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사대부와 명나라 사신의 시 대결, 봉사조선창화시권 : 서윤희

대명외교의 생생한 자료, 《봉사조선창화시권》

《봉사조권창화시권(奉使朝鮮倡和詩卷)》은 조선 세종 32년(1450)에 명(明) 7대 황제 경제(景帝, 재위 1449~1457)의 즉위를 조선에 알리러 온 명나라 사신과 그를 맞이한 조선의 원접사(遠接使) 사이에 주고받은 시[倡和詩]를 모아 두루마리 형식으로 엮은 것입니다. 이 시권에는 명나라 사신 예겸(倪謙, 1415~1479)의 <설제등루부(雪霽登樓賦)>와 이에 화답한 원접사 신숙주(申叔舟, 1417~1475)의 <화설제등루부(和雪霽登樓賦)> 2편의 부(賦)와 33편의 시(詩)를 포함, 총 35편의 글이 담겨 있습니다. 시는 예겸이 15편, 정인지(鄭麟趾, 1396~1478)와 신숙주가 각각 6편, 성삼문(成三問, 1418~1456)이 5편을 남기고 있는데, 모두 직접 쓰고 자신들의 도장을 찍었습니다.

사진. 예겸과 성삼문의 창화시,《봉사조선창화시권》중

예겸과 성삼문의 창화시,《봉사조선창화시권》중, 조선 1450년, 33 × 1600 cm, 보물

이 시권의 겉표지에는 ‘명예문희공 봉사조선창화시권(明倪文僖公奉使朝鮮倡和詩卷)’이란 제목[題籤]과 함께 ‘光緖乙巳重裝’, ‘唐風樓藏’이라고 표기되어 청(淸) 광서 31년(1905) ‘당풍루(唐風樓)’란 서실(書室)을 갖고 있었던 청말 금석학자 나진옥(羅振玉, 1866~1940)이 원본을 다시 꾸민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두루마리를 펴면 맨 앞에는 예겸과 같은 시대 사람인 왕숙안(王叔安)이 전서체(篆書體)로 쓴 ‘봉사조선창화시책(奉使朝鮮倡和詩冊)’이란 글씨가 나오고, 뒤에는 청의 당한제(唐翰題)와 나진옥이 쓴 발문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후 1958년에 작성된 김상기(金庠基)․이병도(李丙燾)․김두종(金斗鍾)․이용희(李用熙)․전형필(全鎣弼)․원충희(元忠喜) 6인의 감정기(鑑定記)가 실려 있습니다.

조선 전기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 자료는 당시 조선과 명 사이의 생생한 외교 관계 기록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등이 직접 쓴 글씨를 살펴 볼 수 있어 조선 전기 서예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됩니다.

사진. 1 《봉사조선창화시권》제첨 2 왕숙안, 봉사조선창화시책(奉使朝鮮倡和詩冊), 《봉사조선창화시권》의 앞부분

1 《봉사조선창화시권》제첨
2 왕숙안, 봉사조선창화시책(奉使朝鮮倡和詩冊), 《봉사조선창화시권》의 앞부분
조선과 명의 조공 관계의 시작

평민 출신으로서 명 제국을 건설한 태조(太祖, 재위 1368~1398) 주원장(朱元璋)은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외교 관계에서도 그는 조선이 북원(北元, 주원장에게 쫓겨 몽골 지역으로 간 원나라의 잔여 세력)과 계속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외교문서에 불경한 어구를 썼다는 생트집을 잡아 조선의 사신을 억류하거나 입경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반해 새로운 왕조를 개창한 조선으로서는 당시 동아시아의 최강국인 명의 승인을 얻어야만 조선 건국을 합법화하고 왕권의 정통성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1년에 세 번 사신을 파견할 수 있도록 지극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나 명 태조의 강경한 입장은 계속 되었고 그가 죽고 나서야 비로소 명과 조선의 관계는 우호적이고 정상적인 책봉(冊封)-조공(朝貢) 관계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습니다.

명 경제의 즉위를 알리러 온 칙사 예겸과 그 의미

1450년(세종 32) 예겸(倪謙)은 명 경제의 즉위를 조선에 알리러 왔습니다. 그 전해에 몽고의 한 부족인 오이라트(瓦剌) 에센(Esen, 也先)이 명을 침입해 오자, 당시 권세를 휘두르던 환관 왕진(王振)이 명의 6대 황제 영종(英宗, 재위 1457∼1464)에게 50만 대군을 직접 이끌고 나설 것을 권하였습니다. 영종은 친정(親征)에 나섰으나 토목보(土木堡)에서 추격해 오던 오이라트 군에게 포위되어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영종이 포로가 되자 그의 동생이 등극하게 되는데 그가 경제입니다.

한림원시강 예겸이 부사 사마순(司馬恂)과 함께 경제의 등극조서(登極詔書)를 반포하기 위해 북경을 떠난 것은 1449년 12월 13일의 일입니다. 북경에서 요양까지 27일, 요동에서 한양까지 21일, 한양에서 머문 것이 20일, 다시 한양에서 요동까지 14일이 걸렸습니다. 예겸이 조선 사행길에 지은 글들을 모아 1469년에 『요해편(遼海編)』을 출판하였는데, 제3권 조선기사(朝鮮紀事)에는 1월 10일 요동에서 출발하여, 한양에서 머물고, 다시 2월 3일 압록강으로 돌아오는 50여 일간의 여정이 일기 형식으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요해편』의 1, 2권에는 북경에서 한양, 다시 북경으로 돌아오는 왕복 과정에서의 풍광과 감상 등을 읊은 시가 수록되어 있어 양자를 함께 살펴보면 당시 사절단의 모습을 그대로 복원할 수 있습니다. 《봉사조선창화시권》은 이 여정 가운데 한양에 들어와 성균관 선성묘(宣聖墓)에서 배알하는 일정으로부터 시작하여 압록강으로 돌아갈 때까지의 일정에서 주고받은 시를 가려 뽑아 엮은 것입니다.

예겸이 조선 사신단의 정사(正使)로 선발된 이유는 그가 당대의 동료들로부터 유학과 문장에 탁월한 능력을 지닌 일류의 ‘문학지사(文學之士)’로 평가받았고 관직이 황제의 최측근인 한림원시강(翰林院侍講)으로 한중 관계를 잘 조정할 수 있는 인물로 기대되었기 때문입니다. 예겸이 사신으로 조선에 파견되기 전에는 주로 환관들이 조선에 사신으로 와서 온갖 횡포를 부렸기 때문에 문학지사의 조선 파견은 조선에서는 더욱더 갈망하던 일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예겸의 출사 소식은 조선을 긴장시켰고, 당대 최고의 문학지사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에게 그들을 맞이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예겸을 맞이한 조선의 원접사 정인지․성삼문․신숙주

정인지, 성삼문, 신숙주는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집현전 출신 관료들로서 당시 정인지는 55세, 신숙주는 34세, 성삼문은 33세였습니다. 명의 사신 예겸은 36세였습니다. 예겸이 조선의 국경에 들어온 후 기행시는 여러 편 지었으나, 조선의 접반사와 시를 주고받은 것은 성균관 선성묘(宣聖墓)에 참배한 이후부터였고 양자 사이에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러 차례 시를 주고받았던 것입니다. 시를 주고받은 초기에는 서로에 대한 탐색과 미묘한 대결 구도가 펼쳐졌으나 시일이 지나면서 서로에 대한 정을 쌓으며 상대에 대한 문학적, 인격적인 존경심을 나타내며 헤어질 때는 서로 눈물을 흘릴 정도였습니다. 예겸은 정인지에 대해 “그대와의 하룻밤 대화는 10년 동안 책을 읽는 것보다 낫다.”라고 말하며 감탄하였고 자신과 나이가 비슷했던 신숙주와 성삼문을 사랑하여 형제의 의를 맺기까지 했다고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載叢話)』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사진. 예겸과 정인지의 창화시, 《봉사조선창화시권》중

예겸과 정인지의 창화시, 《봉사조선창화시권》중
『황화집』의 모범이 된 《봉사조선창화시권》

명의 사신과 이를 맞는 조선의 원접사들이 서로 주고받은 시를 모아 책으로 엮은 것을 ‘황화집(皇華集)’이라 합니다. 이렇게 시를 주고받기 시작한 것은 명의 경제와 조선 세종대로부터 비롯됩니다. 그 이전에 명은 주로 조선 출신의 환관을 사신으로 보냈고 그들은 명의 조칙을 전달하는 심부름꾼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경제가 즉위하면서부터 환관 대신 문학과 경학에 뛰어난 문신들을 조선에 주로 파견하였습니다. 이 《봉사조선창화시권》을 시발로 인조 11년(1633)까지 180여 년 간 모두 24차례에 걸쳐 주고받은 시들을 모아 각 시기별로『황화집』이 편찬되었고 영조 49년(1773)에는 영조의 명에 따라 그동안 개별적으로 전하여 오던 것을 수집 정리하여 25책 50권 규모의 『황화집』을 새로이 편찬하였습니다.

사진. 예겸과 신숙주의 창화시, 《봉사조선창화시권》중

예겸과 신숙주의 창화시, 《봉사조선창화시권》중
주고받은 시를 통한 조선과 명의 자존심 대결

명나라 사신과의 문학적 교유(交遊)는 단순히 조선 사대부 한 개인의 친분 관계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명 사신과의 교유를 통해 조선의 높은 문화 수준을 중국에 널리 알릴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명나라 측의 조선에 대한 인식을 드높이는 계기를 마련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예겸의 시에 대한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의 품격 높은 화답은 예겸을 놀라게 하였고, 조선과 명의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명나라 사신들을 접대하기 위해 조선은 물질적인 공납의 제공뿐 아니라 시문 수창에 응할 인재를 뽑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노력들이 있었기에 조선은 명이 멸망할 때까지 오랫동안 명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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