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 - 어머니의 은혜를 노래하다 : 유경희

뭉게뭉게 구름이 피어나는 가운데, 여러 무리와 함께 길을 가던 석가모니는 갑자기 멈춰 섰습니다. 길바닥에 (죽은 사람의 뼈로 추정되는) 해골이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머리를 숙이는 부처,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 조선 1432년, 목판본, 절첩식 한 면 33.5×11.3cm, 보물(붉은 선: 필자 표시), 증3460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 조선 1432년, 목판본, 절첩식 한 면 33.5×11.3cm, 보물(붉은 선: 필자 표시), 증3460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왕사성의 기수급고독원에서 삼만팔천인의 대비구와 보살들과 함께 계시었다. 그때 세존께서는 대중을 거느리고 남방으로 가시다가, 한 무더기의 뼈를 보시고는 오체투지(五體投地)의 예배를 올리셨다. 이에 아난과 대중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삼계의 큰 스승이요 사생(死生)의 자비로운 어버이시기에, 수많은 사람이 공경하고 귀의하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름 모를 뼈 무더기에 친히 절을 하시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비록 나의 으뜸가는 제자 중 한 사람이요 출가한 지도 오래되었지만, 아직 아는 것이 넓지 못하구나. 이 한 무더기의 마른 뼈가 어쩌면 내 전생의 조상이거나 여러 대에 걸친 부모의 뼈일 수도 있기 때문에 내가 지금 예배한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 한 무더기의 마른 뼈를 둘로 나누어 보아라. 만일 남자의 뼈라면 희고 무거울 것이며, 여자의 뼈라면 검고 가벼울 것이니라.”
아난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남자가 세상에 살아있을 때는 큰 옷을 입고 띠를 두르고 신을 신고 모자를 쓰고 다니기에 남자인 줄 알며, 여인은 붉은 주사와 연지를 곱게 바르고 좋은 향으로 치장하고 다니므로 여자인 줄 알게 되옵니다. 그러나 죽은 다음의 백골은 남녀가 마찬가지인데, 어떻게 제자로 하여금 그것을 알아보라 하시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남자라면 세상에 있을 때 절에 가서 법문도 듣고 경도 외우고 삼보께 예배하고 염불도 하였을 것이므로, 그 뼈는 희고 무거우니라. 그러나 여자는 세상에 있을 때 정과 본능을 좆아 자녀를 낳고 기르나니, 한번 아기를 낳을 때 서너 되나 되는 엉긴 피를 흘리고 여덟 섬 너 말이나 되는 모유를 먹이기 때문에 뼈가 검고 가볍느니라.”
이 말을 듣고 아난은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느껴 슬피 울면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하여야 어머니의 큰 은덕에 보답할 수 있겠나있까?”
(중략)

열 가지 어머니 은혜를 그린 그림

경의 제목은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 부모의 은혜가 한없이 크고 깊음을 설하며 그 은혜에 보답할 것을 가르친 경전이란 뜻입니다. 줄여서 <부모은중경>이라 하는데, 사실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은 <부모은중경>의 여러 이본(異本) 중 하나입니다. 이 경은 중국 당대 중반부터 송대(宋代)에 성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이하, <부모은중경>)이 경전이 우리나라에 언제 전래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려 말부터 조선 말까지 제작된 많은 판본이 전합니다. 현재 전하는 판본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1378년 제작된 판본이므로, <부모은중경>은 고려 말에는 수입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 경전은 조선이 효를 강조한 유교 사회였기 때문에 불교 경전임에도 <법화경>, <금강경>과 함께 가장 많은 판본이 제작되어 전합니다. 경전의 제목은 부모의 은혜로 적었지만, 내용은 대부분 어머니 은혜를 이야기합니다.
이 <부모은중경>은 태종(太宗, 1367~1422)의 후궁이었던 명빈 김씨(明嬪 金氏, ?~1479)가 발원(發願)하여 간행한 불경(佛經)입니다. 나무에 글과 그림을 새긴 뒤 종이에 찍어 병풍 형식으로 접어 만들었습니다. 조선 전기 <부모은중경>의 경전의 도상(圖像)과 조선 전기 왕실의 신앙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의미가 있어 보물(옛 지정번호 보물 제1125호) 지정되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중하게 관리되고 있습니다.
<부모은중경>에는 어머니의 열 가지 은혜[十恩]를 구체적으로 열거하였으며 이어 그림으로 나타낸 변상도(變相圖)에는 각 내용을 상징적인 이미지로 표현했습니다. 열 가지 은혜와 이를 묘사한 그림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회탐수호은(懷耽守護恩)’으로, 어머니가 임신하여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 몸가짐을 조심하는 은혜입니다. 집안 내부로 보이는 공간에 의자에 앉은 여인이 있습니다. 임신한 어머니를 그린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임산수고은(臨産受苦恩)’으로, 해산이 임박한 어머니가 괴로움을 이기는 은혜입니다. 가옥 안에 시녀를 동반한 여인의 모습으로 그려져 ‘회탐수호은’과 유사한 도상이지만, 앉아 있는 곳에 휘장이 쳐져 침상 주인이 해산에 임박했음을 추측하게 합니다. 세 번째는 ‘생자망우은(生子忘憂恩)’으로, 아이를 낳은 다음 모든 근심을 잊은 은혜를 말합니다. 침상에 앉아 있는 여인이 어머니이며 그림 하단에는 목욕을 시키는 시녀와 아기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첫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 어머니의 은혜를 먼저 적고 이를 이미지로 가시화하였습니다.

오른쪽부터 제1 회탐수호은, 제2 임산수고은, 제3 생자망우은

오른쪽부터 제1 회탐수호은, 제2 임산수고은, 제3 생자망우은

오른쪽부터 제4 인고토감은, 제5 회건취습은, 제6 유포양육은

오른쪽부터 제4 인고토감은, 제5 회건취습은, 제6 유포양육은

오른쪽부터 제7 세탁부정은, 제8 원행억념은, 제9 위조악업은, 제10 구경인민은

오른쪽부터 제7 세탁부정은, 제8 원행억념은, 제9 위조악업은, 제10 구경인민은

나머지 네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 어머니의 은혜를 살펴봅니다.

넷째, 쓴 것은 삼키고 단 것은 먹이신 은혜이니, 찬탄하노라.
다섯째, 아기는 마른자리에 뉘고 자신은 진자리에 눕는 은혜이니, 찬탄하노라.
여섯째, 젖을 먹여 길러주신 은혜이니, 찬탄하노라.
일곱째, 더러운 것을 깨끗이 씻어주신 은혜이니, 찬탄하노라.
여덟째, 떨어져 있는 자식을 걱정하신 은혜이니, 찬탄하노라.
아홉째, 자식을 위해 몹쓸 짓도 감히 하신 은혜이니, 찬탄하노라.
열째, 끝까지 자식을 사랑하는 은혜이니, 찬탄하노라.

변상도는 새김이 깔끔하여 이미지가 명확합니다. 인물들은 얼굴 형태가 갸름하고 이목구비를 단아하게 묘사하여 표정까지 살필 수 있으며, 옷주름을 묘사한 선도 정교하고 유연합니다. 이 판본은 왕실 발원본으로 사실적인 밑그림과 정교한 새김이 어울려 훌륭한 도상을 이루고 있습니다. 판각할 때 새로 밑그림을 그려서 새겼으며 고려본보다도 그림 표현과 새김이 우수합니다.

정조, 다시 부모은중경을 탄생시키다

국왕으로서 효심이 깊었던 정조(正祖, 1759~1800)는 명(命)으로 <부모은중경>을 조성하도록 하였습니다. 국왕의 명령으로 나라에서 조성되었기에 이 경전은 다른 사찰 간행본에 비해 판식이 정교하고 서체가 아름다우며 변상도도 매우 화려합니다.

『불설대보부모은중경』, 조선 1796년, 용주사간본, 구3381

『불설대보부모은중경』, 조선 1796년, 용주사간본, 구3381

정조가 <부모은중경>을 간행한 배경은 여러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노론과 소론의 싸움에 휘말려 억울하게 돌아가셨기 때문에 특히 부모의 은혜를 강조하는 경전을 제작하도록 명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도 이습니다. 정조가 전라도 장흥 보림사에 갔을 때 보경(寶鏡)이라는 승려가 이 경전을 바쳤는데 정조가 이에 감화 받아 용주사를 창건했으며, 경판을 새겨 용주사에 보관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조의 뜻에 따라 <부모은중경>은 변상도를 갖춘 한문본과 언해본으로 편집되었습니다. 용주사 간행본(刊行本)은 석가모니불가 해골을 보고 오체투지(五體投地)하는 모습이 앞서 언급된 보물 <부모은중경>보다 드라마틱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나머지 화면도 인물들의 움직임으로 인해 구도가 꽉 차 보입니다.

송성문 선생이 국가에 기증한 부모은중경

다시 앞의 <부모은중경>으로 돌아가 봅니다. 보물 <부모은중경>은 혜전(惠田) 송성문(宋成文, 1931~2011)이 국가에 기증한 문화재 중 하나입니다. 평안북도 정주(定住)가 고향인 송성문은 『성문종합영어』라는 영어참고서의 저자로도 널리 알려진 분입니다. 1960년경 귀중한 고인쇄 자료가 민간의 벽지로 사용되는 현실을 참을 수 없어 고서적 등을 수집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그는 언젠가 통일이 되면 고향 정주에 박물관을 짓겠다는 염원을 가지고 평생 유물을 수집하고 관리하였지만 이 꿈의 실현이 요원하자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을 결심하였다고 합니다.
송성문의 기증문화재에는 국가지정문화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모은중경>도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문화재이며 당시의 왕실 신앙과 불교 도상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이 경전을 함께 보고 느끼며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송성문 선생이 계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부모은중경>을 마주하며 송성문선생의 숭고하고 큰 기증의 뜻을 되새겨봅니다.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출처표시+변경금지
국립중앙박물관이(가) 창작한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 - 어머니의 은혜를 노래하다 저작물은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출처표시+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