명한 토목 감역관 박자청의 앞선 시기 활동상을 보여 주는 자료도 되는 셈입니다.
청동발, 백자발, 그리고 명문 없는 유물들
라마탑형 사리기와 팔각당형 사리기를 봉안한 것은 청동발입니다. 구연부 바깥 면에 ‘洪武二十四年辛未二月日造舍利盒施主信堅妙明朴竜’이라는 명문이 점각(點刻)으로 새겨져 있어서, 신미년(1391년) 2월 어느 날, 신견(信堅), 묘명(妙明), 박룡(朴竜) 등 3인이 시주하여 사리합으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원래는 지금은 전하지 않는 뚜껑과 한 세트를 이루어 합의 형태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견과 묘명은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1379년))에도 그 이름이 보여서 나옹의 문도들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끝에 기록된 박룡은 발을 만든 장인인 듯하지만, 분명치 않습니다. 발의 안팎 면에 동심원으로 가질한 흔적이 있어 고려 말의 보기 드문 기년명 방짜유기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성계 발원 사리갖춤의 발원자와 발원 내용, 제작 시기, 사리갖춤 봉안 장소 등 불사에 관한 종합적인 정보를 보여주는 것은 백자발1과 백자발2에 새긴 명문들입니다. 백자발1의 바깥 면에는 앞의 팔각당형 사리기에서 본 월암과 이성계(송헌시중(松軒侍中)에서 송헌은 이성계의 호이다), 그리고 만여 명의 사람들이 1391년(공양왕 3) 4월, 장차 미륵의 세상이 오기를 기다리며 발원한다는 내용의 명문이 음각되어 있습니다. 이 발은 뒤에 볼 백자발2와 겹쳐지기 힘든 크기, 함께 발견된 백자 향로와의 관계, 당시 유행한 매향(埋香) 풍습과 미륵 신앙 등을 감안할 때 사리 봉안을 위한 용기라기보다 향목(香木) 봉안용 향합(香盒)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가 유력합니다.
한편 앞서 본 청동발을 봉안한 것은 백자발2일 것입니다. 백자발2는 굽 부분에 “辛未四月日防山砂器匠 沈竜 同發願比丘 信寬”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신미(辛未)년(1391년) 4월에 방산의 사기장 심룡이 그릇을 만들고 승려 신관이 함께 발원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방산이란 지금의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으로, 근래에 이곳 장평리, 송현리, 금악리 일대에서 이 발과 태토, 유약, 번조 방식이 공통되는 14∼15세기경의 백자편들이 발견된 바 있습니다.
백자발을 만든 도공 심룡은 1395년 간행된『李原吉開國原從功臣錄券』에 ‘前郎將 沈龍’이라고 기록된 인물과 동일 인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앞의 팔각당형 사리기 명문에 기록된 박자청이 태조 즉위 때에 중랑장으로서 개국원종공신이 된 사실은 이러한 추정에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승려 신관은 1418년의 三千浦埋香岩刻碑文에 대화주(大化主)로 등장하는 승려 신관(信寬)과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백자발2에는 또 하나의 명문이 그릇 안쪽 면에 새겨져 있습니다. ‘金剛山毘盧峯舍利安遊記’로 시작하는, 앞서 본 팔각당형 사리기의 명문과 백자발1의 명문을 한 데 섞은 놓은 내용의 것인데, 신미년(1391년) 5월에 이성계와 부인 강씨, 승려 월암, 그리고 여러 상류층 여성들이 만 명의 사람들과 함께 비로봉에 사리갖춤을 모시고 미륵의 하생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부분적으로 파손되어 명문 일부가 망실되었고, 유약으로 덮여 판독하기 어려운 글자도 있지만, 그릇의 크기나 ‘金剛山毘盧峯舍利安遊記’라는 제목 성격의 글이 있는 점에서, 사리갖춤 가운데 가장 바깥쪽 용기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2 백자발2(안쪽 면). 〈출처:『국립춘천박물관』(국립춘천박물관, 2002년), 119쪽.〉
3 백자발2(굽 부분). 〈출처:주경미, 앞의 논문, 49쪽 도13.〉
백자발1과 백자발2는 뒤에 볼 백자발3과 백자발4 및 백자향로와 함께 도자사적인 의미가 큽니다. 고려백자와는 다른 새로운 백자로서, 현재까지 확인된 기년명 경질백자(硬質白磁)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인 까닭입니다. 푸른빛 감도는 유약이라든가 태토 사용 등에서 아직 질적으로 그리 뛰어나지는 않지만, 조선시대 경질백자의 선행 양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를 생산한 방산 지역의 중요성 또한 높여주고 있습니다.
한편 앞서 살핀 5점의 명문 유물 외에 이성계 발원 사리갖춤에는 명문이 없는 4점의 유물이 더 있습니다. 백자발3과 백자발4, 백자향로 1점, 그리고 은제이소(銀製耳搔) 1점이 그것입니다.
백자발3과 백자발4는 각기 백자발1, 백자발2와 한 세트로서 뚜껑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도자기를 마주 포개어 합(盒)을 이루게 한 예는 일찍이 11세기경의 영암 청풍사지 오층석탑 출토 청자사리합에서도 보입니다.
2 백자발4, 고려 1391년, 높이 9.8cm. 〈출처:『국립춘천박물관』(국립춘천박물관, 2002년), 118쪽 중에서.〉
3 청자사리합, 영암 청풍사지 오층석탑 출토, 고려 11세기, 높이 8.5cm, 전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출처:『佛舍利莊嚴』(국립중앙박물관, 1991년), 76쪽.〉
백자향로는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향완의 형식을 따르면서도, 나팔형의 기대(器臺) 대신 굽이 달린 독특한 형식을 보여줍니다. 은제이소는 얇고 긴 은판을 두드려 만든 것으로 모양이 귀이개를 닮았다 하여 이소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나, 실제로는 사리를 옮기는 도구일 것입니다.
2 은제이소, 고려 1390∼1391년, 길이 15.5cm. 〈출처:국립중앙박물관 표준유물시스템.〉
금강산 비로봉
이성계가 사리갖춤을 봉안한 금강산에는 고려 태조 왕건과 관련한 이야기가 전합니다. 태조가 이곳에 올라 담무갈보살의 현신을 목격하고 예를 갖춘 것을 기념하여 정양사(正陽寺)를 세웠다는 설화가 그것입니다. 1307년에 노영(魯英)이 그린 <담무갈보살ㆍ지장보살 현신도(魯英筆曇無竭菩薩地藏菩薩現身圖)>(이명, 흑칠금니소병(黑漆金泥小屛))에는 태조가 담무갈보살에 엎드려 예를 갖추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노영 필 담무갈보살ㆍ지장보살 현신도(魯英筆曇無竭菩薩地藏菩薩現身圖), 고려 1307년, 세로 22.4cm, 가로 10.1cm, 보물, 본관12360 〈출처:『고려시대를 가다』(국립중앙박물관, 2009년), 18쪽의 원판. 〉
노영 필 담무갈보살ㆍ지장보살 현신도(魯英筆曇無竭菩薩地藏菩薩現身圖) 중 현신한 담무갈보살에게 엎드려 예(禮)를 갖추는 태조 왕건의 확대 모습
금강산이 언제부터 불교 성지로 인식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미 14세기에는 중요한 불교 성지이자 영험한 기복도량이라는 인식이 널리 확산되어 있었습니다. 1343년(충혜왕 복위4) 기황후가 원나라 황제를 위해 이곳에 장안사를 중창한 일이나, 원나라 황제들이 시주하여 표훈사를 중창한 것, 1360년대에 나옹이나 무학 같은 고승 등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하곤 한 일 등은 당시 불교계에서 금강산이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를 잘 말해줍니다. 이성계가 비상한 시기에 미륵의 하생을 발원하며 사리갖춤을 금강산에, 그것도 가장 높은 봉우리에 모신 것도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일입니다.
나오며
이성계 발원 사리갖춤은 조선 전기 미술로 이어지는 미술사의 흐름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은제도금 사리기에 사용된 부분 도금 기법과 타출 기법이 고려 후기 당시 금속공예의 그것과는 다르다든가, 사리기에 새긴 불상의 모습이 고려 후기의 불화나 불교조각보다 조선 전기의 석상(石像)과 양식적으로 친연성이 있다는 지적,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선 경질백자의 선행 양식으로 볼 수 있는 새로운 경질백자가 사용된 점 등은 그러한 평가의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이 사리갖춤은 역사적인 유물로도 상당한 매력이 있습니다. 곳곳에 새긴 명문은 그 기년을 통해 앞서 말한 미술사적 해석의 시대적 기준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내용을 통해서는 이 불사가 단순한 종교 행사를 넘어 역성혁명을 목전에 둔 이성계가 미륵의 하생을 기원하며 불사리를 봉안한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의식(儀式)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익히 알려진 일부 조선 개국공신들의 고려 말 행적을 엿볼 수 있는 덤도 있습니다.
대단치 않은 변방 세력가의 자손으로서 왜구와 홍건적을 물리치며 전장에서 세월을 보낸 신흥무장 이성계. 그가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고 권문세가 출신의 최영을 비롯하여 여러 정적을 제거한 지 3년째 되는 해에, 인연 깊은 불자들과 만여 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불교 성지 금강산에 불사리를 모신 것을 범상한 불사로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필시 이성계는 자신의 주도로 새로운 구원의 세상을 만들 수 있음을 불사리 봉안이라는 최고의 제의(祭儀)를 통해 선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당시 정치 상황이 상당히 극적으로 전개되던 점에서도 이러한 추측은 개연성을 갖습니다. 금강산 비로봉에 사리갖춤을 봉안하던 바로 그 달(1391년 5월), 이성계를 추종하는 개혁파 관료들이 고려 최대의 현안이던 토지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전대미문의 개혁 조치를 단행하였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리갖춤 불사와 이 개혁조치는 새 왕조 개창과 이성계의 등극을 향한 막바지 정치 일정의 극적 이벤트로서 기획된 것이 아니었나 합니다. 그리고 이성계 세력에게는, 1년 뒤의 조선 왕조 개창이야말로 자신들과 백성을 위해 간구했던 미륵하생과 용화삼회의 현실 버전이었을 것입니다. 한국미술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 이성계 발원 사리갖춤은 이성계의 대망과 5백년 고려의 낙조가 교차하는 실로 역사적인 유물이라 할 만합니다.
1) 이성계 발원 사리갖춤에 대해서는 최근 주경미 교수에 의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정리가 이루어져 큰 도움이 됩니다(주경미, 2008, 3, 「李成桂發願 佛舍利莊嚴具의 硏究」(미술사학연구257, 한국미술사학회). 이 글 역시 주 교수의 논문에 의거한 것입니다. 명문의 등장인물에 대한 서술의 일부와 불사 당시 정치 상황에 대해서만 필자가 보태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