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이사지왕'을 새긴 금관총 큰칼 : 김대환

경주 금관총은 최초로 신라 금관이 출토된 무덤으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정작 무덤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금관총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비석이나 묘지석(墓誌石)이 없기 때문입니다. 금관이 출토되고 92년이 지난 2013년, 국립중앙박물관은 금관총에서 출토된 세고리 자루 큰칼[三累環頭大刀]을 보존 처리하는 과정에서 ‘尒斯智王(이사지왕)’이라는 글자를 발견하였습니다. 이것은 신라 고분 부장품에서 확인된 최초의 왕 이름이기 때문에 학계와 일반인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금관총 출토 세고리 자루 큰칼

일제강점기인 1921년 9월, 우연히 부장품이 드러나 수습된 금관총에는 세 자루의 큰칼이 부장되어 있었습니다. 세 점 모두 금 또는 금동으로 장식되어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칼이라기보다는 소유자의 지위와 위신을 드러내는 귀중품입니다. 학계 연구자는 이런 칼을 장식큰칼[裝飾大刀]이라고 부릅니다. 흥미로운 것은 세 점 모두 손잡이 끝장식이 세 개의 고리로 구성된 세고리 자루 큰칼이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모티브를 가진 큰칼은 5~6세기 신라에서 크게 유행한 양식이었으며, 왕족이나 지위가 높은 귀족만이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사지왕’이 새겨진 세고리 자루 큰칼, 경주 금관총, 신라, 길이 86cm, K618

‘이사지왕’이 새겨진 세고리 자루 큰칼, 경주 금관총, 신라, 길이 86cm, K618

이 가운데 ‘이사지왕(尒斯智王)’이라는 왕의 이름이 새겨진 큰칼은 크게 세고리 장식 손잡이가 달린 칼과 칼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체 길이는 손잡이 끝에서 칼집 끝까지 약 86cm이며, 칼집 길이 약 69.5cm, 손잡이 길이 약 23cm, 칼의 길이 62cm 정도입니다. 또 칼집의 바깥 면에는 같은 형태의 세고리 자루가 달린 작은칼 1점과 첨자(籤子)라는 장식이 붙어 있습니다. 첨자는 큰칼이 칼집에서 쉽게 빠지지 않도록 칼집 옆에 덧붙인 젓가락 모양으로 된 두 개의 쇠를 가리킵니다.

글자의 의미와 새긴 시점

글자 세부 칼집의 하단 끝 뒷면에 ‘이사지왕’이 새겨져 있습니다.

글자 세부
칼집의 하단 끝 뒷면에 ‘이사지왕’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큰칼에서는 모두 세 군데에서 글자가 확인되었는데, 흥미롭게도 모두 칼집에서 발견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칼집의 하단 끝 뒷면에서 ‘尒斯智王(이사지왕)’이라는 글자가 확인되었고, 칼집 끝 앞면, 즉 이사지왕이 새겨진 부분의 반대편에서 十(십), 칼집 상단 끝 앞면에서도 尒(이)가 발견되었습니다.

‘尒’는 爾자의 약자입니다. 신라 금석문에 자주 등장하는 글자인데 포항 냉수리 신라비(503년)에 ‘喙/尒夫智/壹干支’와 울진 봉평리 신라비(524년)의 ‘悉尒智/奈麻’ 등에 보입니다. ‘斯’는 신라 금석문의 인명에 많이 보이는 문자입니다. 포항 중성리 신라비(501년)의 ‘斯德智’(斯는 초서), 냉수리비의 ‘斯夫智王’(斯는 초서), ‘斯德智/阿干支’의 예가 있습니다. ‘智’는 신라 금석문의 인명 끝에 붙는 어미로, ‘異斯夫智’나 ‘居柒夫智’와 같이 국왕을 포함한 상위 계층의 남성에게 주로 붙이는 존칭입니다. ‘王’은 智에 비해 작게 새겨져 있지만 말 그대로 왕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尒斯智王’은 尒斯(이름) / 智(존칭) / 王(직명)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즉 왕의 이름이 尒斯智이며, 묘호(廟號)를 쓰기 전 신라에서는 왕의 이름을 왕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지왕이라는 왕의 이름은 현재까지 확인된 금석문이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와 같은 문헌 기록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사지왕이 누구인지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한편 ‘尒’는 이사지왕의 약자로, ‘十’은 주술적인 의미로 칼에 새긴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글자를 새긴 부분의 현미경 사진 글자를 새긴 부분의 현미경 사진

자연과학적인 분석으로 글자를 새긴 시점도 밝혀냈습니다. 실체 현미경과 주사 전자 현미경으로 자세하게 관찰한 결과, 글자 내부에 도금 층이 깨끗하게 남아있었고, 칼집 끝 장식을 제작할 때 리벳팅 후 도금을 실시한 점이 밝혀졌기 때문에 제작 도중 글자를 새기고 이어서 표면 도금을 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제작자가 칼을 제작할 당시에 칼의 주인 이름을 새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명문의 현미경 사진을 보면 명문에 따라 새겨진 곳의 표면이 밀린 현상이 주목됩니다. 큰칼의 ‘十’과 ‘尒斯智王’, ‘尒’의 경우 모두 새겨진 홈 양쪽에 금속 표면이 밀린 흔적이 보입니다. 같은 도구로 글자를 새겼기 때문에 생긴 현상으로 판단됩니다. 새긴 위치는 각각 다르지만 도구가 같기 때문에 동일한 시점에 동일한 장인이 새긴 것으로 추정됩니다.

금관총의 주인공과 이사지왕

금관총 무덤 바닥 시설 국립중앙박물관은 2015년 경주 금관총을 정식으로 발굴해 무덤의 구조를 밝히고 일제강점기에 수습하지 못한 부장품을 발굴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금관총 무덤 바닥 시설
국립중앙박물관은 2015년 경주 금관총을 정식으로 발굴해 무덤의 구조를 밝히고 일제강점기에 수습하지 못한 부장품을 발굴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기본적으로 금관총에서 이사지왕이라는 왕의 이름이 나왔으므로 금관총의 주인공이 이사지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하지만 고분 껴묻거리 가운데에는 망자가 소유하고 있던 것이 있고 망자를 위해 추모자가 넣어 준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자신이 소유한 것이 아니라 앞 세대의 인물이 소유하고 있던 것을 껴묻을 수도 있는데 이러한 맥락의 유물을 전세품(傳世品)이라고 부릅니다. 아마도 호우총(壺杅塚)의 호우가 가장 대표적인 전세품이 아닐까 합니다. 금관총의 주인공을 이사지왕으로 판단할 때 우선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이사지왕’이 새겨진 큰칼이 금관총의 주인공, 즉 망자의 소유물인가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출토 맥락을 검토해야 합니다. 망자가 칼을 신변 가까이 소지하였는가 또는 직접 몸에 차고 있었는가는 칼의 소유자를 알려주는 중요한 맥락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사지왕 큰칼의 출토 위치는 매우 중요합니다.

금관총 부장품의 출토 위치는 출토품을 수습하고 나서 나중에 참여자들의 기억 등으로 복원된 것이기 때문에 신뢰도가 떨어집니다. 그러나 이사지왕 큰칼의 출토 위치는 보고서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을 따른다면 주인공의 머리 위에 부장된 것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중시하는 연구자들은 이 칼이 피장자의 것이 아니라 망자를 위해 추모자가 넣어 준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금관총에 묻힌 이가 이사지왕이 아니라고 보기도 합니다.

이사지왕은 누구일까?

이사지왕의 정체를 풀기 위해서는 당시 신라 사회에서 어떤 사람을 왕으로 불렀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사지왕이 6명의 마립간(나물~지증) 중 한 명인지, 아니면 신라 6부의 부장까지 해당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신라에서는 특이하게 6부의 부장도 왕으로 불렀다고 하는 연구가 있으며, 문헌에 갈문왕(葛文王)이라는 존재도 나오기 때문입니다.

금관총과 주변 고분

금관총과 주변 고분

이사지왕이 6명의 마립간 가운데 한 명이라고 생각하는 연구자들은 금관총이 500년 전후에 축조되었다는 고고학적 연구 성과를 토대로 이사지왕을 자비왕이나 소지왕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정합니다. 그러나 마립간과 신라 6부의 부장까지 왕으로 불렀다고 생각하는 연구자들은 금관총의 피장자를 왕이 아니라 왕족 또는 고위 귀족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정합니다. 왜냐하면 금관총은 그 규모로 볼 때 당시 마립간 또는 왕릉이라 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금관총은 고분의 입지와 규모로 볼 때 125호분 봉황대의 배총(陪塚) 중 하나로 보는 연구자가 많습니다. 125호분의 배총으로 여겨지는 것으로는 금관총을 비롯하여 금령총, 식리총이 있으며, 125호분 외에는 모두 발굴되었습니다. 금관총을 비롯해 금령총과 식리총도 500년 전후에 축조된 무덤으로 편년되며 125호분 봉황대는 비록 발굴되지 않았으나 눌지왕릉 또는 자비왕릉으로 추정하는 연구자도 일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금관총 주인공이 이사지왕이라면 자비왕 또는 소지왕일 가능성이 있고, 이사지왕이 아니라면 금관총의 주인공은 125호분 봉황대의 주인공과 깊은 관계를 가진 인물일 것입니다. 125호분 봉황대가 눌지왕릉이나 자비왕릉이라면, 금관총의 피장자가 굵은고리 귀걸이와 큰칼의 착장 양상에 따라 여성일 가능성이 크므로 눌지왕 또는 자비왕과 깊은 관련을 가진 여성일지도 모릅니다. 발굴되지 않은 자료로 더 이상을 논의하긴 어렵지만 금관총의 주인공이 신라 왕계를 구성한 유력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음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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