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별행소』―고려 왕실과 귀족의 컬래버레이션(Collaboration; 협업)

『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별행소(大方廣佛華嚴經普賢行願品別行疏)』는 중국 화엄종의 4대 조사(祖師)인 청량(淸凉) 징관(澄觀, 738~839)이 『대방광불화엄경』에 등장하는 보현보살普賢菩薩의 10가지 수행 방법에 대해 상세하게 해설한 주석서입니다.

『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별행소』, 고려 1387년, 26.7×15.6cm, 보물, 증3461

『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별행소』, 고려 1387년, 26.7×15.6cm, 보물, 증3461

화엄종 조사가 직접 해설한 실천 수행법

흔히 ‘화엄경’이라고 줄여 부르는 『대방광불화엄경』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북인도의 승려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가 418~420년 동진(東晋)에서 전체 60권으로 번역한 것이고, 두 번째는 695~699년에 우전국(于闐國) 출신 승려 실차난타(實叉難陀)가 80권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두 『화엄경』 모두 「입법계품(入法界品)」이라는 제목의 이야기를 마지막에 수록했는데, 선재동자(善財童子)가 53명이나 되는 사람‧신(神)‧보살(菩薩)들을 차례로 만나 진실한 수행 방법을 배워나가는 과정을 담은 것입니다. 그 구성과 전개 과정이 극적이어서 대중에게 큰 인기를 얻었고, 머지않아 『화엄경』에서 떨어져 나와 별도의 경전으로 유통되었습니다. 이것을 계빈국(罽賔國)의 승려 반야(般若)가 796~798년에 40권으로 새로 번역하였는데, 이 번역본이 바로 세 종류의 『화엄경』 중 마지막인 ‘정원본(貞元本)’ 『화엄경』입니다.

『대방광불화엄경 정원본』 권제20, 고려, 31.0×12.3cm, 보물, 증3458

『대방광불화엄경 정원본』 권제20, 고려, 31.0×12.3cm, 보물, 증3458

‘정원본’ 『화엄경』의 제1권부터 제39권까지는 첫 번째 및 두 번째 『화엄경』의 「입법계품」과 같은 내용이지만, 마지막 제40권은 보현보살이 실천한 10대 수행을 소개한 것으로 이전의 『화엄경』에는 없는 새로운 이야기입니다. 기존의 「입법계품」에서는 선재동자가 보현보살을 만나 가르침을 받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맺었는데, ‘정원본’ 『화엄경』에서는 선재동자가 보현보살에게서 받은 가르침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내용을 마지막에 추가함으로써 깨달음을 향한 지혜는 결국 실천으로 완성된다는 메시지를 강조한 것입니다. ‘정원본’ 『화엄경』의 결론이라고도 할 수 있는 권제40은 믿음과 수행을 중요하게 여긴 동아시아 불교도에게 크게 환영받았고, ‘정원본’ 『화엄경』에서 떨어져 나와 『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이하 『보현행원품』)이라는 이름의 별도 경전으로 유통되기도 했습니다. 『화엄경』의 한 부분인 「입법계품」을 떼어내어 만든 ‘정원본’ 『화엄경』, 다시 ‘정원본’ 『화엄경』의 한 부분인 권제40을 떼어내어 만든 『보현행원품』. 방대한 내용의 『화엄경』에서 핵심만을 추리고 또 추려낸 결과물이 바로 『보현행원품』인 것입니다. 징관은 바로 이 『보현행원품』을 보고, 경전 구절을 하나하나 해설하여 주석서인 ‘소(疏)’를 썼습니다. 그래서 책 이름을 ‘『대방광불화엄경』의 일부만 따로 펴낸 『보현행원품』을 풀이한 주석서’라는 의미로 『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별행소』(이하 『별행소』)라고 지었습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고려 왕실 발원본

징관이 『별행소』를 지은 후 그의 제자인 규봉(圭峰) 종밀(宗密, 780~841)이 이것을 좀 더 상세히 해설하여 『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별행소초(大方廣佛華嚴經普賢行願品別行疏鈔)』(이하 『별행소초』)를 썼습니다. 『별행소』의 문장을 인용한 후 자신의 해설을 덧붙인 방식입니다. 징관의 『별행소』 내용뿐만 아니라 종밀의 해설까지 한 번에 살필 수 있어서 이후로는 『별행소초』가 널리 유통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별행소』만 따로 만들 필요는 적어졌던 것인지, 지금까지 남아 있는 판본도 많지 않습니다. 알려진 바로는 일본에 전하는 12세기 필사본이 가장 오래되었고, 그다음으로 오래된 것이 지금 소개하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별행소』(증3461/보물)는 고려시대에 간행한 목판본입니다. 1권으로 되어 있고, 크기는 26.7×15.6㎝, 글자는 한 면 11행에 1행당 21자를 써서 우리가 흔히 보는 조선시대 책에 비해 작고 글자 또한 조밀한 편입니다. 책의 끝부분에는 두 개의 발문(跋文)이 있습니다. 첫 번째 발문은 이 책을 처음 간행할 때인 고종 43년(1256)에 승려 무용(無用)이 쓴 것으로, 연기사(緣起寺)의 승려 심익(心益) 등과 함께 뜻을 모아 간행했다고 밝혔습니다.

『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별행소』 권말 승려 무용의 발문

『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별행소』 권말 승려 무용의 발문

두 번째 발문은 고려 말의 대표 문인인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이 쓴 것입니다.

이색 초상, 조선, 142.0×75.0㎝, 본관11422

이색 초상, 조선, 142.0×75.0㎝, 본관11422

이에 따르면 이 책은 본래 보각국사(普覺國師) 환암(幻菴) 혼수(混脩, 1320~1392)가 가지고 있던 것인데, 당시 왕비였던 근비(謹妃)가 왕과 왕자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 목판에 다시 새겨 개경 금사사(金沙寺)에서 인쇄했다고 합니다. 이때가 우왕(禑王) 13년(1387)으로 실제 사업 추진은 환관(宦官)이었던 강인부(姜仁富)가 맡았고, 근비의 아버지‧어머니를 비롯하여 여러 고위 관리가 참여했습니다. 이 두 개의 발문 내용을 통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별행소』는 1256년에 간행한 판본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1387년에 다시 새긴 번각본(飜刻本)이며, 왕비가 발원하고 귀족들이 동참한 왕실 발원본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왕실과 귀족이 한 마음으로 쌓은 공덕

발문을 찬찬히 읽어보면 좀 더 재미있는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승려 무용이 쓴 발문부터 보겠습니다. 무용은 세상에 이익이 되고 싶어서 이 책을 목판으로 간행한다고 하면서 “해와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더욱 빛나고 영원히 이어지기를, 전하께서 만수무강하시고 나라가 더욱 굳건하기를, 청하상국(淸河相國)의 수명과 복이 더욱 길어지고 커지기를……”이라는 바람을 적었습니다. 여기에서 왕과 함께 ‘청하상국’의 장수를 기원한 부분이 주목됩니다. 고려나 조선시대에는 불교 서적을 간행하면서 왕과 왕비 등 왕실의 장수를 기원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원 간섭기에 들어서면 고려 왕실보다 앞에 원나라 황제의 장수 기원 문구를 적었습니다. 불서 간행 발원문에서는 으레 국가와 동일시되는 존귀한 이들의 복을 기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용의 발문에 등장한 ‘청하상국’ 또한 상당히 높은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상국’ 즉 재상이라고 한 것이나 왕보다 뒤에 이름이 나오는 점으로 보아 왕실 구성원은 아니지만 왕 다음으로 지위나 권력이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문집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는 “청하상국―지금의 진양후(晉陽候)이다―의 추천으로 진강공(晉康公, 최충헌)의 집에 갔는데……”라는 구절이 보입니다.

이규보 묘지명, 고려, 106.5×66.4×4cm, 신수5873

이규보 묘지명, 고려, 106.5×66.4×4cm, 신수5873

여기에서 진양후는 최씨 무신정권의 2대 집정(執政)인 최우[崔瑀, 최이(崔怡), ?~1249]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무용이 나라에서 지위가 가장 높은 왕과 더불어 가장 권력이 막강한 최우의 장수를 기원한 것이 되므로 고려시대 불서 발원 형식에도 잘 어울리게 됩니다. 문제는 무용이 발문을 쓴 1256년은 최우가 사망한 지 6년이나 지난 시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청하상국’이 최우의 아들로서 최씨 정권의 3대 집정이 된 최항(崔沆, ?~1257)을 가리킨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최충헌과 최우‧최향을 위해 만든 『불정심다라니경』과 경갑, 고려 1206~1219, (다라니경) 5.3×27.5cm, (경갑) 3.5×6.5cm, 보물, 신수14147

최충헌과 최우‧최향을 위해 만든 『불정심다라니경』과 경갑, 고려 1206~1219, (다라니경) 5.3×27.5cm, (경갑) 3.5×6.5cm, 보물, 신수14147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최당(崔讜, 1135~1211)이라는 사람을 ‘상국(相國) 청하공(淸河公)’이라고 지칭한 경우도 있고, ‘최자(崔滋)’라는 인물을 가리킨다고 한 사례도 있어서 무용이 장수를 빌어준 ‘청하상국’이 누구인지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합니다.

『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별행소』 권말 이색의 발문

『대방광불화엄경보현행원품별행소』 권말 이색의 발문

이색의 발문에서는 이 『별행소』를 다시 새기던 때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청주 출신의 관료 정공권(鄭公權, 1333~1382)도 평소에 『별행소』를 판각하려는 마음이 있어서 재료로 쓸 판목까지 다 마련해놓았으나, 판각을 시작하지도 못하고 그만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얼마 후 정공권의 부인 한씨는 우왕의 왕비인 근비가 『별행소』를 간행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이에 남편이 생전에 준비해 놓은 판목에 재물까지 얹어서 내어주었던 것입니다. 그 덕분에 한씨는 발원문 끝의 시주자 명단에 마지막으로 이름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왕비가 발원하여 시작한 일이지만 실제 진행 과정에는 여러 귀족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핀 것처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별행소』는 그 형태적 특징으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는 유물입니다. 우선 국내에서는 제작 시기가 가장 빠를 뿐만 아니라 유일한 고려시대 판본이기도 하고, 보존 상태 또한 매우 양호하다는 점이 눈길을 끕니다. 또한 현재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징관의 『별행소』 완본이라는 점에 더하여 13세기 무신집권기의 일면과 고려 말 왕실에서 주도한 불서 간행 사업의 구체적인 모습까지 확인할 수 있어서 고려시대사 및 불교사, 인쇄기술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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