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세한도 – 끝나지 않는 감동 : 이수경

〈세한도(歲寒圖)〉는 1844년 제주에서 제작된 이후 176년 동안 여러 주인을 거쳤습니다. 동아시아 삼국을 오간 〈세한도〉의 여정이 고스란히 남아 현재 긴 두루마리로 전합니다. 2020년 손창근(孫昌根, 1926~ ) 선생의 숭고한 결단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되어 이제는 우리 모두의 〈세한도〉가 되었습니다.

김정희, 〈세한도〉, 조선 1844년, 두루마리, 종이에 먹, 23.9×108.2cm, 2020년 손창근 기증, 국보, 증10000

김정희, 〈세한도〉, 조선 1844년, 두루마리, 종이에 먹, 23.9×108.2cm, 2020년 손창근 기증, 국보, 증10000

〈세한도〉와 22편의 감상글로 이루어진 두루마리

많은 분들이 〈세한도〉 하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그림과 글만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세한도〉를 보고 한국과 중국의 문인 20명이 쓴 22편의 감상글이 덧붙여져 현재 〈세한도〉는 전체 길이 1,469.5cm의 긴 두루마리 형태로 전해옵니다.
〈세한도〉 두루마리는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1910년대 초 〈세한도〉 소장자였던 김준학(金準學, 1859~1914)이 오랫동안 앓다가 쾌차한 것을 기념하여 1914년에 쓴 ‘완당세한도(阮堂歲寒圖)’와 시가 함께 적혀 있는 부분입니다. 두 번째가 1844년에 제작된 김정희의 〈세한도〉입니다. 세 번째는 중국 청나라 문인 16인이 1845년에 〈세한도〉를 보고 쓴 글 16편과 김준학이 1914년에 추가한 글 2편이 4개의 종이에 쓰인 부분입니다. 네 번째 부분이 753.7cm로 가장 긴데, 한국 근대 지식인 오세창, 이시영, 정인보가 1949년에 쓴 3편의 글과 함께 비어 있는 부분이 거의 5m에 이릅니다.

세한과 송백을 담은 〈세한도〉

허련, 〈완당 선생 초상〉, 조선 19세기 중반, 액자, 종이에 엷은 색, 36.5×26.3㎝, 2018년 손창근 기증

허련, 〈완당 선생 초상〉, 조선 19세기 중반, 액자, 종이에 엷은 색, 36.5×26.3㎝, 2018년 손창근 기증

〈세한도〉가 제작된 배경은 19세기 전반 세도정치와 관련이 깊습니다. 똑똑하고 총명했던 명문가 자제 김정희는 반대 세력인 안동 김문의 모함으로 55세 때 억울하게 제주도로 유배를 떠났습니다. 유배형 중에서도 가장 엄중한 절해고도(絶海孤島) 위리안치(圍籬安置)였습니다. 즉, 멀리 떨어진 섬에서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감금형에 처해진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유배는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언제 유배가 풀릴지 기한이 없었습니다. 3년이 지나도 김정희에게는 아무런 소식이 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김정희를 사형에 처하라는 상소가 끊임없이 올라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죄인 김정희를 변함없이 대하는 제자가 있었으니, 바로 중국어 통역관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이었습니다.
이상적은 중국에서도 구하기 쉽지 않은 책을 제주의 김정희에게 줄곧 보내주었습니다. 책은 김정희에게 정체성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늘 책에서 학문과 예술의 근원을 찾았습니다. 또한 유배 중인 그에게 책은 고독을 달래주는 친구 같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김정희는 이상적의 변치 않는 의리를 공자님 말씀을 담은 『논어』의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라는 유명한 구절에 빗대어 칭찬하고 그림으로 표현했습니다. 한국의 현대인은 이 문구를 들으면 김정희만을 떠올리지만, 기록으로 전하는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여러 문인 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잘 알려진 문구입니다.


〈세한도〉 속 세한의 표현

‘세한’은 한겨울 추운 날씨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되어서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라는 뜻입니다. 그림 왼쪽에 종이를 이어 네모 칸을 친 부분에 이 그림을 왜 그리게 되었는지를 강하고 굳센 필치로 상세히 적었습니다. 김정희는 이 구절을 어떻게 그림으로 표현했을까요? 둥근 문이 있는 허름한 집 좌우로 소나무 두 그루, 측백나무 두 그루를 세워놓았습니다. 쉽게 쓱 그린 그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무줄기와 잎을 표현한 메마르면서 촘촘한 필치가 눈에 들어옵니다. 물기 없는 마른 붓에 진한 먹물을 묻혀 칼칼하게 표현했습니다. 언뜻 쉬워 보일 수도 있지만, 마른 붓을 다루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이런 표현은 김정희가 오랫동안 갈고닦아 이루어낸 필력에서 나온 것입니다. 김정희는 메마르고 황량한 세한, 가장 추운 겨울날의 분위기를 전달하는 데 가장 어울리는 필법을 찾아낸 것이지요.

〈세한도〉 속 소나무 부분〈세한도〉 속 소나무 부분

〈세한도〉 속 소나무 뿌리 부분〈세한도〉 속 소나무 뿌리 부분

이 그림은 조선시대 작품으로는 드물게 제목과 제작 동기가 명확히 밝혀져 있습니다. 그림 오른쪽에 ‘세한도’라는 제목을 적고, 이어서 “우선 보시게나. 완당(藕船是賞 阮堂)”이라고 써서 자신이 이상적을 위해 그렸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아래에 ‘정희’라고 찍힌 인장이 있습니다. 그림 좌측에 종이를 이어 네모 칸을 치고, 강하고 굳센 필치로 그림을 왜 그리게 되었는지를 상세히 적었습니다.

〈세한도〉 속 제목 부분〈세한도〉 속 제목 부분

〈세한도〉 속 ‘장무상망’ 인문〈세한도〉 속 ‘장무상망’ 인문

김정희는 평소 여러 인장을 즐겨 사용했는데, 〈세한도〉에도 4개의 인장이 찍혀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새긴 ‘정희(正喜)’ 외에도 호를 새긴 ‘완당(阮堂)’과 ‘추사’ 인장이 있고, 시구를 쓴 ‘장무상망(長毋相忘)’이 찍혀 있습니다. 이중 가장 주목할 인장은 그림 오른쪽 아래에 있는 ‘장무상망’입니다.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의미입니다. ‘장무상망’ 인장은 중국 한나라 기와나 거울에 새겨진 문구를 모방한 것으로 청나라 사람들이 사용했습니다. 김정희는 젊었을 때 동그란 ‘장무상망’ 인장을 사용했는데 〈세한도〉에는 네모난 ‘장무상망’이 찍혀 있습니다. 이 인장이 누구 소유였는지 누가 찍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인장은 김정희와 이상적이 서로를 향해 송백의 마음을 오래도록 잊지 말자고 했던 뜻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이처럼 김정희는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기 위해 가장 적절한 제목, 소재, 필법, 인장으로 치밀하게 〈세한도〉를 완성했습니다. 〈세한도〉가 뜻과 정신을 그림으로 표현한 최고의 문인화로 평가받는 이유입니다.

중국으로 간 〈세한도〉

반희보, 〈세한도〉 감상글 반희보, 〈세한도〉 감상글

 백자 양각 당초무늬 완, 금, 높이 6.2cm, 지름 18.5cm, 개성24 이시영, 〈세한도〉 감상글

이상적은 일곱 번째로 떠나는 중국 출장길에 〈세한도〉를 소중히 챙겨갔습니다. 그리고 평소 친하게 지내던 청나라 문인 장요손(張曜孫, 1807~1863)이 주최한 모임에서 〈세한도〉를 꺼내어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자리에 참여했거나, 이후 그 그림을 본 청나라 문인 16명이 감상 글을 적었습니다.
청 문인들은 〈세한도〉에 담긴 ‘군자가 송백과 같은 절의를 지키는 일의 어려움과 중요성’에 대해 글을 썼습니다. 장악진(張岳鎭)은 “세한 전 송백의 절조를 먼저 배워야 한다. 오직 그 절조가 항상 있기 때문에 사철 내내 변함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 그 절조를 알아주는 자가 없어도 송백은 태연자약하다.”라며 평소 문인으로서 절개와 지조를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장요손의 매형인 오찬(吳贊)은 “군자는 힘들수록 더욱 굳세어지니 받아주지 않는다 해도 무엇을 걱정하랴.”라며 군자의 흔들림 없는 마음을 강조했습니다. 이렇듯 〈세한도〉는 불의에 굴복하지 않고 옳은 일을 하며 올바른 가치를 지키는 자세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그림이었습니다.


20세기 〈세한도〉의 여정

김정희가 제자 이상적에게 준 〈세한도〉는 이후 이상적의 제자 김병선(金秉善, 1830~1891)이 소장하다가, 그의 아들인 김준학에게 전해졌습니다. 이후 민영휘·민규식이 소장했다고 전해집니다. 1932년에는 일본인 학자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隣, 1879~1948]가 〈세한도〉의 주인이었습니다. 그는 경성제국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김정희의 학문적 성과를 최초로 연구했고, 이한복, 손재형 등과 교류하며 김정희 관련 자료를 수집했습니다. 정년퇴임 후 그는 〈세한도〉를 비롯한 여러 자료를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1944년 진도 출신의 서예가 손재형(孫在馨, 1903~1981)은 일본으로 가서 두 달 동안 후지쓰카를 설득한 끝에 〈세한도〉를 돌려받았습니다. 손재형은 〈세한도〉를 잘 간직하고 있다가 광복 후 1949년, 당대를 대표하는 지식인 정인보, 이시영, 오세창에게 〈세한도〉 감상 글을 청했습니다. 현재의 〈세한도〉 두루마리는 손재형이 꾸민 것입니다. 손재형 이후 개성의 사업가 손세기(孫世基, 1903~1983)가 1970년대부터 소장하였고 장남 손창근이 소중히 간직하다가 2020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아무런 조건 없이 기증하였습니다.

〈세한도〉 기증으로 더 이상 감상글이 더해질 수 없음을 아쉬워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2020년 특별전 ‘한겨울 지나 봄 오듯’으로 〈세한도〉의 가치가 널리 알려지면서 수많은 관람객들이 인터넷에 감상평을 남겼습니다. 함께 나누려는 기증자의 뜻에 맞게 〈세한도〉의 의미가 현대의 새로운 방식으로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된 것입니다. 이처럼 〈세한도〉의 감동과 긴 여운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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