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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 (하)(英祖貞純王后嘉禮都監儀軌 (下)) 상세보기 이전으로 설명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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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9년(영조 35) 5월~6월에 영조(英祖, 1694~1776, 재위 1724~1776)가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耉)의 딸을 계비(정순왕후(貞純王后), 1745~1805)로 맞는 과정을 기록한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英祖貞純王后嘉禮都監儀軌)』 상·하 2책 중 하책에 수록된 반차도이다. 1757년(영조 33)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가 승하하고 삼년상이 지나자 왕실 가례의 예법인 육례(六禮)의 절차에 따라 계비를 맞았다. 6월 9일 삼간택에서 최종 확정된 신부는 당일 어의동 별궁으로 나아갔고, 이어 신부집에 청혼을 하는 납채(納采)가 6월 13일, 혼인이 이루어진 징표로 예물을 보내는 납징(納徵)이 6월 17일, 길일을 택하여 알리는 고기(告期)가 6월 19일, 왕비를 책봉하는 책비(冊妃)가 6월 20일, 영조가 왕비를 맞아 오는 친영과 동뢰연(同牢宴)이 6월 22일에 거행되었다.
이 반차도는 영조가 어의동 별궁에서 친영의식을 행한 후 동뢰연을 위해 왕비와 함께 대궐로 가는 행렬을 차례대로 그린 것이다. 신부가 대궐로 가는 행렬만 묘사되던 기존의 가례 반차도와는 달리 왕과 왕비의 행렬이 같이 묘사되었다는 점에서 획기적 의의가 있다. 왕의 거둥 반차도는 영조의 하교에 따라 제작된 것으로, 대가도가와 전사대, 대가의장을 앞세우고 전후좌우에서 군사들이 겹겹이 시위하는 가운데 행차하는 왕의 모습을 보여주는 예로서 중요하다. 왕비의 반차도는 기존 방식대로 왕비 의장을 진열한 가운데 교명·옥책·금보·명복 등 각종 의물을 모신 가마와 짐꾼들을 앞세우고 가는 왕비 행렬이 묘사되었다. 왕과 왕비의 행렬은 각각의 시위군과 의장, 배종 관원을 거느린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당시에는 영조의 특명으로 하나의 행렬로 편성되었다. 도감에서는 친영을 위한 안팎의 예행연습이 있기 전인 6월 14일, 영조와 세자, 세손용으로 반차도 3건을 제작하여 올렸다. 왕과 왕비의 행렬이 같이 등장하는 반차도는 ‘친영반차도’라 불렸다.
이 반차도는 가례 후 제작된 의궤 5건 중 어람용 의궤에 수록된 것이다. 총 50면으로 되어 있는데 그중 왕의 행렬이 28면, 왕비의 행렬이 22면이다. 도장[印刻]을 활용한 분상용 의궤 반차도와는 달리 인물과 말, 각종 기물을 일일이 그리고 정성껏 채색하여 완성하였다. 상(像)들은 견본을 밑에 대고 그린 것처럼 가지런하고 균일하여 높은 묘사 수준을 보여준다. 하지만 각종 가마류는 인각을 활용하였다. 요여와 채여류에 쓰인 소형 가마, 왕비 연에 쓰인 중형 가마, 왕의 연과 부련에 쓰인 대형 가마 등 세 종류의 가마 인각이 확인된다. 그중 왕의 연과 부련은 가마와 가마채, 가마꾼 16인을 한 벌로 새긴 인각을 활용하였다. 연과 부련은 가마의 형태와 가마꾼의 자세와 위치, 의복의 주름선이 동일하다. 인각을 찍은 뒤 윤곽선을 다시 그리고 문양 및 채색을 더하여 직접 그린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 반차도는 18세기 어람용 반차도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동시에 19세기 친영 반차도 제작의 규례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송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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