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안마(竹鞍馬)
왕실일생/천릉(遷陵)·천봉(遷峰)·천원(遷園)
흉례(凶禮)/천릉(遷陵)·천봉(遷峰)·천원(遷園)
장례_장례 행렬: 의장(儀仗)
익종수릉천봉도감의궤 (4)(翼宗綏陵遷奉都監儀軌 (四))
1846
죽안마(竹鞍馬)는 조선시대의 국가·왕실 장례에서 사용된 나무와 마른 풀 등으로 만든 의장용 말로 흉의장(凶儀仗)의 한 종류이다.
죽안마는 등에 안장을 얹은 형태로 제작하는데, 안장을 얹지 않은 야생마 형태의 의장용 말인 죽산마(竹散馬) 와 짝을 이루어 국가 장례의 중간 절차인 발인(發靷) 의식에서 사용되었다. 죽안마는 싸리나무와 마른 풀[고초(藁草)], 가마니, 깔개 등을 엮어서 만든다. 죽안마에 다양한 색을 칠하는 것과 달리, 죽산마는 검은색으로만 칠하였다.
발인 의식에서 죽안마와 죽산마는 명기요여(明器腰輿)의 앞에 배치되었고, 2~4개의 바퀴가 달리고 붉은색 칠을 한 수레에 실려서 운반되었다. 죽안마를 실은 수레에는 1대 당 2명의 견예인(牽曳人), 즉 수레를 끄는 사람이 배치되어 수레를 앞에서 끌고 간다.
왕의 발인 행렬에서는 2필의 죽산마와 10필의 죽안마가 제작·사용되었다. 10필의 죽안마는 백색 말[백마(白馬)] 2필, 털빛이 붉고 갈기가 검은 말[유마(騮馬) 혹은 유마(駵馬)] 2필, 밤색 말[황마(黃馬)] 2필, 표적다마(表赤多馬) 2필, 구랑마(仇郞馬) 2필이다. 왕비와 즉위 전에 훙서(薨逝)한 왕세자·왕세자빈·왕세손 등의 발인 행렬에서는 죽산마 2필과 죽안마 4필이 사용되었는데, 죽안마는 백색 말 2필, 유마 2필이다.
죽안마(竹鞍馬)는 조선시대의 국가·왕실 장례에서 사용된 나무와 마른 풀 등으로 만든 의장용 말이다. 죽안마는 등에 안장을 얹은 형태로 제작하는데, 안장을 얹지 않은 (야생마) 형태의 의장용 말인 죽산마(竹散馬)와 짝을 이루어 국가 장례의 중간 절차인 발인(發靷) 의식에서 사용되었다. 발인은 왕과 왕비의 관인 재궁(梓宮)을 대여(大輿)에 싣고 장지(葬地)인 왕릉까지 운반하는 의식으로서, 왕이나 왕비가 승하한 후 5개월 뒤에 봉행하였다. 대여는 재궁을 장지까지 운반하는 큰 가마이다. 즉 왕과 왕비를 위한 큰 상여이다. 발인 의식에서 죽안마와 죽산마는 명기요여(明器腰輿)의 앞에 배치되었고, 2~4개의 바퀴가 달리고 붉은색 칠을 한 수레에 실려서 운반되었다. 명기요여는 각종 부장용 물품인 명기(明器)를 담아 운반하는 작은 가마이다. 죽안마를 실은 수레에는 1대 당 2명의 견예인(牽曳人), 즉 수레를 끄는 사람이 배치되어 수레를 앞에서 끌고 간다.
죽안마는 싸리나무와 마른 풀[고초(藁草)], 가마니, 깔개 등을 엮어서 만든다. 우선 두터운 판자로 ‘정(井)’자 모양의 받침판[정자판(井字板)]을 만들고, 井 안의 사각형의 네 모서리마다 구멍을 뚫는다. 나무를 깎아 만든 네 개의 말발굽을 네 개의 구멍에 끼워 단단하게 고정시킨다. 굵은 싸리나무 가지와 마른 풀 등을 엮어서 말의 뼈대를 만든 다음, 속이 빈 가마니와 마른 풀, 깔개 등으로 뼈대를 겹겹이 싸서 말의 몸체를 만든다. 말의 몸체에 베를 덮어씌우고 그 위를 종이로 다시 감싼 후, 말의 몸체 전체를 다양한 색으로 칠한다. 미리 준비한 실제 말의 꼬리와 갈기를 죽안마에 붙인다. 이어서 죽안마의 네 다리를 정자판 위의 네 개의 말발굽에 끼운 뒤, 말의 다리와 말발굽의 접합 부분을 쇠못[철정(鐵釘)]으로 박아 단단하게 고정시킨다. 죽산마의 제작 방법도 죽안마와 동일하지만, 죽안마에 다양한 색을 칠하는 것과 달리, 죽산마는 검은색으로만 칠하였고, 죽산마에는 안장을 얹지 않는다.
왕의 발인 행렬에서는 2필의 죽산마와 10필의 죽안마가 제작·사용되었다. 10필의 죽안마는 백색 말[백마(白馬)] 2필, 털빛이 붉고 갈기가 검은 말[유마(騮馬) 혹은 유마(駵馬)] 2필, 밤색 말[황마(黃馬)] 2필, 표적다마(表赤多馬) 2필, 구랑마(仇郞馬) 2필이다. 왕비와 즉위 전에 훙서(薨逝)한 왕세자·왕세자빈·왕세손 등의 발인 행렬에서는 죽산마 2필과 죽안마 4필이 사용되었는데, 죽안마는 백색 말 2필, 유마 2필이다.
이 죽안마는 1846년(헌종 12) 음력 윤5월 20일에 추존왕(追尊王) 익종(翼宗, 1809~1830)의 수릉(綏陵: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소재. 동구릉(東九陵)의 하나로 사적 제193호)을 원래 있던 자리인 서울시 성북구 석관동 부근에서 경기도 양주 용마산 아래로 천장(遷葬)하는 과정에서 사용된 것이다. 익종은 순조(純祖, 1790~1834, 재위 1800~1834)의 맏아들이자 헌종(憲宗, 1827~1849, 재위 1834~1849)의 아버지로서, 왕세자 시절에 훙서하였기 때문에 보통 효명세자(孝明世子)라고 부른다. 1835년(헌종 1) 음력 5월 19일에 헌종이 아버지인 효명세자를 익종으로 추존하여 관련 의례를 봉행하면서, 효명세자의 원래의 무덤이자 왕세자의 무덤인 원(園)의 격식으로 조성되어 있던 연경묘(延慶墓)를 왕릉인 수릉으로 명칭과 격식을 높여 재단장하였다. 1846년에는 풍수가 불길하다는 논의에 의해 수릉을 천장하였고, 이후 1855년(철종 6)에 현재의 위치로 재차 천장하였다.(박봉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