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백악춘효 - 빼앗긴 궁궐의 봄 : 김승익

백악(북악산)을 배경으로 조선 왕조 600년의 중심인 경복궁과 광화문의 풍경을 담은 이 두 그림은 20세기 초 근대화단을 대표하는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1861~1919)의 작품입니다. 작품의 상단에 각각 “乙卯夏日心田寫”, “乙卯秋日心田安中植”라는 글씨가 있어 화가가 1915년 을묘년 여름과 가을, 두 번에 걸쳐 그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화가는 두 작품에 모두 <백악춘효(白岳春曉)>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이는 백악의 봄날 새벽이라는 뜻입니다. 여름과 가을에 그렸지만 거의 동일한 구도를 유지하고 있어 하나의 주제의식을 가지고 그린 연작과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푸른 잎이 무성하고 잎에 물들기 시작한 작품 속 계절은 분명히 봄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웅장한 백악의 모습이 화면을 압도하지만 그 아래 자리 잡은 경복궁과 광화문의 모습도 화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구름 같은 연기에 둘러싸인 경복궁 전각의 처마와 용마루는 신비로운 느낌마저 자아냅니다.

안중식, <백악춘효>, 1915년, 비단에 엷은 색, 129.5×50.0cm, 근대231, 등록문화재 안중식, <백악춘효>, 1915년, 비단에 엷은 색, 129.5×50.0cm,
근대231, 등록문화재

안중식, <백악춘효>, 1915년, 비단에 엷은 색, 126.1×51.9cm, M901, 등록문화재 안중식, <백악춘효>, 1915년, 비단에 엷은 색, 126.1×51.9cm,
M901, 등록문화재

먼저 화면 중앙에 자리 잡은 광화문이 시선을 끕니다. 마치 오늘날 광화문 광장 한 복판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광화문이 정면으로 보입니다. 3개의 홍예문의 크기도 전체적인 비율에 잘 맞춰져 있고 14층 화강암 육축(陸築)의 층수도 상세하게 표현되었습니다. 광화문을 중심으로 교각들이 투시법에 따라 사선으로 늘어서 있고, 그 앞으로 조선에서 가장 크고 넓은 길인 육조(六朝) 거리가 이어집니다. 그리고 화면 아래에 해태상이 나뭇잎 사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당시 광화문과 육조 거리의 탁 트인 풍경은 조선의 상징으로서 외국인들이 찍은 사진이나 삽화에 많이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작품은 사진 속 풍경과 많이 달라 보입니다. 육조 거리의 양 옆으로 길게 늘어선 관아와 가옥의 모습은 그려지지 않았고 조선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를 오갔던 많은 사람들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림에서는 안개로 가득 차 있는 인적 없는 궁궐의 적막함이 감돌 뿐입니다. 가을본의 경우 그 안개는 더욱 넓게 퍼지면서 오른쪽 해태상마저 보이지 않습니다.

경복궁 광화문 육조거리-Otto E. Ehler 『Im Osten Asiens』(1896) 게재 사진 재촬영, 유리건판, 16.4×11.9cm, 건판17727

경복궁 광화문 육조거리-Otto E. Ehler 『Im Osten Asiens』(1896) 게재 사진 재촬영, 유리건판, 16.4×11.9cm, 건판17727

시선을 경복궁 내부로 돌려보면 화가가 이 작품에 여러 시점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확히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광화문과는 달리 경복궁 내부의 모습은 대각선의 조감 시점으로 그려졌습니다. 여름본의 경우 궁궐 내의 전각들이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고, 가을본의 경우 왼쪽으로 틀어져 있습니다. 이 조감 시점은 화면 아래 해태상의 표현과도 이어집니다. 여름본의 경우 경내의 조감 시점은 오른쪽 해태상의 시점과 동일하고, 가을본의 경우 왼쪽 해태상의 시점이 경복궁 내부의 표현 시점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대상을 비껴 내려 보는 조감 시점은 조선 후기 <동궐도(東闕圖)>에서 볼 수 있는데, 복잡한 궁궐 내부의 건물 배치를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여름본과 가을본 모두 광화문이 정면으로 보이도록 고정되어 있어 조감 시점이 엄밀하게 적용되지는 않았습니다. 궁궐 내부의 표현에 있어서도 기록화적인 성격이 강한 동궐도와는 달리 근정전과 경회루 등 주요 전각들의 지붕만이 그려져 있을 뿐, 내부의 모습은 울창한 수풀에 가려져 보이지 않습니다. 게다가 궁궐을 감싸고 있는 안개가 마치 현실을 벗어난 이상향과 같은 공간감을 만들어 내면서 육조 거리의 적막과 또 다른 신비한 고요가 궁궐 안을 지배합니다.

경복궁 뒤로 우뚝 솟아 있는 백악은 화면 안에서 더욱 낯선 공간감을 만들어 냅니다. 백악과 궁궐 사이의 거리감이나 크기의 비례는 완전히 어긋나 있고, 백악은 정면이나 조감 시점으로는 도저히 잡힐 수 없는 멀고 높은 곳에서 바라본 시점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거기에 북한산 자락에 위치한 성곽까지 그려져 있어, 높이와 거리로 볼 때 적어도 남산 자락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삼원법(三遠法)과 같은 여러 시점을 혼용한 전통 산수화의 시선과도 유사합니다. 뛰어난 산수화가였던 안중식은 경복궁과 백악산 아랫자락에 낮게 퍼져 있는 안개를 세필(細筆)의 곡선을 사용하지 않고 선염(渲染)으로 실감나게 그렸습니다. 백악을 그릴 때는 전통적인 남종화 수법의 수묵 필치와 수평적인 미점(米點)을 사용했지만 그 뒤로 보이는 북한산 자락 보현봉은 미점이나 준법(皴法)을 사용하지 않고 잔 붓질로 바위의 질감을 사실적으로 묘사했습니다. 하나의 산수화로 이 풍경을 바라보면 백악의 아랫자락에 안개로 둘러싸인 조선의 궁궐은 백악으로 대표되는 대자연의 일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품 속 궁궐은 전통 산수화에서 그려진 누각이나 정자와 달리 화면 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병풍처럼 둘러쳐 있는 백악의 위용을 그대로 흡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조선 건국 이후 처음 경복궁의 터를 잡을 때, 풍수지리에 입각해 북쪽을 지키는 현무(玄武)에 해당하는 백악에 안기도록 자리 잡았던 것을 감안한다면, 작품 속 백악의 모습은 이러한 경복궁의 입지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진이나 실제 눈에 보이는 것과 달리 백악의 존재를 더욱 부각 시켜 그린 것은 이러한 궁궐이 지닌 장소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의도적인 설정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시정(始政) 5년 조선물산공진회장의 모습>, 『매일신보』(1915.11.1.)

<시정(始政) 5년 조선물산공진회장의 모습>, 『매일신보』(1915.11.1.)

그런데 안중식이 이 작품을 제작할 당시인 1915년의 경복궁은 그림에 나타난 풍경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조선왕조 600년의 중심 무대였던 경복궁은 1910년 이후 일제에 의해 원형이 크게 파괴되기 시작했습니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을 거치면서 경운궁(현재 덕수궁)이 황실의 중심 공간으로 부상했고, 경복궁은 국권의 상징적 공간으로만 기능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 왕조의 정궁으로서 갖는 위계성과 상징성을 훼손하기 위하여 경복궁 안에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을 계획하고 1912년부터 계획적으로 경복궁의 행각과 다리 등을 철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작품이 그려진 1915년에는 이른바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始政五年記念朝鮮物産共進會)'를 개최한다는 핑계로 거의 모든 전각들을 철거하여 4,000여 칸에 이르는 원래의 건물들이 대부분 없어졌고, 5,226평의 대지에 18개에 이르는 서양식 임시 진열관들이 궁궐 내부를 차지했습니다. 당시 경복궁은 전국 각지에서 모인 10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방문하는 일제의 홍보 공간으로 이용되었고, 이후에도 조선총독부의 식민 통치를 기념하고 미화하는 박람회가 지속적으로 개최되었습니다. 안중식이 그린 인적 없는 거리와 수풀이 우거진 궁궐은 사실 서양식 건축물들이 공존하고 거리에는 밤낮으로 구경꾼들이 북적이던 공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화가 안중식은 왜 현실과는 다른 풍경으로 경복궁을 재현했던 것일까요?

화가 안중식은 개화 지식인이었던 당시 서화가들과는 달리 도화서 출신의 화원화가였습니다. 1881년 20세 때 조석진(趙錫晉, 1853~1920)과 함께 영선사(領選使) 일행의 제도사(製圖士)로 선발되어 중국 허베이 성(河北省) 톈진(天津)에서 1년 동안 기계 제도법을 배우고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그는 대한제국 황실과도 인연이 깊었습니다. 1902년에는 조석진과 함께 주관화사(主管畵師)로서 조석진과 함께 고종과 순종의 초상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이 공로로 통진(通津), 양천(陽川) 군수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경술국치 이후인 1911년에는 이왕직의 후원을 얻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미술 교육 기관인 서화미술원(書畫美術院)을 설립했습니다. 화가로서의 활동뿐만 아니라 민중계몽단체인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에서 활동하기도 했고, 오세창, 손병희, 권동진, 최린 등 3.1운동을 주도했던 민족대표 33인들과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경력으로 볼 때, 백악을 바라보고 선 노년의 화가가 600여 년 간 이어져 온 주인이 떠나고 대규모 위락시설로 변해버린 궁궐의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화가의 의도를 좀 더 유추해 보기 위해 <백악춘효>라는 작품 제목으로 다시 돌아가 봅니다. 앞서 서술했다시피 이 작품에서 경복궁의 주산으로서 강조된 백악의 의미를 고려해보면 경복궁을 지칭하는 ‘북궐(北闕)’이 아닌 백악을 제목에 쓴 것은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그렇다면 ‘춘효(春曉)’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요? 봄날 새벽이라는 의미로 미루어 보면 지나간 조선왕조의 영화로운 날들에 대한 그리움이나 아직 맞이하지 못한 조선의 봄에 대한 염원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제목이 당나라의 시인 맹호연(孟浩然, 689~740)의 유명한 시 「춘효(春曉)」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는 연구도 있습니다. “봄잠에 빠져 새벽이 오는 줄 몰랐다(春眠不覺曉)”는 내용으로 시작되는 이 시에서 “지난 밤 들려오던 비바람 소리(夜來風雨聲)”와 같이 사라져가는 궁궐을 잊지 않고자 옛 모습을 그렸다는 것입니다. 작품을 제작한 시기와 작품 속 맥락을 고려해 본다면, 옛 궁궐의 지위와 위상을 복원함으로써 망국의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화가의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 보입니다.

그러나 화가의 시선이 지나간 과거나 다가올 미래에만 향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적 없는 적막한 조선의 거리, 안개에 휘감겨 사라져 버린 해태상, 굳게 닫힌 광화문, 신비로운 정적이 감도는 궁궐의 공간 등 화면 곳곳에 마치 망국의 현실을 암시하는 듯한 대상들이 여전히 관람자의 시선을 끕니다. 이곳이 조선의 궁궐임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광화문 현판에 정작 화가는 아무런 글씨를 써 넣지 않았습니다. 백악의 그늘 아래 펼쳐진 고요한 궁궐의 모습은 맹호연의 시에서 말하는 “새벽이 오는 줄 모르고 빠져 든 봄잠”처럼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왕실의 현재를 바라보는 화가의 시선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은 언뜻 조선시대 산수화나 궁궐도를 계승한 평범한 그림으로 보이지만, 일제강점기 경복궁이라는 시공간 속에서 바라볼 때 그 안에는 화면에 보이는 것 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지도 모릅니다. 20세기 초 전통 화단을 이끌었던 안중식의 대표작 <백악춘효>는 단순히 옛 궁궐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을 넘어 일제강점기 우리 근대 화가의 현실 인식과 이상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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