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국립중앙박물관

 북청 여진문자 석각(北靑女眞文字石刻) 탁본- 함경도에서 발견된 금나라 마애명(磨崖銘)  : 강민경

함경남도 북청(北靑). 뒤는 높은 산이요 앞은 바다라, 거친 함경도 땅에서도 그나마 살 만하다는 고을입니다. 이곳은 일찍이 고구려 땅이었고, 발해가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를 두어 경영했지요. 서울에서 워낙 먼 곳이라 백사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이나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 같은 인물들이 유배객 신분으로 와서 머물곤 했습니다. 김동환(金東煥, 1901~?)의 「북청 물장수」라는 시로도 유명한 이 북청 땅에, 한일강제합병조약이 체결되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나귀에 온갖 짐을 싣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당도했습니다. 이 나라의 고적(古蹟)을 조사한다는 일본 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시의 행정구역으로 함경남도 북청군 속후면 창성리에 속하는 어느 지역을 찾아갑니다. 그리곤 사람이 도무지 살 수 없을 것 같은, 산양이나 뛰놀 것 같은 비탈진 돌산을 올라갔습니다. 산자락엔 뾰족뾰족한 바위들이 가득한데, 제법 잘 차려입은 이가 그중 하나를 살피더니 유심히 들여다보네요. 무언가 사람의 손길로 쫀 듯한 무늬가 보입니다. 무늬? 아니 무늬가 아니라 글자입니다. 글자는 글자인데 도통 읽을 수가 없습니다. 한자와 비슷한데 한자는 아니고, 한글은 더더욱 아니고요.

북청여진문자석각 탁본[榻本], 일제강점기, 종이에 먹, 81.4×140cm(탁본), 본관408

북청여진문자석각 탁본[榻本], 일제강점기, 종이에 먹, 81.4×140cm(탁본), 본관408

사람들은 종이를 펼쳐 그 글자 위를 덮었습니다. 이윽고 솜방망이를 만들어 물을 적시고, 종이를 두드렸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솜방망이를 두 개 만들었습니다. 하나에 먹물을 듬뿍 묻히더니 다른 하나를 꾹꾹 문지릅니다. 그렇게 문질러 먹물이 스며든 솜방망이로 살짝 마른 종이 위를 탕탕 두들깁니다. 금세 글자의 윤곽이 또렷해집니다.

“어이! 거기 기대 봐라. 사진을 찍어야겠다.”

탁본을 뜨던 인부 한 사람이 바위의 경사진 면에 기댔습니다. 그로써 글자의 크기가 가늠됩니다. 조사단을 따라온 사진사가 삼각대를 세우고, 그 위에 나무로 된 카메라 몸통을 얹었습니다. 그는 두꺼운 천을 덮어쓴 채 가죽 주름막 끝에 달린 렌즈의 초점을 맞춥니다.

유리건판 사진기 부품, 일제강점기, 나무 및 복합재료, 39.2×39.1cm(맨 왼쪽), 고적28902

유리건판 사진기 부품, 일제강점기, 나무 및 복합재료, 39.2×39.1cm(맨 왼쪽), 고적28902
※ 일제강점기의 사진기로, 북청 여진문자 석각 탁본과는 무관한 참고사진임.


바위에 아직 붙어있는 갓 뜬 탁본과 옆에 기댄 사람의 형태가 유리건판에 잡히자, 그는 카메라 렌즈로 손을 갖다 댑니다. 주름진 사진사의 손이 렌즈 옆 셔터에 닿은 순간.

“찰칵!”

그렇게 이 장면은 사진으로 남았습니다.
여진이 세운 금나라의 문자가 이곳 함경도 땅에서 쓰였던 증거, 북청 여진문자 석각(北靑女眞文字石刻)의 탁본 치는 장면이었습니다.

함경남도 북청군 여진문자 석각 탁본 장면, 1911년, 유리에 감광제, </br> 16.4×11.9cm, 건판692

함경남도 북청군 여진문자 석각 탁본 장면, 1911년, 유리에 감광제, 16.4×11.9cm, 건판692

여진과 고려의 관계

여진은 송화강(松花江)·모란강(牡丹江)·흑룡강(黑龍江) 유역과 만주 일대, 연해주와 함경도 등 유라시아 북동부 지방에 주로 살던 퉁구스 계통의 종족입니다. 만주어로는 주션(Jušen), 몽골어로는 주르첸(Jürchen)이라고 하며, 한자로는 여진 또는 여직(女直)이라고도 합니다. 이들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고구려와 발해에 복속되기도 하고 저항하기도 하면서 농사와 목축, 수렵을 겸하며 살아갔습니다.
요(遼, 916~1125)와 고려가 세워진 뒤, 여진의 각 부족은 강력한 두 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상국(上國)으로 섬겼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국경 마을이나 섬 등을 약탈하며 생존을 이어갔고, 불리해지면 요 또는 고려로 부족을 이끌고 귀순하는 일이 많았지요. 이를 『고려사(高麗史)』에서는 내투(來投)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고려사』를 보면 건국 초부터 약 200년간 고려에 내투한 여진인의 수가 4만 4,226명에 달합니다. 고려는 여진인들이 사는 지역을 번(蕃)이라 부르며 약탈을 벌이는 부족은 토벌하여 쫓아내는 반면, 내투한 부족장에게는 명목상의 벼슬을 내리고 고려 거주를 허락하는 등 강온 양면책을 펼쳤습니다. 여진인들이 고려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다음 사료가 잘 설명해줍니다.

그 선조이신 태사(大史) 오고랄(烏古剌)에게
평주(平州)의 산수(山水)가 빼어난 기운을 주었네.

금나라 사람들의 시에 이르기를, ‘연(燕) 땅은 신선의 거처요, 삼한(三韓)은 부모의 나라라.’라고 하였으니, 대개 근본을 잊지 않은 것이다.

其先大史烏古剌 山水平州鍾秀氣
金人詩云 ‘燕地神仙窟 三韓父母鄕’ 蓋不忘本也

- 『제왕운기(帝王韻紀)』 권상(卷上), 금나라 태조의 이름은 민(旻)이고 성은 완안(完顔)이다

그러나 12세기에 이르러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지금의 하얼빈 일대에 있던 완안부(完顔部)의 족장 영가(盈歌)가 갈라졌던 여러 여진 부족들을 통합하기 시작합니다. 1104년(숙종 9) 영가의 조카 우야소(烏雅束)는 지금의 함경남도 정평(定平) 부근으로 추정되는 천리장성 일대까지 진출, 고려군과 크게 부딪힙니다. 이때 고려는 임간(林幹)을 보내 우야소를 정벌하게 했으나 실패하고, 윤관(尹瓘, ?~1101)을 보내어 화친을 맺고 맙니다.
윤관은 숙종에게 패전의 원인을 아뢰면서 기병 양성 등을 건의했습니다. 이에 숙종은 기병인 신기군(神騎軍), 보병인 신보군(神步軍), 승려군인 항마군(降魔軍)을 합친 별무반(別武班)을 편성하였습니다. 1107년(예종 2), 고려는 윤관을 도원수(都元帥), 오연총(吳延寵, 1055~1116)을 부원수(副元帥)로 삼고 군사 17만을 동원하여 여진을 토벌하고 9성을 쌓았습니다. 9성의 위치를 두고는 여러 설이 있지만, 여진족이 살던 터전에 성을 쌓아 고려의 군현으로 만들고자 했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고려 입장에서 9성을 오래 지키기 어려웠고, 여진이 고려를 길이 상국으로 섬길 것을 맹세하며 9성을 돌려 달라 애원하자 1년 만에 그들에게 돌려주고 말았습니다.
1115년, 우야소의 후손인 아구다(阿骨打, 재위 1115~1123)가 여진을 통일해 금(1115~1234)을 세우고, 1117년 고려에 형제 맹약을 요구합니다. 이후 금은 요를 멸망시키고 북송(960~1127)의 수도 개봉(開封)을 점령해 휘종(徽宗, 재위 1100~1125), 흠종(欽宗, 재위 1125~1127) 부자를 끌고 가는 등 중국 북부 지역의 패권을 잡았습니다. 이에 금은 고려에도 사대 관계를 강요하였습니다. 그때 고려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이자겸(李資謙, ?~1126)은 금과 타협해 평화를 얻고자 하였고, 이후 몽골이 일어나고 금이 멸망할 즈음까지 금과 고려는 큰 분쟁 없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됩니다. 고려의 여러 유적에서 금나라 유물이 출토되기도 하는데, 이는 둘 사이에 상당한 물적 교류가 있었음을 증명합니다.

짐짓 우리를 일컬어 부모의 나라라고 하고
형제 관계를 맺어 사신을 통하였네.
신(臣, 이승휴)이 일찍이 식목집사(式目執事)가 되어 식목도감의 문서를 열람하였는데, 우연히 금나라 조서(詔書) 2통을 얻었다. 그 첫머리에 모두 이르기를, ‘대금국 황제가 고려국 황제에게 글을 부치오이다. … ’라 하였으니, 이것이 형제 관계를 맺은 증거이다.

故應謂我父母鄕 結爲兄弟通信使
臣嘗爲式目執事 閱都監文書 偶得金國詔書二通 其序皆云 ‘大金國皇帝 寄書于高麗國皇 帝云云’ 此結兄弟之訂也

- 『제왕운기』 권상, 금나라 태조의 이름은 민이고 성은 완안이다

여진 문자가 새겨진 팔각형 청동거울, 금, 지름 12.9cm, 본관245  여진 문자가 새겨진 팔각형 청동거울, 금, 지름 12.9cm, 본관245

 백자 양각 당초무늬 완, 금, 높이 6.2cm, 지름 18.5cm, 개성24 백자 양각 당초무늬 완, 금, 높이 6.2cm, 지름 18.5cm, 개성24


여진 글로 누가 무슨 내용을 썼을까

다시 이 탁본의 원본인 북청 여진문자 석각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 석각은 함경남도 북청군 속후면 창성리(발견 당시 지명)의 한 절벽에 새겨졌습니다. 절벽에 새겼다 해서 이런 형식의 금석문을 마애명(磨崖銘)이라고 하지요. 이 지역은 조선 초기 육진(六鎭) 개척 이전까지 여진인들이 주로 살던 곳이었어요. 그곳에 왜 5행 50자의 여진대자(女眞大字) 마애명이 남아있었을까요? 우선 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고려국으로부터, 어질고 착한 일리□(一里□) 화상(和尙)은
과파맹안(果葩猛安)에 이르렀으니,
미륵불의 불타안거도(佛陀安居道)에 이르기를 바라는
천 개의 봉우리가 뾰족 솟은 암석이 있더라.
  누런 호랑이의 해(戊寅年, 1218) 7월 26일
Ⓒ愛新覺羅 烏拉熙春‧吉本道雅, 『韓半島から眺めた契丹‧女眞』, 京都大學學術出版會, 2011

‘맹안’은 1114년에 금 태조 아구다가 설치한 군사 ‧ 행정 조직입니다. 300호(戶)를 1모극(謀克)으로, 10모극을 1맹안으로 삼아 평시에는 장정들이 수렵이나 농경에 종사하게 하고 전쟁이 났을 때 군사로 나오게 했죠. 그리고 이를 이끄는 수장 지위는 세습하도록 하였습니다. ‘과파맹안’이란 지금의 함경남도 북청군 일대에 있던 금의 ‘맹안’ 이름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때는 1218년(고려 고종 5년, 금 선종 흥정 2년), 고려의 한 승려가 국경 너머 과파맹안의 산속에 들어왔습니다. 그에게는 이곳의 삐죽삐죽한 돌들이 꼭 미륵의 권속(眷屬)이나 자신의 도반(道伴)마냥 느껴졌던 모양입니다. 해서 여기에 앉아 도를 닦고 불법을 논했습니다. 이 일대 여진인들에게는 거친 산중에서 도를 닦는 그 스님이 참 어질고 착하게 여겨졌던가 봅니다. 그리하여 누군가가 자신들의 문자로 그 내용을 새겼던 것이죠.
여진은 12세기 초 금을 세울 때까지도 자신들의 문자가 없었습니다. 금 태조 천보 3년(1119)에 완안희윤(完顔希尹, ?~1140)이 해서체 한자와 거란 문자를 참고해 문자를 만들었는데, 이를 여진대자라고 합니다. 그 뒤 금 희종(熙宗, 재위 1135~1149) 천권 1년(1138)에 희종이 스스로 여진대자를 개량하여, 황통 5년(1145) 이후 흠정문자(欽定文字)라는 이름으로 쓰게 하였습니다. 이것을 여진소자(女眞小字)라고 합니다. 현재 여진문자는 대자와 소자를 막론하고 완벽하게 판독하기 어려운데, 이 석각은 연대가 분명할 뿐만 아니라 글자가 비교적 명료하고 문장이 간결해 여진대자 연구에 좋은 자료입니다. 나아가 금대 지방사, 사상사 연구에도 중요한 사료가 되지요.

오늘날까지 이 석각을 학자들이 읽어보고 그 내용을 알 수 있게 된 것, 그것은 바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이 탁본 덕택입니다. 카메라나 복사기가 없던 시절 탁본은 옛사람의 필적을 널리 전파하고 감상할 수 있게 하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나아가 원래의 금석문이 자취를 감추거나 심하게 마모되었을 때, 그 내용과 서체를 알 수 있는 기준이 되지요. 지금은 가볼 수 없는 땅이 된 북청, 이 석각이 그대로 있을지 알 길이 없습니다. 100여 년 전 일본인들이 찍은 사진과 연구를 위해 떴던 탁본만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지금도 이 석각이 북청의 그 산자락에 있다면 좋겠습니다. 이 탁본의 사진을 들고 그 위치를 찾아가보려고요. 칼바람 부는 북청 땅 산비탈에 서 있을 저 석각 앞에서, 더듬더듬 글자를 손으로 짚어가며 비교하고 읽어본다면, 도서관의 책 속이나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을 보는 것보다 좀 더 그 옛날 고려와 여진이 있던 시절의 분위기를 잘 느낄 수 있을 테니까요.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출처표시+변경금지
국립중앙박물관이(가) 창작한 북청 여진문자 석각(北靑女眞文字石刻) 탁본 - 함경도에서 발견된 금나라 마애명(磨崖銘) 저작물은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출처표시+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