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석도(竹石圖)
왕실일생/산릉(山陵)·원소(園所)·묘소(墓所)
흉례(凶禮)/산릉(山陵)·원소(園所)·묘소(墓所)
무덤 조성_무덤 주변의 석물
헌종경릉산릉도감의궤 (하)(憲宗景陵山陵都監儀軌 (下))
1849
죽석도(竹石圖)는 돌로 만든 가로대인 죽석(竹石)을 그린 그림이다.
죽석은 난간석(欄干石)을 이루는 석물(石物)이다. 봉분 주위에 난간석을 설치할 때에는 가장 먼저 지면 위에 엄전석(掩磚石) 48장을 원형으로 깔고 그 위에 면전석(面磚石) 과 우전석(隅磚石) 을 한 장씩 번갈아 가며 원형으로 깐다. 그 위에 난간석의 주 기둥인 석주(石柱) 와 작은 보조 기둥인 동자석주(童子石柱) 를 한 개씩 번갈아 가며 설치하는데, 면전석 위에 동자석주를, 우전석 위에 석주를 각각 설치한다. 죽석은 석주와 석주 사이를 연결하는 돌로 만든 가로대이다. 죽석은 가늘고 긴 팔각 기둥 모양인데, 이를 가로로 눕혀서 인접한 석주와 석주를 연결한다. 석주의 상단에는 꽃부리가 위쪽을 향하는 연꽃 잎[앙련엽(仰蓮葉)]을 조각하여 붙이는데, 이 연꽃 잎의 윗단이 평평하게 처리되어 있어, 여기에 죽석을 얹을 수 있다.
죽석도(竹石圖)는 돌로 만든 가로대인 죽석(竹石)을 그린 그림이다. 죽석은 난간석(欄干石)을 이루는 석물(石物) 부품 중 하나이다. 난간석은 조선시대의 왕실 무덤인 능(陵), 원(園)의 핵심을 이루는 봉분(封墳)의 둘레에 병풍석(屛風石)과 함께 설치되어 봉분을 보호하고 장식하는 커다란 원형의 석조물이다. 봉분을 둘러싼 원형의 난간 역할을 하기 때문에 난간석이라고 부른다. (실제 모양도 난간처럼 생겼다.) 병풍석은 봉분 아랫부분의 둘레를 직접 감싸면서 병풍처럼 둘러친 커다란 원형의 석조물이다. ‘둘레돌’, ‘호석(護石)’이라고도 부른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병풍석과 난간석이 두 개의 동심원(◎)을 이루면서 봉분을 둘러싸서 보호하는 형태이다. 단릉(單陵)의 난간석은 엄전석(掩磚石), 면전석(面磚石), 우전석(隅磚石), 석주(石柱), 동자석주(童子石柱), 죽석으로 구성되며, 쌍릉(雙陵)의 난간석은 여기에 장수도석(長水道石), 수도우석(水道隅石), 고삭석주(古索石柱)가 추가되어 구성된다. 단릉은 왕릉 내부에 왕과 왕비 중 1인의 능실(陵室)과 봉분만 있는 능이고, 쌍릉은 왕과 왕비 2인의 능실과 봉분이 연달아 두 개씩[○○] 있는 능이다. 쌍릉에는 난간석을 봉분 당 한 개씩, 두 개를 연달아 설치한다.
봉분 주위에 난간석을 설치할 때에는 가장 먼저 지면 위에 엄전석 48장을 원형으로 빙 돌아가며 깐다. 엄전석은 ‘땅을 덮는[엄(掩)] 받침돌[전석(磚石)]’이라는 의미이다. 엄전석을 깐 위에 면전석과 우전석을 한 장씩 번갈아 가며 원형으로 깐다. 면전석은 ‘정면에 위치한 전석(받침돌)’, 우전석은 ‘모퉁이에 위치한 전석(받침돌)’이라는 의미인데, 실제로는 면전석, 우전석이 한 장씩 교대로 깔린다. 그 위에 난간석의 주 기둥인 석주와 작은 보조 기둥인 동자석주를 한 개씩 번갈아 가며 설치하는데, 면전석 위에 동자석주를, 우전석 위에 석주를 각각 설치한다. 죽석은 석주와 석주 사이를 연결하는 돌로 만든 가로대이다. 죽석은 가늘고 긴 팔각 기둥 모양인데, 이를 가로로 눕혀서 인접한 석주와 석주를 연결한다. 석주의 상단에는 꽃부리가 위쪽을 향하는 연꽃 잎[앙련엽(仰蓮葉)]을 조각하여 붙이는데, 이 연꽃 잎의 윗단이 평평하게 처리되어 있어, 여기에 죽석을 얹을 수 있다.
죽석은 석주와 석주를 연결하는 것과 함께, 쌍릉에 설치되는 고삭석주와 석주를 연결하기도 한다. 쌍릉에는 연달아 있는 두 봉분에 각각 난간석을 설치하되, 두 봉분 사이의 중간 지점에 면전석과 우전석 대신 직사각형의 장수도석 한 장을 중앙에 먼저 깔고, 장수도석의 위와 아래로 오각형에 가까운 수도우석을 각각 한 장씩 이어 붙인다. 장수도석과 수도우석은 돌 중간에 물길[수도(水道)] 역할을 하는 긴 홈이 각각 파여 있는데, 이들이 서로 상하로 연결되어 상당히 긴 수도를 이룬다. 이 수도는 비가 올 때 두 봉분 사이의 공간에 물이 고이지 않고 흘러내리도록 하는 배수관(排水管) 역할을 한다. 장수도석의 위아래에 있는 두 장의 수도우석 위에는 고삭석주라는 기둥을 한 개씩 세우는데, 이 기둥에 양쪽 난간석의 끝부분에 위치한 죽석이 각각 좌우로 연결된다. 이 죽석은 양쪽 난간석 끝의 석주와 고삭석주를 서로 이어줌으로써 양쪽 난간석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이 죽석은 1849년(철종 즉위) 음력 6월 6일(양력 7월 25일)에 헌종(憲宗, 1827~1849, 재위 1834~1849)이 승하한 후, 10월 28일에 경릉(景陵: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소재. 동구릉(東九陵)의 하나로 사적 제193호)에 안장하기까지, 약 5개월 동안 봉행된 국장(國葬)의 전반부 과정에서 사용된 것이다. 헌종의 봉분을 둘러싸서 보호하는 난간석을 구성하였다.
이 죽석은 12개가 사용되었으며, 길이는 7척 1촌(215.13cm), 지름은 7촌(21.21cm)이다. 조선시대에 통용된 5종의 길이 측량 표준 단위[영조척(營造尺), 예기척(禮器尺), 주척(周尺), 포백척(布帛尺), 황종척(黃鍾尺)] 중 어떤 단위를 사용하였는지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터법으로 정확하게 환산하기는 힘들지만, 편의상 오늘날 통용되는 1척=30.3cm를 기준으로 대략적으로 환산해 보면, 위의 ( ) 안에 함께 표기한 수치와 같다. (1척=30.3cm는 대한제국(大韓帝國) 시기에 정해진 기준으로, 어디까지나 참고로만 제시하였다.)(박봉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