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서산 보원사 터에서 발견된 부처 : 선유이

서산 보원사 터에서 발견된 금동불입상은 백제시대 불상 중에서도 비교적 이른 시기인 6세기 중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시기에 조성된 백제 불상은 대부분 사비시기(泗沘時期, 538~660) 수도였던 부여의 절터에서 발견되고 있어, 보원사 터 발견 금동불입상은 수도가 아닌 지방 사원에서 발견된 드문 예입니다. 비슷한 시기 부여의 절터에서 발견된 대표적인 불상으로는 부여 군수리 절터에서 발견된 부처와 보살상 등이 있습니다.

서산 보원사 터에서 발견된 부처, 백제 6세기 중후반, 높이 9.4cm

서산 보원사 터에서 발견된 부처, 백제 6세기 중후반, 높이 9.4cm

부여 군수리 절터에서 발견된 부처, 백제 6세기 중후반, 높이 13.5cm, 보물 부여 군수리 절터에서 발견된 부처, 백제 6세기 중후반,
높이 13.5cm, 보물

부여 군수리 절터에서 발견된 보살, 백제 6세기 중후반, 높이 11.2cm, 보물 부여 군수리 절터에서 발견된 보살, 백제 6세기 중후반,
높이 11.2cm, 보물

백제 사비시기 중국에서 부여로 가는 길에 위치한 보원사 터

백제 사비시기 태안반도 지역은 중국을 오가는 교통의 요지로, 이 지역의 불교유적은 태안, 서산, 예산을 거쳐 공주, 부여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따라 조성되었습니다. 서산 보원사 터는 가야산․상왕산․일락산 등 큰 산들로 둘러싸여, 가야협곡을 끼고 있는 분지(盆地)에 위치해 있는데, 보원사 터에서 3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가야협곡 입구에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마애삼존불(瑞山磨崖三尊佛, 옛 지정번호 국보 제84호)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태안마애삼존불(泰安磨崖三尊佛, 옛 지정번호 국보 제307호)이 있는 태안에서 서산을 거쳐 서산마애삼존불이 위치한 가야협곡 안쪽으로 좀 더 들어가면 보원사 터에 이르고, 이 길은 예산 화전리 사면석불(禮山花田里四面石佛, 옛 지정번호 보물 제794호)과 수덕사(修德寺)가 위치한 예산지역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보원사 터에서 발견된 백제시대 불상은 불상 그 자체가 갖는 가치 뿐 아니라, 발견된 위치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원사에 대해서는 통일신라시대 최치원(崔致遠, 857~?)이 남긴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의상(義湘, 625~702)을 계승한 화엄십사(華嚴十寺) 가운데 하나로 기록되어 있고, 현재 보원사 터에는 고려시대 조성된 오층석탑(普願寺址 五層石塔, 옛 지정번호 보물 제104호), 법인국사탑(法印國師塔, 옛 지정번호 보물 제105호)과 탑비(塔碑, 옛 지정번호 보물 제106호), 당간지주(幢竿支柱, 옛 지정번호 보물 제103호) 등이 남아있어 백제시대 이후에도 보원사의 규모가 상당했음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백제의 지방 사원에서 발견된 사비시기 금동부처

서산 보원사 터에서 발견된 금동부처는 높이 9.4cm의 작은 크기입니다. 뒷면 위아래로 부처의 몸에서 나온 빛을 표현한 광배(光背)를 고정하기 위한 장치가 남아있어, 원래는 광배가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뒷면 아래쪽에 양 발목의 윤곽을 만든 흔적이 있어, 원래는 하나의 광배 안에 불상과 두 보살상이 함께 표현된 일광삼존불(一光三尊佛)의 본존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연가 칠년」이 새겨진 부처, 고구려 539년 추정, 높이 17.7 cm, 국보

'연가 칠년'이 새겨진 부처, 고구려 539년 추정, 높이 17.7 cm, 국보

이 상은 '연가 칠년'이 새겨진 부처('延嘉七年'銘 金銅佛 立像, 539년 추정)와도 비교됩니다. 앞으로 살짝 숙인 머리와 정수리에 솟은 높은 육계(肉髻),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의 손갖춤[手印], 약간 오른쪽으로 치우쳐 흘러내린 옷 주름, 양쪽 어깨를 덮은 통견(通肩)의 대의(大衣)에 오른쪽 어깨에서 늘어진 옷자락이 왼쪽 팔목 위로 걸쳐지는 옷자락 표현 등에서 두 상이 서로 비슷한 면을 보입니다. 다만, 보원사 터에서 발견된 부처는 '연가 칠년'이 새겨진 부처에 비해 옷 주름의 굴곡이 줄어들고 좌우로 뻗친 옷자락의 기세가 약화되었으며, 손목에서 늘어뜨려진 옷자락의 끝단이 더욱 장식적이라는 점에서 '연가 칠년'이 새겨진 부처보다 좀 더 늦은 시기의 양식을 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옷 주름 등 불상의 양식적인 표현으로 그 상이 만들어진 시기를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보원사 터 발견 부처처럼 양쪽 어깨를 덮은 옷에 시무외·여원인의 손갖춤을 한, 서있는 자세의 부처는 6세기 전반에서 후반에 걸쳐 삼국에서 모두 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한 분의 독립된 부처[獨尊]로 나타나다가 6세기 후반에는 일광삼존불(一光三尊佛)의 본존으로 등장합니다. 이 중 '계미'가 새겨진 삼존불(563년)의 본존이 보원사 터 발견 부처와 비교됩니다. 이 상은 보원사 터 발견 부처와 손갖춤, 옷 입는 방법 등 세부적인 표현에서 비슷한 면을 보이며, 아래턱이 좁고 얼굴이 세장한 '연가 칠년'이 새겨진 부처에 비해 장방형의 얼굴에 살이 더 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보원사 터 발견 부처가 일광삼존불의 본존으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삼존불 형식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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