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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헌세자영우원천봉도감의궤 (4)(莊獻世子永祐園遷奉都監儀軌 (四)) 상세보기 이전으로 설명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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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정조 13) 7월~10월에 양주 배봉산에 있던 장헌세자(莊獻世子, 1735~1762)의 영우원을 수원 화산으로 옮긴 과정을 기록한 『장헌세자영우원천봉도감의궤(莊獻世子永祐園遷奉都監儀軌)』 총 7책 중 제4책에 수록된 반차도이다. 이 천봉은 풍수상의 길지로 원소를 옮겨 생부를 추숭하려던 정조(正祖)의 뜻에 따라 추진되었다. 1789년 7월부터 공역이 시작되어 8월 7일 새 원소의 이름을 현륭원(顯隆園)으로 정하고, 10월 2일 옛 원소의 현궁을 열고 재궁을 꺼내어 정자각에 봉안한 후, 5일 발인하여 둑도(纛島)에서 배로 강을 건너 과천에서 하룻밤 묵고 6일 새 원소의 정자각에 도착하였다. 정조는 둑도까지 수가한 뒤 환궁하였다가 7일 새 원소에 행차하여 안장 작업을 지켜보았다.
이 반차도는 옛 원소에서 새 원소로 재궁과 부장품 등을 모셔 가는 발인 행렬의 반차를 그린 것이다. 1762년(영조 38)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발인반차도를 토대로 하면서 길의장 대열에서 책·보 가마가 제외되고 혼백련이 지방련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사도세자의 발인 행렬에서는 명기 채여와 만장도 없이 증옥·증백과 휘지를 담은 채여 하나만 있었기 때문에 흉의장 대열에 서는 채여도 하나뿐이었다. 정조는 이렇듯 허술한 발인 행렬에 위의를 드러내기 위해 우선 행렬 선두에 한성부 당상과 예조·호조의 당상, 대사헌을 참여시켜 왕의 도가에 버금가게 하였다. 또한 훈련도감 군병 700명을 전·후 시위대로 배치하고 만장 100축을 새로 편성하였으며 의장기의 숫자도 크게 늘렸다.
이 반차도에서는 일렬 횡대로 늘어서던 시위군의 행렬이 3개 대(隊)를 이룬 부대의 편제로 바뀌고 고초기(高招旗)와 당보기(塘報旗) 등 군사 지휘에 쓰던 각종 기치류를 등장시켜 실제 행군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군대 묘사는 영조(英祖) 연간부터 조금씩 선보이던 것을 보다 구체화한 것으로 이후 시위군 표현의 규범이 된다. 정조는 이렇게 하여 편성한 발인 행렬이 실제에서도 제대로 구현될 수 있도록 행사 전에 반차도를 여러 건 제작케 하여 관원들의 실무지침으로 하달하였다.
이 의궤 반차도는 인각을 밑그림처럼 찍은 후 윤곽선과 채색을 정밀하게 더하여 높은 완성도를 보인다. 또한 향정자와 지방거 등 각종 가마 행렬을 실제 행렬처럼 입체감 있게 묘사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송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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