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책(哀冊)
왕실일생/천릉(遷陵)·천봉(遷峰)·천원(遷園)
흉례(凶禮)/천릉(遷陵)·천봉(遷峰)·천원(遷園)
책봉·존숭·추증_어책·어책함
익종수릉천봉도감의궤 (5)(翼宗綏陵遷奉都監儀軌 (五))
1846
애책(哀冊)은 승하(昇遐)한 왕이나 왕비, 즉위 전에 젊은 나이로 훙서(薨逝)한 왕세자·왕세자빈·왕세손 등과 정1품 후궁인 빈(嬪)을 애도하고 망자의 혼령을 위로하는 내용을 기록한 옥책(玉冊) 이나 죽책(竹冊) 이다.
애책은 국가 장례의 한 절차로 진행되는 견전(遣奠: 장지(葬地)로 떠나면서 신주 앞에 술과 음식을 올려 망자를 대접하고 애도하는 의식), 천전(遷奠: 재궁(梓宮)이나 재실(梓室)을 무덤 속에 안장하면서 술과 음식을 올려 망자를 대접하고 애도하는 의식) 의식 등에 사용되었다.
국가 장례의 견전, 천전 의식에 사용되는 옥책과 죽책은 ‘애책’, ‘ 애죽책(哀竹冊) ’이라고 하여 일반적인 옥책, 죽책과는 구분하였다. 애책에 기록되는 문장을 애책문(哀冊文)이라고 하였다. 애책문에는 왕이나 왕비, 왕세자·왕세자빈·왕세손 등의 생전의 업적과 덕행을 기리고 칭송하며, 망자의 죽음을 애도하고 넋을 위로하는 내용 등이 담겼다.
애책(哀冊)은 승하(昇遐)한 왕이나 왕비, 즉위 전에 젊은 나이로 훙서(薨逝)한 왕세자·왕세자빈·왕세손 등과 정1품 후궁인 빈(嬪)을 애도하고 망자의 혼령을 위로하는 내용을 기록한 옥책(玉冊)이나 죽책(竹冊)이다. 승하는 왕과 왕비의 죽음을 높여 부르는 말이고, 훙서는 왕족이나 귀인의 죽음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옥책, 죽책은 수십 개의 가늘고 긴 옥 조각[옥간(玉簡)]이나 대나무 조각[죽간(竹簡)]에 각종 국가·왕실 의식에 관련된 문장을 새긴 후 이들을 책 모양처럼 엮어 만든 의례용 문서이다. 왕실 어른인 왕·왕비·왕대비·대왕대비의 의례에 관련된 글은 주로 옥책에 새기고, 왕실 연소자인 왕세자·왕세자빈·왕세제·왕세제빈·왕세손·왕세손빈 및 후궁 등의 의례에 관련된 글은 죽책에 새겼지만, 약간의 예외도 있었다.
애책은 국가 장례의 한 절차인 견전(遣奠), 천전(遷奠) 의식에서 사용되었다. 견전은 장지(葬地)로 발인(發靷)하기 위해 빈전(殯殿)이나 빈궁(殯宮)을 떠나면서[견(遣)], 승하(昇遐)한 왕이나 왕비, 즉위 전에 젊은 나이로 훙서한 왕세자·왕세자빈·왕세손 등의 신주 앞에 술과 음식을 올려 망자를 대접하고 애도하는[전(奠)] 의식이다. 빈전은 왕과 왕비가 승하한 후부터 장지인 왕릉에 안장하기까지 대략 4~5개월 동안 재궁(梓宮)과 흰색 비단으로 만든 신주인 신백(神帛)을 모셔두고 각종 의식을 봉행하는 전각이다. 빈궁은 왕세자·왕세자빈·왕세손 등의 재실(梓室)과 신백을 모셔두고 각종 의식을 봉행하는 전각이다. 재궁은 왕이나 왕비의 관을 높여 부르는 말이고, 재실은 왕세자·왕세자빈·왕세손 등의 관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천전은 재궁이나 재실을 무덤 속 큰 구덩이인 현궁(玄宮)이나 현실(玄室)에 안장하면서[천(遷)], 술과 음식을 올려 망자를 대접하고 위로하는[전(奠)] 의식이다. 현궁은 재궁을 묻는 무덤 속 구덩이, 현실은 재실을 묻는 무덤 속 구덩이를 각각 높여 부르는 말이다. 현궁은 곧 능실(陵室)로서, 현궁을 파서 능실로 단장하게 된다. 현실은 곧 묘실(墓室)로서, 현실을 파서 묘실로 단장하게 된다. 능실은 왕이나 왕비를 안장하는 무덤 속 큰 방, 묘실은 왕세자·왕세자빈·왕세손 등과 왕실 종친 및 사대부들을 안장하는 무덤 속 큰 방을 뜻한다. 견전, 천전 의식 도중에 정해진 순서와 절차에 따라 애책의 낭독을 담당하는 관리[독책관(讀冊官)]가 애책에 적힌 내용을 낭독하였다.
이 애책은 1846년(헌종 12) 음력 윤5월 20일에 추존왕(追尊王) 익종(翼宗, 1809~1830)의 수릉(綏陵: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소재. 동구릉(東九陵)의 하나로 사적 제193호)을 원래 있던 자리인 서울시 성북구 석관동 부근에서 경기도 양주 용마산 아래로 천장(遷葬)하는 과정에서 사용된 것이다. 익종은 순조(純祖, 1790~1834, 재위 1800~1834)의 맏아들이자 헌종(憲宗, 1827~1849, 재위 1834~1849)의 아버지로서, 왕세자 시절에 훙서하였기 때문에 보통 효명세자(孝明世子)라고 부른다. 1835년(헌종 1) 음력 5월 19일에 헌종이 아버지인 효명세자를 익종으로 추존하여 관련 의례를 봉행하면서, 효명세자의 원래의 무덤이자 왕세자의 무덤인 원(園)의 격식으로 조성되어 있던 연경묘(延慶墓)를 왕릉인 수릉으로 명칭과 격식을 높여 재단장하였다. 1846년에는 풍수가 불길하다는 논의에 의해 수릉을 천장하였고, 이후 1855년(철종 6)에 현재의 위치로 재차 천장하였다.
남양청옥(南陽靑玉)으로 만들었다. 72개의 옥 조각을 6개씩 1첩(貼: 5~6개의 옥 조각을 이어 붙여서 만든 옥책의 1면)으로 엮어 총 12첩으로 만들었다. 옥 조각 하나 당 세로[장(長)] 길이는 9촌 7푼(26.6cm), 가로[광(廣)] 길이는 1촌 2푼(3.3cm), 두께[후(厚)]는 6푼(1.6cm)이다. 가로·세로 등의 길이를 측량하는 데 사용된 단위는 예기척(禮器尺: 예기를 만드는 데 표준으로 사용되는 자)이다. 예기척은 예기(禮器), 즉 국가와 왕실 제례에서 사용되는 각종 제기 및 다양한 의례용 물품들을 만들 때 적용된 단위이다. 1 예기척은 현대의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274.74mm이다. 미터법 환산과 관련해서는 다수의 의견들이 있지만, 이 해제에서는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경신신제척’(庚申新製尺: 경신년인 1740년(영조 16)에 새롭게 제작된 표준 자)의 제1면에 새겨진 예기척의 길이를 기준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환산한 길이의 미터법 수치를 위에서 ( ) 안에 함께 표기하였다.
옥 조각들을 1면의 첩으로 엮는 방법은 아래와 같다. 우선 6개의 옥 조각을 모아 상하의 양 끝과 좌우의 양 끝을 각각 붉은색 광직(廣織)으로 싸고, 광직 위에 도금한 얇은 동판[박동(薄銅)]을 끼워 고정시켜 1첩을 만든다. 인접한 첩과 첩을 고리로 연결하고, 첩이 접히는 안쪽 부분을 붉은 광직으로 만든 격자(隔子), 즉 일종의 (책)갈피로 싸서 인접한 첩이 서로 부딪혀서 마모되지 않도록 하였다. 각 첩의 첫 번째 항이자 가장 높이 올려 쓰는 항인 극항(極行)에는 12자를 새기고, 나머지 일반 항[평항(平行)]에는 11자씩을 새긴 후, 모든 글자를 주홍색 안료로 채웠다. 애책의 제작 방식은 책봉, 존호 의식에 사용되는 옥책, 시호 의식에 사용되는 시책(諡冊)과 거의 유사하지만, 옥책이나 시책이 황금이나 이금(泥金: 금박 가루를 아교로 개어 만든 특수 염료 겸 필기용 고급 물감)으로 모든 글자를 채워 화려하게 장식한 반면, 애책은 지나친 화려함을 피하기 위해 주홍색 안료로만 채웠다는 점이 다르다. 애책의 상단과 하단에는 다홍색 비단을 덧씌우고, 정제된 구리인 숙동(熟銅)으로 조각하고 황금으로 도금한 장식물을 애책의 좌우 양 끝에 부착하였다. 남양청옥은 푸르스름한 빛이 도는 남양의 옥이라는 의미인데, 최근의 연구 결과 남양은 경기도 화성 서부 지역으로 밝혀졌다. 남양청옥은 중국산 비취옥에 비해 색상이 좀 더 맑고 은은하며 재질이 견고하였다. 세종(世宗) 대 이후부터는 왕실의 옥책이나 옥도장[옥보(玉寶)] 등이 대부분 남양청옥으로 제작되었다.(박봉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