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干)
왕실일생/천릉(遷陵)·천봉(遷峰)·천원(遷園)
흉례(凶禮)/천릉(遷陵)·천봉(遷峰)·천원(遷園)
무덤 조성_부장품: 생활용품과 예물
익종수릉천봉도감의궤 (4)(翼宗綏陵遷奉都監儀軌 (四))
1846
간(干)은 방패를 말하며, 방패는 전투 중에 적군의 칼이나 창, 화살 등을 막는 데 사용되는 방어용, 호신용 무기이다.
방패는 순(盾), 순(楯), 패(牌), 팽배(彭排) 등 다양한 별칭으로도 불리며, 원형, 타원형, 사각형 등 다양한 모양이 있다. 방패는 전투 외에도 조선시대의 군사 의례인 ‘대열의(大閱儀)’ 등에서도 사용되었다.
방패는 전투와 군사 의례에 사용되는 외에도, 국가 장례에서 명기(明器)로도 사용되었다. 명기는 ‘신명(神明)의 그릇’, ‘신령(神靈)의 그릇’이라는 의미로서, 망자의 편안한 내세 생활을 위해 무덤에 함께 묻는 각종 그릇을 말한다. 일반적인 그릇 외에 악기와 무기들도 많이 활용되었다. 명기는 생전에 사용하던 그릇, 악기, 무기들을 모방하여 부장용으로 다시 만드는데, 재질과 크기를 달리하여 생전의 그릇, 악기, 무기들보다는 좀 더 작고 소박하고 단출하게 만들었다. 산 사람을 위한 물품이 아니라 망자를 위한 물품이기 때문이다.
명기인 방패는 피나무로 만들었다. 방패의 크기는 실물의 25분의 1 정도이지만, 그림을 그려 넣는 등 상당히 섬세하고 정성스럽게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간(干)은 방패(防牌)이다. 방패는 전투 중에 적군의 칼이나 창, 화살 등을 막는 데 사용되는 방어용, 호신용의 무기이다. 순(盾), 순(楯), 패(牌), 팽배(彭排) 등 다양한 별칭으로도 부른다. 방패는 원형, 타원형, 사각형 등 다양한 모양이 있는데, 이 그림의 방패는 직사각형 모양의 장방패(長防牌)이다. 전투에 사용되는 장방패의 세로 길이는 5척 6촌(약 169.7cm), 가로 길이는 2척 2촌(약 66.7cm) 정도이다. 장방패는 나무로 만들며, 안쪽 면을 흰 베로 두르고, 바깥쪽 표면을 소가죽으로 싼다. 장방패의 윗단에는 짐승의 머리[수두(獸頭)]를 다섯 가지 색으로 그려 넣는데, 중군(中軍)은 적색, 좌군(左軍)은 청색, 우군(右軍)은 백색을 사용한다. 짐승의 머리 그림은 아군의 사기를 올리고 적군을 위협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장방패는 전투에서 손으로 들고 방어와 호신을 위해 사용하기도 하지만, 무겁고 길기 때문에 지면에 고정하여 적의 화살이나 적군의 진격을 막는 데 사용하기도 하였다.
방패는 전투 외에도 조선시대의 군사 의례인 ‘대열의(大閱儀)’ 등에서도 사용되었다. 대열의, 계동대나의 등에 참석하는 군사나 나자(儺者)들은 방패, 칼, 창, 활과 화살 등 각종 무기를 손에 들고 의식을 봉행하였다. 대열의는 매년 9, 10월에 도성의 성문 밖에서 왕이 진법(陣法)의 교련(敎鍊) 상태를 몸소 검열하고, 군대 전체의 전투력을 평가하고 배양하는 대규모의 정기적인 군사 훈련 의식이다. 계동대나의는 매년 음력 12월[계동(季冬)]에 대대적으로 행하는 나례(儺禮) 의식이다. 나례는 온갖 잡귀나 역병, 부정하고 사악한 기운 등을 쫓아내는 의식이다. 나자는 나례 의식에서 분장을 하고 잡귀, 역병 등을 쫓아내는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나자의 대표적인 종류로는 방상씨(方相氏), 초라니, 진자(侲子), 지군(持軍), 소매(小梅), 공인(工人), 창수(唱帥) 등이 있는데, 계동대나의에는 방상씨와 진자, 공인, 창수 등이 참가하였다. 이들 중에서 방상씨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은 미친 지아비[광부(狂夫)] 모습으로 분장을 하는데, 얼굴에는 4개의 황금색 눈이 달리고 붉은색 칠을 한 가면을 쓰고, 검은색 상의와 붉은색 하의를 입고 곰 가죽을 둘러쓰며, 오른손에는 삼지창, 왼손에는 방패를 든다.
방패는 전투와 군사 의례에 사용되는 외에도, 국가 장례에서 명기(明器)로도 사용되었다. 명기는 ‘신명(神明)의 그릇’, ‘신령(神靈)의 그릇’이라는 의미로서, 망자의 편안한 내세 생활을 위해 무덤에 함께 묻는 각종 그릇을 말한다. 일반적인 그릇 외에 악기와 무기들도 많이 활용되었다. 명기는 생전에 사용하던 그릇, 악기, 무기들을 모방하여 부장용으로 다시 만드는데, 재질과 크기를 달리하여 생전의 그릇, 악기, 무기들보다는 좀 더 작고 소박하고 단출하게 만들었다. 산 사람을 위한 물품이 아니라 망자를 위한 물품이기 때문이다. 명기로는 희생(犧牲)을 삶는 제기인 정(鼎), 쌀[도(稻)]과 찰기장[양(粱)]을 담는 제기인 보(簠), 메기장[서(黍)]과 조[직(稷)]를 담는 제기인 궤(簋), 육포·어포·열매 과일·떡 등 각종 마른 음식을 담는 제기인 변(籩), 육젓·어젓·채소 절임·죽 등 각종 젖은 음식을 담는 제기인 두(豆), 술을 담는 큰 항아리인 주준(酒尊), 술잔인 작(爵)과 잔(盞), 술을 담는 병인 주병(酒甁), 수저를 담는 접시인 시접(匙楪), 향로(香爐), 향합(香盒), 가마솥[부(釜)] 등과 종(鍾), 경(磬), 훈(壎), 지(篪), 금(琴), 생(笙), 소(簫), 고(鼓), 축(柷), 어(敔) 등의 다양한 악기들, 방패, 갑옷[갑(甲)], 투구[주(冑)], 동궁(彤弓), 동시(彤矢), 화살통[착(笮)] 등의 무기들이 주로 활용되었다. 부장품인 명기들은 모두 (청동이나 놋쇠, 소나무나 피나무[가목(椵木)] 등으로 화려하고 묵직하게 만드는 본품과는 구별되게) 흰빛이 나는 흙[백토(白土)]을 구워 만들거나 대나무 껍질을 엮어 짜서 만드는 등 비교적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을 사용하여 더 작고 단출하게 만들었다. 이 그림의 장방패는 명기로 작게 제작된 것이다.
이 장방패는 1846년(헌종 12) 음력 윤5월 20일에 추존왕(追尊王) 익종(翼宗, 1809~1830)의 수릉(綏陵: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소재. 동구릉(東九陵)의 하나로 사적 제193호)을 원래 있던 자리인 서울시 성북구 석관동 부근에서 경기도 양주 용마산 아래로 천장(遷葬)하는 과정에서 사용된 것이다. 익종의 능실에 부장된 명기 중의 하나로 사용되었다. 익종은 순조(純祖, 1790~1834, 재위 1800~1834)의 맏아들이자 헌종(憲宗, 1827~1849, 재위 1834~1849)의 아버지로서, 왕세자 시절에 훙서하였기 때문에 보통 효명세자(孝明世子)라고 부른다. 1835년(헌종 1) 음력 5월 19일에 헌종이 아버지인 효명세자를 익종으로 추존하여 관련 의례를 봉행하면서, 효명세자의 원래의 무덤이자 왕세자의 무덤인 원(園)의 격식으로 조성되어 있던 연경묘(延慶墓)를 왕릉인 수릉으로 명칭과 격식을 높여 재단장하였다. 1846년에는 풍수가 불길하다는 논의에 의해 수릉을 천장하였고, 이후 1855년(철종 6)에 현재의 위치로 재차 천장하였다.
이 장방패는 피나무로 만들었다. 세로[장(長)] 길이는 3촌(6.21cm), 가로[광(廣)] 길이는 1촌 5푼(3.11cm)이다. 가로·세로 등의 길이를 측량하는 데 사용된 단위는 주척(周尺: 중국 고대 주나라에서 유래된 표준 자)이다. 주척은 신주(神主)를 만들거나, 측우기(測雨器)를 비롯한 각종 기후·천체·천문 측정기기 등을 제작할 때, 혹은 도로나 토지의 거리·면적 등을 측량할 때 주로 사용된 단위이다. 1 주척은 현대의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207mm이다. 미터법 환산과 관련해서는 다수의 이견(異見)들이 있지만, 이 해제에서는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경신신제척’(庚申新製尺: 경신년인 1740년(영조 16)에 새롭게 제작된 표준 자)의 제1면에 새겨진 주척의 길이를 기준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환산한 길이의 미터법 수치를 위에서 ( ) 안에 함께 표기하였다. 전면에 짐승의 머리를 그려 넣었다. 명기로 사용된 장방패의 크기는 실물의 25분의 1 정도이지만, 그림을 그려 넣는 등 상당히 섬세하고 정성스럽게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박봉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