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금빛의 산수, 조선 중기 이금산수화 : 오다연

검은 비단 위에 금빛 산수가 펼쳐져 있습니다. 그림을 천천히 살펴보면 화면 앞부분에 커다란 소나무가 서 있는 절벽이 있습니다. 그 소나무를 중앙에 두고 좌우에는 누각이 한 채씩 있습니다. 절벽 끝에 세워진 누각에는 한 명의 인물이 앉아 가만히 산과 강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강 위에는 사람들을 태운 두 척의 배가 떠 있고 절벽 아래에는 말을 타고 막 다리를 건너 누각을 향해 올라가는 인물도 그려졌습니다. 오늘 누각에서는 작은 모임이 있나 봅니다. 저 멀리에는 산들이 그려졌는데 구불거리는 구름 위로 산봉우리의 일부만이 보여 마치 산들이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습니다. 리듬감이 느껴지는 필선과 강약이 있는 금빛의 농담이 어우러지면서 더욱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금산수>, 傳 이징, 조선 17세기, 비단에 이금, 87.9×63.3cm, 덕수1790 傳 이징, <이금산수>, 조선 17세기, 비단에 이금, 87.9×63.3cm, 덕수1790

이금화의 전통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작품은 이금(泥金)으로 그려져 <이금산수도>라고 불립니다. 이금은 매우 고운 금가루인 금분(金粉)을 아교풀에 개어 만든 안료로 금니(金泥)라고도 부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금은 귀하고 변하지 않으며 아름다운 광채를 지녀, 신성(神性)이나 왕권과 같은 절대적 권력을 상징하곤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종교적 상징으로서 이금이나 이은(泥銀)을 써 사경을 필사하였고 사경의 내용을 도해한 변상도 및 예배의 대상을 그린 이금불화를 제작하였습니다. 이금을 사용한 글과 그림은 금의 시각적 효과를 최대화하기 위해 바탕색을 금색과 보색인 자색(紫色)이나 감색(紺色), 흑색(黑色) 등 어두운 색으로 하였습니다.

금은 희귀하여 사용할 수 있는 계층이 한정적이었고, 조선시대에서도 신분에 따라 그 사용이 제한되었습니다. 왕실에서는 금을 사용할 특권이 있어 왕실에서 사용할 공예품 뿐 아니라 이금서화나 이금불화 등도 제작했습니다. 특히 16세기 중반,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는 불교의 부흥과 왕실의 안녕을 위해 ‘순금불화’를 대량으로 발원하기도 하였습니다. 문정왕후는 1565년 왕손의 생산을 기원하며 왕실재산을 사용하여 석가불, 미륵불, 약사불, 아미타불을 금화(金畫)와 채화(彩畫)로 각각 50폭씩 조성하게 하였습니다. 어두운 바탕 위에 금선묘로 그려진 200폭의 순금불화는 예배존상의 이미지를 넘어 문정왕후의 세력과 위상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선조(宣祖, 재위 1568~1608) 연간 왕실의 숭불이 약화되면서 순금불화의 제작은 자연스럽게 줄어듭니다. 그리고 감상을 위한 이금화가 제작되기 시작했습니다.

금으로 그린 감상화, 그리고 이금의 의미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까지 산수, 인물, 화조영모, 사군자 등을 이금으로 그린 그림이 다수 제작되었습니다. 이경윤(李慶胤, 1545~1611)·이영윤(李英胤, 1561~?) 형제, 이정(李霆, 1554~1626), 이징(李澄, 1581~1648년 이후), 김명국(金明國, 1600~1663이후)과 같은 화가들은 조선 중기 화단에서 유행했던 소재와 화법으로 감상화를 제작하며 이금을 사용했습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간송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성균관대학교박물관 등에 소장된 필자미상 이금화의 대부분은 이 시기 작품이며, 이는 그림의 양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그림에 왜 이금을 사용했을까요?

흥미롭게도 이 시기 이금을 감상화의 안료로 시도하고 이러한 흐름을 이끌었던 이들이 종실 화가였다는 점이 주목됩니다. 당시 엄격한 금의 규제정책에도 불구하고 종친들은 신분상으로 금이나 이금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왕실문화에 익숙했던 이들은 왕실에서 대량으로 제작한 순금불화나 이금으로 그려진 장식화 등에서 영향을 받았을 수 있습니다. 죽림수(竹林守) 이영윤은 20대부터 이금으로 화조영모화를 그렸는데, 16세기 후반에 활동한 시인, 임재(林悌, 1549~1587)가 이영윤의 이금화 수폭에 감사의 뜻을 표한 시가 남아있습니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이금산수영모화첩》은 소경산수인물화 8폭과 동물화 8폭으로 이루어졌는데 각 그림의 소재 및 화풍이 이경윤·영윤 형제의 화풍과 매우 유사합니다. 이 화첩은 17세기를 전후한 시점에 이경윤·영윤 형제 혹은 이들의 영향을 받은 화가가 제작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금니산수영모화첩》, 작자미상, 16~17세기, 비단에 금니, 27.2x22.3cm, 삼성박물관 리움 ⓒ삼성미술관 리움 작자미상, <금니산수영모화첩>,16~17세기, 비단에 금니, 27.2x22.3cm, 삼성박물관 리움 ⓒ삼성미술관 리움

유명한 종실화가인 석양정(石陽正) 이정(李霆, 1554-1626) 역시 이금을 사용하여 대나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는 1594년에 《삼청첩(三淸帖)》(간송미술관 소장)을 제작하며 왜란 중에 다친 상처를 회복하고 후손에 전할 평생의 작품을 남기고자 이금을 써서 그림을 그렸다고 밝혔습니다. 그 후 이정은 계속해서 이금죽을 제작하였고, 이정의 이금죽은 문인이었던 최립(崔岦, 1539~1612)과 서예가 한호(韓濩, 1543~1606) 등에 의해 사대부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사대부들은 이정의 이금죽에 대해 “일세의 보물”, “종영(宗英)의 기상이 있는 그림”, “유자(儒者)의 아취”, “영원불변의 광채” 등으로 언급했습니다. 당대의 지식인들은 그림 속 이금을 사치적이고 장식적인 안료가 아니라 대나무의 상징인 절개 등 유교의 덕목을 더욱 강조하는 안료로서 이해했습니다. 더불어 그 속에서 종실 화가의 기상이나 아취를 읽어내기도 했습니다.

화원 화가 이징이 그린 이금산수화와 그 영향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금산수도>는 관서나 인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징(李澄, 1581~1648년 이후)의 작품으로 전해져왔습니다. 1917년 『이왕가박물관소장품사진첩』에는 이 그림을 “이징의 <운봉강각(雲峰江閣>”로 게재하였고 1931년 조선명화전람회(朝鮮名畫展覽會)에서는 “이징의 <설봉강각지도(雪峰江閣之圖)>”로 소개하였습니다. 20세기 전반, 그림의 제목은 약간 바뀌었지만 화가는 그대로였습니다. 이후 박물관에서는 이 그림을 이징의 전칭작(傳稱作)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징은 이경윤의 서자로 어린 시절 부친과 숙부 이영윤 곁에서 회화를 익혀 이금화 제작에서도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징 전칭의 이금화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이금산수도>를 비롯하여 간송미술관 소장의 <고사한거(高士閑居)>와 <강산청원(江山淸遠)>, 조선미술박물관 소장 이금영모화 등이 있습니다. 이 이금화들은 화첩크기의 소품부터 족자까지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지만 이징의 수묵화 화법과 상통합니다. <이금산수도>는 조선 전기의 안견파 화풍과 조선 중기의 절파화풍이 혼합된 절충화법으로 그려졌습니다. 간송미술관본에 비해 필선의 구불거림이 심하며 바위의 질감이나 산세를 표현하기 위한 잔필선 및 선염이 풍부해졌습니다. 또한 조선 전기 전통적인 산수화의 3단 구성이 사라지고 한쪽으로 치우친 구성 대신 전경의 경물들이 중앙에 배치되고 리듬감 넘치는 원산이 분산되면서 수평감이 강화되었습니다. 이러한 특징과 회화적 요소들은 이징이 수묵으로 그린 《소경산수화첩》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징은 광해군조부터 화원이 되어 임진왜란 이후 훼손되거나 소실된 왕실의 그림을 복원하고 어람용 초대병풍의 도화(圖畫) 등 도감의 각종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이징이 복고적 화풍의 산수화 및 이금산수화를 상당수 그렸던 것은 조선 전기의 회화를 복원해야 했던 업무 뿐 아니라 인조(仁祖, 재위 1623~1649)의 취향과도 관계됩니다. 인조는 이징을 총애하여 관료들의 비난에도 그를 측근에 두고 많은 그림을 제작했습니다. 또한 이징은 인조조 도화서의 교수를 역임하면서 후배 화원을 육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당연히 그가 제작한 이금산수화는 후배 화원 및 직업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김명국(金明國, 1600~1663이후)의 《사시팔경도첩》 중 <이른 봄[初春]>은 <이금산수도>와 매우 유사하면서도 필선과 선염이 더욱 분방해졌습니다. 또한 17세기 중반 활동한 직업화가 전충효(全忠孝, ?~?)는 이금이나 송홧가루를 사용하여 산수화를 제작했습니다. 이징의 절충화풍이 보이는 전충효의 《소상팔경도첩》은 이금 대신 노란 송홧가루를 사용해 이금산수화와 유사한 효과를 갖게 되었니다. 당대 화단에서 이금화가 하나의 유행이 되자 이금을 구하기 어려웠던 화가들은 저렴한 송홧가루를 사용해 이를 모방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사시팔경도첩(四時八景圖帖)》, 김명국, 1662년, 묵견에 이금, 27.1×25.7cm, 본관5003 김명국,《사시팔경도첩(四時八景圖帖)》, 1662년, 묵견에 이금, 27.1×25.7cm, 본관5003

17세기 전반 조선은 왜란과 호란으로 국토가 황폐화되고 정치·경제적인 혼돈을 겪었습니다. 이 시기, 화가들은 이금을 사용하여 사군자나 영모화, 산수화를 제작하였고 어두운 바탕에서 빛은 내는 특별한 안료를 통해 그림의 주제를 더욱 강조하였습니다. 이금으로 그려진 산수는 수묵산수에 비해 훼손되지 않은 이상향의 산수를 효과적으로 시각화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금산수를 제작한 화가들과 이 그림을 좋아했던 사람들은 금빛 산수를 통해 고단한 현실에서 벗어나 꿈꾸듯 노닐 수 있는 낙원을 떠올렸던 것은 아닐까요?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출처표시+변경금지
국립중앙박물관이(가) 창작한 금빛의 산수, 조선 중기 이금산수화 저작물은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출처표시+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