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궤열람> 전체>창덕궁수리도감의궤
1647년(인조 25) 6월 13일부터 11월 21일까지 인경궁(仁慶宮)을 해체하고 그 자재를 이용하여, 이괄(李适)의 난(1624년, 인조 2)으로 소실된 창덕궁(昌德宮)의 대조전(大造殿)·선정전(宣政殿)·희정당(熙政堂) 등의 전각을 중건하는 과정을 기록한 어람용 의궤이다. 수리도감(修理都監)에서 편찬했다. 창덕궁 전각들은 1405년(태종 5)에 건축된 이래, 여러 차례의 전란과 화재의 피해를 입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 때에는 궁궐 전체가 전부 불타버렸다. 1610년(광해군 2)에 중건되었는데, 이괄의 난 때는 인정전(仁政殿)만 남기고 대조전·선정전·희정당과 주변 건물들이 다시 소실되었다.
이 의궤는 권수 구별없이 1책으로, 표지까지 합해 총 386면이다. 목차는 따로 없으나 차례는 좌목(座目)·계사질(啓辭秩)·이문질(移文秩)·감결질(甘結秩)·1소(一所)·2소(二所)·3소(三所)·4소(四所)·5소(五所)·인경궁분소(仁慶宮分所)·별공작(別工作)·노야소(爐冶所)·의궤사목(儀軌事目)·비망기(備忘記)·전각문호질(殿閣門號秩)·서압(署押)의 순이다.
본문 안쪽 제목은 ‘순치사년정해유월십오일 창덕궁수리도감의궤(順治四年丁亥六月十五日 昌德宮修理都監儀軌)’라고 쓰여 있다. 좌목에는 도제조(都提調)인 영의정 김자점(金自點), 제조(提調)인 해숭위(海嵩尉) 윤신지(尹新之) 등 7명, 그리고 도청(都廳), 낭청(郞廳), 감조관(監造官), 원역(員役) 등 총 98명의 성명이 실려 있다. 그런데 총책임자인 도제조의 경우 1633년(인조 11) 창경궁(昌慶宮) 수리소 때에 해숭위 윤신지가 책임자였던 반면에 이때는 영의정인 김자점이 임명된 것으로 볼 때 창덕궁 수리도감의 위상과 공사의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계사(啓辭)는 각 관청에서 올린 보고와 전교(傳敎)가 날짜순으로 수록되어 있다. 창덕궁 중건에 대한 논의는 3월 25일에 비변사가 올린 계(啓)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인경궁으로 옮기는 것을 인조(仁祖)가 받아들이지 않자 비변사에서는 그 대안으로 창덕궁을 제시했으나 창경궁을 개수(改修)하여 사용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창덕궁 수리에 대한 두 번째 논의는 바로 1647년 6월 13일에 올린 비변사의 계사이다. 당시 창경궁에 저주(詛呪)의 사건이 발생하자 인조는 궁궐을 옮기려고 했다. 이때도 비변사에서는 인경궁으로 옮기도록 했으나 창덕궁을 수리하여 사용하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이에 따라 인경궁 전각을 해체하고 그 재목 및 물자를 가지고 창덕궁 전각들을 중수(重修)했다. 명목상 수리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영건(營建)에 가까웠다. 대조전·선정전·희정당 뿐만 아니라 주변 전각인 저승전(儲承殿)·정묵당(靜默堂)·집상당(集祥堂)·보경당(寶慶堂)·옥화당(玉華堂)·태화당(泰和堂)·연화당(讌和堂)·징광루(澄光樓)와 주변 월랑(月廊) 등을 건축했다. 이들 건물들은 청기와 등을 사용한 인경궁의 전각들을 옮겨놓았기 때문에 매우 웅장하고 화려했다. 이러한 모습은 현재도 선정전의 모습을 통해 일부 추측해 볼 수 있다.
각 관청의 계사 외에도 사목(事目)·별단(別單)·상량문(上樑文)·상량의(上樑儀) 등이 첨부되었다. 특히 대조전·선정전·희정당·저승전의 상량문과 상량의가 각각 실려 있다. 이외에도 계사 부분에는 공사 관련 인원 증감 및 교체, 인경궁 전각 해체 및 물자 운송, 3,000여명의 승군(僧軍) 동원, 각종 공사 택일, 공사 실시에 따른 폐단, 상량문 제작, 저승전 건설, 각종 아문 청사 건설, 추위 대책, 각종 물종 마련 대책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
6월 15일에 발표된 19조항의 「도감사목」에는 각 관원 및 인력들의 차출 및 배속, 타 업무 겸직 금지, 급료 지급, 도감 처소 마련, 인신 제작, 지필묵 수급, 구료, 관리 처벌, 숙직 등이 포함되었다.
이문질에는 각 관청 사이에 왕래한 문서를 날짜별로 정리하고 있는데, 대부분 물자와 기계의 운송, 인력 동원을 독려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6월 15일자에 하삼도와 경기도·강원도에 내린 이문에서는 인경궁의 자재를 창덕궁으로 옮길 때 필요한 인력으로 승군 총 3,040명을 분정했다.
감결질에는 도감 및 각 처소에서 소요되는 물자의 진배(進排)·처리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승군 거처에 일반인의 접근 금지, 단청에 소요되는 물품 진배 등이 주된 내용인데, 도감조비잡물질(都監措備雜物秩)에는 총 80종의 물종이 첨부되어 있으며, 이중 남초(南草)는 351근 7냥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이채롭다.
1소의 목차는 명단, 수본질, 인경궁 철훼질(仁慶宮撤毁秩), 창덕궁 각전 조성(各殿造成) 등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인경궁 해체 작업 과정에서 청기와 4,860여장이 수거된 점이 눈에 띈다. 2소의 목차는 명단, 수본질, 인경궁전각철훼질, 철훼재와철물질(撤毁材瓦鐵物秩), 조성질(造成秩) 등 순이다. 이때 동원된 공사 인력으로는 고립군(雇立軍)이 50명에서 200명이었다. 3소의 목차는 명단, 수본질, 인경궁철훼 등 순이다. 공사 인력으로는 모군(募軍)이 매달 200명씩 동원되었다. 4소의 목차는 명단, 수본질, 인경궁철훼간각수(仁慶宮撤毁間閣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때 청기와 약 7,790여장이 사용된 점이 특이하다. 5소의 목차는 명단, 수본질, 인경궁철훼간각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경궁분소의 업무는 전각 및 문 현판을 제작하는 것으로 목차는 명단, 수본질, 인경궁역사시실입질(仁慶宮役事時實入秩) 등 순이다. 별공장의 내용은 명단, 각양목물봉상질(各樣木物捧上秩), 각소진배실입질(各所進排實入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노야소는 제련(製鍊)을 담당하는데, 수본질과 실입질로 나누어져있다. 이때 당시 정철(正鐵)을 만들기 위해 쇠조각이 무려 19,574근에 소요되었다.
의궤사목은 단자(單子) 형태로 총 11개 조항이 실렸다. 그 내용을 보면 의궤사목의 작성 장소는 옛 병조이며, 어람용과 분상용인 의정부, 춘추관, 예조, 적상산사고 보관본 등 총 5건이 제작되었다. 논상(論賞)의 경우, 비망기 형태로 내려졌는데, 담당 관리나 공사 참여자들에게 포상을 했다. 끝부분에는 전각문호질이 정리되어 있다. 창덕궁을 중건하면서 각 전각 및 문들의 액호(額號)들과 서사(書寫)한 사람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 장에는 서압부분으로 의궤 작성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과 수결이 실려 있다.
이 의궤는 창덕궁 전각의 중건과 관련하여 현존하는 의궤 중에서 가장 오래된 자료이다. 이 자료를 통해 17세기 궁궐 건축의 모습과 과정들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창경궁수리소의궤』와 상호 비교해 보면 광해군 대 창건된 인경궁의 전체 규모를 역추적해 볼 수 있다. 인경궁은 광해군 때 인왕산 아래에 지었던 궁궐이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창덕궁을 복구하였으나 창덕궁에서 일어났던 사건과 일부 풍수지리가의 말을 믿고 불길하게 생각하여 이어(移御)를 망설였다. 그 후 광해군은 경기도 파주시 교하(交河)에 신궁을 건설하려 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간 뒤, 1616년(광해군 8) 성지(性智)라는 승려가 풍수지리설을 들어 인왕산 아래가 명당이므로 이곳에 궁전을 지으면 태평성대가 온다고 주장하자 이 말에 따라 이 곳에 궁터를 잡게 한 뒤 그 이듬해부터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공사 도중에 새문동(塞門洞 : 지금의 종로구 신문로일대)에 왕기(王氣)가 있다는 설이 나돌자, 이를 누르기 위하여 궁궐을 짓게 한 것이 경덕궁(慶德宮: 또는 경희궁)이었다. 이에 따라 인경궁 공사는 거의 중단되다시피 하다가 1621년(광해군 13)부터 본격적인 공사가 계속되었으나 1623년(인조 1)에 일어난 인조반정으로 건설공사는 중지되었다. 인경궁은 경희궁에 비하여 규모가 큰 궁궐이었다. 그러나 인조 때 창경궁 및 창덕궁 등의 복구에 전각들이 쓰이면서 인경궁의 자취는 사라지게 되었다. 또한 이 의궤는 여느 영건의궤와 달리 궁궐의 해체·이건(移建)이라는 매우 특이한 건축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대규모 공사임에도 불구하고, 단기간인 6개월만에 공사를 완료했다. 이는 광해군과 인조 때에 시행된 각종 궁궐 공사 경험의 축적이라고 생각된다. 이 의궤를 비롯해 현존하는 당대 궁궐 영조(營造) 의궤들을 비교 검토해보면 재정 조달책, 인력 동원책 등 조선 후기 경제 정책의 변화 과정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시기는 명·청 교체 시기이므로 각종 재목·철물·안료·기와류 등의 중국으로부터의 유입 상황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상량문과 상량의는 창덕궁 전각들의 건축의 목적과 배경에 대해 살펴볼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이 의궤는 어람용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분상용 4건 중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적상산사고본(〈K2-3599〉)이 소장되어 있다. 형태상의 차이점을 살펴보면 장정의 경우, 변철로 분상용은 원환으로 박을정(朴乙丁)이 3개인데 비해 어람용은 국화동(菊花童) 무늬로 박을정이 5개이다. 재질의 경우, 분상용은 표지가 홍포이고 본문은 저주지(楮注紙)임에 반해, 어람용은 원표지가 초록무문주(草綠無紋紬)이며 본문은 초주지(草注紙)를 사용했다. 한편 영인본 379와 380면은 착간(錯簡)이다. 아마도 순서상 302면과 303면 사이에 위치하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이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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