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네 부처의 세계 <사불회도(四佛會圖)> : 유경희

모든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는 부처

사불회도四佛會圖 1562년, 비단에 채색, 전체 90.5×74.0(화폭77.8×52.2)cm, 1997년 구입(신수14193), 보물

<사불회도(四佛會圖)>,1562년, 비단에 채색,
전체 90.5×74.0(화폭77.8×52.2)cm,
1997년 구입(신수14193), 보물

하늘과 땅,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어디에 절대적인 큰 힘을 갖고 있는 분이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나 고통으로 헤맬 때 그 분에게 간절한 기원을 보내고 싶습니다.

작은 화면에 네 부처를 그려 부처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묘사한 불화가 있습니다. 1562년 조선 왕실의 종친(宗親)이었던 이종린(李宗麟, 1538~1611)은 외조부가 돌아가시자 슬프고 간절한 마음으로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와 가족들의 극락왕생(極樂往生)을 기원하고 살아 계신 외할머니와 가족들의 안녕을 위해 불화를 조성하도록 하였습니다.

불화의 화면 상하좌우에는 네 부처가 그려져 있습니다. 불교의 세계관에 의하면 세상의 서쪽에는 고통이 없는 극락정토(極樂淨土)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세상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 있어 죽음 이후 우리를 극락세계로 데리고 간다고 합니다. 화면 상단 왼쪽에 여덟 명의 보살과 함께 있는 부처가 아미타불입니다. 아미타불 옆쪽으로는 약사불(藥師佛)이 있습니다. 약사불은 동방(東方) 유리광정토(琉璃光淨土)에 머물며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낫게 해준다고 합니다. 약사불의 손에는 병을 치유해주는 약그릇이 있습니다. 그리고 약사불 옆으로는 열두 명의 신장[藥師十二神將]이 배치되었습니다. 이어 화면의 아래쪽에는 왕자의 신분을 버리고 고행의 길을 간 부처(Buddha)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이 있습니다. 그는 인간의 삶이란 원래가 괴로운 것[苦]이며 그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는 욕심을 버리고 수행해야 함을 설법하면서 구도자(求道者)로 살았습니다. 석가모니불 주위에는 석가를 따라 깨달음의 길을 함께 한 제자들과 보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석가모니불 옆에는 미륵불(彌勒佛)이 있습니다. 미륵불은 석가모니불이 열반에 든 56억 7000만 년 이후에 이 세계에 출현하여 구제받지 못한 중생들을 구제하러 오는 미래의 부처입니다. 미륵불 주위에는 석가모니불과 동일한 모습의 제자들과 보살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미타불과 약사불이 공간을 상징하는 부처라면 석가모니불과 미륵불은 과거와 미래를 상징하는 부처입니다. 이처럼 네 부처를 그려 모든 공간과 시간 속에 부처가 존재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부처와 보살의 아래쪽에는 갑옷을 입고 두 손을 공손히 합장한 채 무릎을 꿇은 사천왕이 부처의 세계를 수호하고 있습니다.

아미타불과 권속 아미타불과 권속

약사불과 권속 약사불과 권속

석가불과 권속 석가불과 권속

미륵불과 권속 미륵불과 권속

간절함을 기록하다

불화의 하단 중심에는 붉은 색 장방형의 공간을 두고 누가, 언제, 어떤 연유로 이 불화를 조성했는지를 금선(金線)으로 기록하였습니다. 화기(畫記)에 의하면 이 불화는 왕실의 종친(宗親)인 이종린(李宗麟)이 조성을 발원(發願)하였습니다. 이종린은 조선 제 11대 국왕이었던 중종(中宗, 재위 1506~1544)의 다섯째 왕자인 덕양군(德陽君) 이기(李岐, 1524~1581)의 아들입니다. 이종린은 어린 시절을 외가에서 보냈으며 외조부가 바로 돌아가신 권찬(權纘, ?~1560)입니다. 권찬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사위인 이기는 아래의 상소를 올려 외손(外孫)인 이종린이 복상(服喪)할 것을 청했습니다.

"처의 아비 권찬은 적실과 첩실에 다 아들이 없어서 소신의 아들 풍산정(豊山正) 이종린이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 거처를 마련해서 기르며 죽고 난 뒤의 일을 부탁하였습니다. 또 죽을 때에 어루만지며 이르기를, ‘내가 너를 둔 정이 친아들 같이 중하니 내가 죽은 뒤에 너는 복상하여 나를 끝내 외로운 혼으로 만들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말이 몹시 간절하였을 뿐 아니라 이종린도 은의가 깊고 중한 것을 생각하고는 슬피 울며 상복[최질(衰絰)]을 입어서 외조부가 평생 원하던 뜻에 보답하고자 하므로 그 뜻이 심히 애절하여 차마 금지하지 못하겠습니다.”

『명종실록』권26, 15년(1560) 9월 신묘(28일)條

복상으로 상례(喪禮)를 마친 이종린은 불화를 조성하여 외조부의 죽음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화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정 임술년(1562) 6월에 풍산정 이씨는 슬픈 마음을 다하여 엎드려 바라건대, 돌아가신 아버지[선고(先考)]의 영가(靈駕), 숙원(淑媛) 이씨(李氏)의 영가, 목사(牧使) 박간(朴諫) 등이 부부의 영가, 딸 억춘의 영가, 아들 이씨의 영가 등이 살아있을 때 쌓은 여러 허물의 원인으로부터 벗어나서 죽은 후에 극락의 구품을 닦는 과보를 증명하기를 바랍니다. 살아계신 할머니 정경부인 윤씨, 덕양군 부부, 성순 부부, 박씨, 이백춘, 이경춘, 이연춘 등이 모두 재앙을 벗어나고 복덕과 수명장수를 얻고 나 자신은 언제든지 백가지 해를 입히는 재앙이 없고 매일 천 가지 상서로운 경사가 있으며 중간에 요절하지 않고 노인이 될 때까지 오래도록 살기를 바랍니다.(하략)”

불화의 화기(畫記)에서 ‘선고(先考)’라고 쓰인 돌아가신 아버지는 사실 외할아버지인 권찬을 의미합니다. 이종린은 이 불화를 통해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와 할머니 숙원 이씨, 그리고 자신보다 먼저 죽은 그의 딸 억춘과 여러 명의 극락왕생을 빌었습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외할머니와 이종린 부부 등 가족들의 안녕을 함께 기원하였습니다. 또한 “나 자신은 해를 입히는 재앙이 없고 상서로운 경사가 있으며 중간에 요절하지 않고 노인이 될 때까지 오래살기를 바란다.”라고 적음으로써 사람이라면 누구나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라는 간절함을 기록하였습니다.

<사불회도四佛會圖>의 화기

<사불회도(四佛會圖)>의 화기
불화, 어떻게 그렸을까?

다시 불화 속으로 시선을 돌려봅니다. 네 부처는 당당한 모습으로 화면 사방에 위치하여 안정감을 줍니다. 하단부에 그려진 보살상은 세장하면서도 유려한 모습입니다. 불·보살의 얼굴은 금니(金泥)로 칠한 반면 천부중(天部衆)인 범천·제석천, 사천왕 등과 제자들의 얼굴은 살구색으로 채색하여 불·보살과 나머지 존상들의 위계를 구분하였습니다. 금니는 불보살의 얼굴 뿐 아니라 주요 문양과 광배의 외곽선, 화기 등 주요한 부분에 채색되어 있습니다. 금으로 칠한 채색은 붉은색, 초록색 등과 어우러져 왕실(王室) 발원(發願) 불화다운 화려함을 보여줍니다. 부처의 얼굴은 눈썹이 활처럼 둥글게 휘어지고 이목구비는 중앙으로 몰려 있으며 입술이 매우 작습니다. 육계(肉髻) 정상에는 보주(寶珠)가 뾰족하게 올라왔습니다. 이러한 특징은 이 불화를 비롯하여 16세기 왕실발원 불화에서 공통적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한편 부처의 법의(法衣)에 묘사된 S자형 원문(圓文)은 고려불화의 전통적 문양을 계승하고 있는 특징입니다. 전대의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부처를 중심으로 보살의 무리가 원형으로 군집한 구도는 조선불화로서의 변화된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극락을 꿈꾸다

정책적으로 억불숭유(抑佛崇儒)를 표방했던 조선시대에는 역설적이게도 왕실(王室) 내의 비빈(妃嬪)들이 많은 불사를 후원하였습니다. 16세기에는 중종(中宗)의 계비(繼妃)인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와 인종(仁宗, 1515~1545)의 왕비인 인성왕후(仁聖王后, 1514~1578), 후궁(後宮) 그리고 비구니를 비롯하여 왕실 내의 많은 여성들이 불화의 조성을 후원하였습니다. 그들은 선왕선후(先王先后)의 명복과 그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자식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였습니다. 이 불화는 16세기 왕실발원 불화의 대표적인 예로 지위가 높은 왕실의 종친 역시 인간으로서의 한결같은 소망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살아서는 건강하고 평안하며 죽은 뒤에는 좋은 세계에서 고통 없이 살아가고 싶은, 어쩌면 당연한, 나약한 인간의 바람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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